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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무 박사`가 파헤친 팔만대장경 비밀

道雨 2007. 10. 3. 10:12

 `나무 박사`가 파헤친 팔만대장경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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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고(藏經板庫)를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렸다. ‘장경판고’는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을 말한다.

이상하다. 분명 중요한 것은
대장경판인데, 건물만 등재되다니. 유네스코의 취지는 움직일 수 있는 동산 문화재보다 건물이나 탑 등 부동산 문화재와 자연유산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원문에 보면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고’라고 표기하고 있으니 장견판고와 경판도 함께 등록되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자랑스런 세계문화유산 팔만대장경은 무엇인가. 일단 양적인 의미부터 살펴보자.

팔만대장경이라는 이름에 벌써 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정말 팔만대장경은 팔만개인가? 답은 81,258개다.

이 경판을 가로로 눕혀 높이 쌓으면 거의 백두산 높이가 되고, 이으면 그 길이가 150리, 무게로는 250톤에 이른다고 하며, 안에 수록된 글자가 무려 5,200만 자라고 한다. 이는 ‘
조선왕조실록’이 수록하고 있는 글자 수인 5,600만자와 비슷하다.

5,200만자. 대체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다만 한자에 능숙한 사람이 하루 8시간 씩 30년을 읽어야 내용이 파악될 정도의 양이라고 하니 정말 엄청난 양이다.

다음은 질적인 면. 책에 따르면 경판에 새긴 한 자의 크기는 가로 세로 1.5 센티미터 정도이며 글자 한 획의 두께는 약 1.5밀리미터에 불과한 글자가 5,200만자에 달하건만 한 자도 틀린 글자가 없다.

고려 목공들은 대장경에 글자를 한 자 새길 때마다 한 번씩 합장하고 소원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쉽게 말해 대장경 제작에 지극 정성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왜 이렇게 대장경 제작에 혼신을 기울였을까.

판만대장경이 새겨질 시기의 고려의 정세를 생각해 보면 이렇다. 1236년에 시작해 1251년까지 16년이란 시간을 들인 작품이다. 1236년이라고 하면 고려는 풍전등화에 처했던 시기이다. 세력을 확장한
몽골의 힘은 드디어 중국 대륙을 넘어 한반도에까지 이른다.

초조대장경을 제작함으로 인해 거란의 침입을 물리쳤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불교 국가 고려에서는 몽골이라는 강력한 외침을 막기 위한 모종의 힘이 필요했을 시기였다. 국력이 모자란 그들에게 남겨진 것은 바로 종교의 힘으로 조국을 지키고자 했다. 고려인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바로 불력(佛力)이었던 것이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 때문이었는지, 고려는 멸망하지 않는다. 모든 아시아 국가와 지금의 동유럽 전역이 몽골의 말발굽 아래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고려는 지도에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려 목공들의 정성 때문이었을까?

지금으로부터 760년 전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지금껏 남아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정도로 한반도는 지속적으로 전쟁에 시달려 왔었고,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에도 수많은 화재에 시달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손되지 않고 남아있다. 이에는 많은 에피소드가 전해지고 있다.

한국전쟁당시 해인사는
지리산자락에 있었기에 빨치산 치하에 있었다. 그래서 이들을 공격하기 위해 대한민국 공군이 출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편대장인 김영환 대령은 폭탄으로 공격하지 않고 기관총으로만 적을 공격한다. 그는 폭탄으로 공격하면 적을 섬멸할 수 있지만, 팔만대장경이 파괴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군의 명령에 항명했다. 만약 편대장이 우리 역사나 문화유물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그때 팔만대장경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해인사에 가면 김영환 대령의 공적비가 있다고 한다.

이 책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김영사. 2007)은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지고 현재까지 남아있는 과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내용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책이 가진 의미는 지금부터다.

저자는 목재조직학자인 박상진교수이다. 그는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김영사. 2004)에서 보듯이 나무를 통해서 역사를 해석해 낸 학자이다.

팔만대장경의 재료가 되는 나무에 대해 교과서를 비롯해 대부분의 의견은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특히나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각종 문헌에서 나무의 명칭에 대해 자작나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무의 세포 모양과 배역을 현미경으로 연구하는 목재조직학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팔만대장경의 표본조사결과 산벚나무, 돌배나무, 거제수나무가 88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통설에서 말하는 자작나무는 하나도 없었다.

또 많은 논란이 있는 부분인 경판의 탄생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통설에 의하면 경판은 강화도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려사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조차도 강화도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경판의 재료인 나무들이 자라는 장소와 함께 그 많은 양의 경판을 옮긴다는 것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안 한다면, 경판의 제작지는 최우의 식읍지였던 진주를 비롯하여, 해인사와 가까이에 있는 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까 문헌에 나타난 증거를 박상진 교수는 목재조직학이라는 학문을 통해서 매우 과학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이를테면 하나의 자연현상이나 역사적인 유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 역사학과 전혀 관련이 없는 학문의 도움이 필요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김영사.2002)와 같은 책은 학제간 연구가 필요함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역사학이 더욱 진실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목재조직학과 같은 다른 학문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독자들이 깨닫게 해준다.

****************************** <북데일리/시민기자 이동환 2007.10.1>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장경 인쇄본을 달라고 처음 요구한 것은 고려 말인 1388년 포로 250명을 돌려보내면서였다. 이후 조선 효종 때까지 80여 회에 걸쳐 끊임없이 요구했다. 대장경 인쇄본을 얻으려는 수차례 요구가 좌절되자, 일본은 사신이 단식투쟁을 하거나 군사를 동원하여 대장경을 탈취할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20쪽)

“‘팔만대장경판은 자작나무로 만들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심지어 해인사 수다라장의 관람 통로 안에 있는 경판 제작 표본 나무도 자작나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팔만대장경판은 정말 자작나무로 만들어졌을까? 자작나무는 백두산 원시림을 비롯한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 중국의 동북부,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 걸쳐 자란다. 자작나무를 베어다 경판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지역은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이다. 나무를 벌채하여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뗏목을 띄워 황해로 내려와 강화도로 가져와야 한다. 대장경판을 새길 당시 수도 개성을 비롯한 육지는 몽고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런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79쪽)

 

                                                                  <본문중에서>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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