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성지⑭-경주 황룡사지 9층 목탑
불가사의로 다시 잠깬 '불멸의 호국염원'
'여자가…’라는 편견은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일각에서는 ‘남성 할당제’를 시행해야 할 만큼 세상이 달라지고 있지만, 첨단과학시대인 오늘날조차 “아직도 여자가…”라는 선입견은 엄존한다. 이런 마당에 치마입은 여자로서 한 나라를 통치해야했던 신라 선덕여왕의 삶은 어떠했을까?
경주 낭산(狼山)에 묻혀있는 선덕여왕은 지금부터 1362년 전, 파란만장한 삶과 현실적 어려움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원대한 꿈을 현실화시켰다.
바로 동양최대의 목탑으로 한국인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불멸의 탑, 황룡사 9층 목탑이다. 일본을 포함한 주변 9개 오랑캐국을 불력으로 물리치려던 선덕여왕의 비원이 서린 황룡사 9층 목탑은 몽골의 침략으로 연기로 사라진 지 오래이다.
아쉽고 그립다. 아릿하게 쓰려오는 그리움을 안고 지난 18일 오후 실비가 뿌리는 황룡사지에 섰다. 경주 월성 동쪽, 새 궁궐을 지으려고 땅을 파보니, 거대한 황룡이 나와서 절을 지었다는 황룡사지 8만 2천여㎡에 이르는 거대한 사역에 여기저기에 놓여있는 주초석 사이로 천년 숨결이 느껴진다.
세세대대 나라를 이어가려던 여왕의 염원을 현실화한 탑은 어디로 가고, 물기 가득 머금은 초추(初秋)의 바람만 불어오는가. 목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참아내며, 부활할 그날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는 황룡사의 천년 한(恨), 우리 손으로 풀어줄 날 있으리라.
◈ 황룡사 목탑 기술 지금도 어려워
황룡사는 꼭 복원되어야 하지만 결코 쉽지 않다. 돈만으로, 혹은 의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를 안고 있다. 25층이 넘는 아파트에 해당하는 82m 높이를 지닌 황룡사 목탑이 어떻게 가능하였을까?
지금도 황룡사 9층 목탑의 건축기술은 신이(神異)에 가까운 불가사의로 여겨지고 있다. 21세기 첨단기술로도 황룡사 목탑기술을 구현해내기 힘들다. 황룡사에 관련된 더 확실한 고증이 여러갈래로 더 많이 나와야한다는 숙제도 남아있다.
황룡사지 9층 목탑 복원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고, 그때마다 끝없는 학계의 논란이 이어졌다. 그만큼 '성지로 복원되어야 한다'는 대중적 염원 못지않게 '제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학구적 신중론이 팽팽하게 대립되어 사업을 진전시키기가 어렵다.
하지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황룡사지 금당자리에 서보라. 서라벌 가을바람을 타고 황룡사의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황룡사가 여기 있노라. 언젠가는 나(황룡사)를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나와서 잃어버린 나의 꿈을 되찾게 해줄 것"이라고 말이다.
◈ 쏟아진 4만여점의 유물들
황룡사는 약 100년에 걸쳐서 사역이 조성된 대찰이었다.
경주 월성의 동쪽, 왕경지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황룡사지는 무려 8만 2천여㎡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년)부터 선덕여왕 14년(645년)에 걸쳐 93년간 조성된 황룡사지 발굴에서는 금동불입상 사리함 등 4만여 점의 유물과 높이 182㎝의 대형 ‘치미’(용마루 끝 장식물, 현재 경주국립박물관 전시)가 출토됐다.
당시 황룡사지 발굴에서는 연대와 발원자가 뚜렷하게 하얀 한지에 붓글씨로 기록된 두루마리식 불경(佛經)인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 화엄경'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신라백지묵서 대방광불 화엄경'은 전라도 화엄사의 창건연대뿐 아니라 이두, 회화, 종교, 건축, 제지기술, 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신라문화 추적의 길을 열어주었다. 황룡이 나왔다는 창건설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곳은 늪지여서 습기가 많다.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성군에는 황룡사 9층 목탑인 듯한 9층 목탑이 새겨져 있기도 하다.
