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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인터넷, 에너지 고속도로

道雨 2025. 6. 23. 10:13

경부, 인터넷, 에너지 고속도로

 

 

 

“인공지능(AI)과 예의 바르게 대화할수록 전기를 낭비하게 된다.”

오픈에이아이의 최고경영자(CEO) 샘 올트먼이 던진 한마디가 얼마 전 화제가 됐다.

 

인공지능과 나누는 인사말 한줄조차도 상당한 전력을 소모한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시대의 본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공지능의 도래와 함께 전기는 공장이나 가정의 동력원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작동시키는 핵심 자원이 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인류가 ‘석탄의 시대’와 ‘석유의 시대’를 넘어 ‘전기의 시대’로 본격 진입했음을 선언했다.

 

뭔 새삼스러운 선언인가 싶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족하다.

필자가 보기엔, 산업의 전기화를 넘어, 인지와 신뢰마저 전기로 구현하는 ‘문명의 전기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막대한 전력을 소모한다고 지적당해왔지만, 비트코인은 기존 금융기관이 담보하던 ‘신뢰’를 수학적 알고리즘과 전력 소비를 통해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실증했다. ‘신뢰의 전기화’다.

 

인공지능은 더 극적이다. 인간의 사고와 판단, 대화를 재현하기 위해 수십억개의 파라미터가 작동한다. 인터넷의 시대가 열리고 지난 30년간 인류가 쏟아내고 있는 엄청난 데이터가 인공지능과 어우러지며, 더 고도화, 집적화되고 있다. 전기로 구현된 연산을 통해 인류의 사고체계 자체가 ‘전기화’되고 있는 셈이다.

산업혁명이 인간의 근육을 기계로 대체했다면, 인공지능은 인간의 두뇌를 전기회로와 소프트웨어로 대체하는 지식노동의 전기화이자, 지능의 전기화를 향한 거대한 흐름이다.

 

새 정부가 발표한 ‘에너지 고속도로’ 정책은 그래서 의미 있는 첫걸음으로 보인다. 전력 수요가 급증하는 산업단지나 데이터센터 중심지에 송전망을 촘촘히 연결하겠다는 구상은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물리적 인프라 확충에만 초점을 맞춘 채, 왜 이렇게 많은 전력이 필요한가에 대한 본질적 성찰은 부족하다.

박정희 시대의 경부고속도로, 김대중 시대의 인터넷 고속도로 같은 과거의 성공 사례를 재현하겠다는 구두선에 그칠 공산이 크다. 산업화가 뒤떨어진 시기에는 그저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성공 방정식을 써 내려갈 수 있었다. 무엇을 채우고 달리게 할지는 다음으로 넘겨도 충분했다.

 

구제금융 사태 이후,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투입 요소로, 건설 인프라가 아닌 인터넷 고속도로를 점찍은 것은 매우 탁월한 정책적 판단이었다. 다만 그 이후 무엇을 실어 나를 것인가에 대한 정책의 부재, 인터넷이 가져올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에 대한 정책적 상상력의 한계는 이후 모바일 시대에 뒤처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에너지 고속도로 위를 달리게 할 성장동력으로 인공지능 육성 대책을 내놓긴 했지만 기술, 인재, 규제개혁 등 관공서식 정책 나열에 그치고 있다는 인상을 줄 뿐이다.

 

전기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전망은 단순히 전기차 보급률, 히트 펌프 전환율, 인공지능 대책 등 산업구조의 체질 변화만이 아니라, 사회를 작동시키는 원리의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제 전기를 도로처럼 깔고 흐르게 하는 수준을 넘어, 그 전기를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의 세계정세와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일단 고속도로부터 깔고 나면 뭐든 채워지겠지 식의 과거 방식과는 다른 대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신뢰가 전기화되고, 인지가 전기화되는 ‘문명의 전기화 시대’에 필요한 것은 비단 더 많은 전기가 아니라, 더 똑똑한 전기 사용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이다.

진짜 ‘에너지 고속도로’는 전선 위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사유 체계 안에 먼저 깔려야 한다. 각개 전투, 백화점식 진열에 그치고 있는 인공지능, 에너지, 스테이블코인을 이슈로 하는 블록체인 정책이 입체적이고 일관된 맥락에서 재구성돼야 하는 이유다.

 

 

 

김진화 | 연쇄창업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