◈ 선정 베푼 여왕의 고단한 삶
선덕여왕은 영국 튜더왕조의 마지막 왕인 헨리 6세의 딸로서 구빈법(Elizabethan Poor Law)을 통해 빈민구제에 앞장섰던 엘리자베스 여왕처럼 구휼사업에 앞장서는 등 선정을 베풀고, 분황사와 첨성대를 건립하는 등 신라 문화를 진작시키며 삼국통일의 기초를 놓은 성군이다.
그러나 밖으로는 백제와 고구려의 침략을 끊임없이 받았고, 나라안에서는 비담 염종 등이 역모를 도모하였다. 선덕여왕은 이 모든 어려움을 불심으로 타개하고자 하였다.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왕이 곧 부처'라는 즉 부처인 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식의 관념으로 불교를 전파하는데 힘을 기울여 사회통합을 시도하였다. 선덕여왕은 아버지 진평왕처럼 종교를 통해 사회통합에 주력하였고, 이같은 목적에서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웠다.
황룡사 9층 목탑은 경주 분지의 모든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거대한 탑이었다. 황룡사는 신라가 가장 중요시하였던 최대 규모의 절로 신라 3보인 장육존상(지금도 황룡사지 금당터에서 장육존상의 기초돌을 볼 수 있음)과 황룡사 9층 목탑을 지닌 호국사찰이었다.
◈ 황룡사지 장육존상의 신통력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흥왕 14년에 월성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고자 했는데 그 곳에서 황룡이 나타나 절로 고쳐 지었는데, 그 이름을 황룡사라 했다.'고 하였다.
이때 지어진 황룡사가 1차 가람이 569년 완공됐고. 5년 뒤 황룡사 장육존상을 지었다. 키가 크다는 의미를 지닌 장육존상은 4.7m 내지 5m쯤 되는 거대한 서있는 부처(立佛)로 여겨지고 있다.
이 황룡사 장육존상은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는데, 어느해 황룡사 장육존상이 흘린 눈물이 발꿈치를 적셨다. 이듬해에 진흥왕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다시 10년 뒤에는 금당을 완성하였다.
금당이 완성된 뒤 60여 년이 지나 선덕여왕 때(645년)에 황룡사 9층 목탑이 세워졌다. 금당은 사방 9칸 크기로 64개의 주초석이 심어져있다.
장육존상의 조성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이런 기록이 있다. 지금의 경북 울주 지방에 큰 배가 와서 닿았는데 그 배에는 편지와 1불 2보살상의 모형이 실려 있었다. 편지에 인도 지방의 아쇼카이 황철 3만 4천201kg과 황금 11.25kg으로 석가삼존불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루지 못하여 바다에 띄워 보내니 인연 있는 나라에서 장육존상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황룡사에 모셔 약 5m(1장 6척)의 장육존상을 1차 가람의 금당에 모시니 금당이 너무 작아 다시 금당을 지었다 한다. 지금 황룡사지에 가보면 중금당 좌우에 동금당, 서금당이 서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는 1탑 1금당이었으나 나중에 1탑 3금당으로 바뀐 셈이다. 3금당은 일직선상으로 나란히 서있다.
◈ 이웃나라가 항복할 것
황룡사 9층 목탑은 자장율사의 건의에 의해 선덕여왕 14년(645)에 완성되었다. 이 탑을 세우고 23년 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였다.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우기 전, 자장율사는 당 유학 중에 한 신인(神人)을 만났다. 그 신인은 "황룡사 호국룡(護國龍)은 나의 장자(長子)로 범왕(梵王)의 명을 받아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본국에 돌아가 그 절에 9층탑을 이룩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며 왕업이 길이 태평할 것이요, 탑을 세운 뒤에 팔관회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이 해치지 못할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자장은 신라에 돌아와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여 9층 목탑을 세우고 부처의 진신사리 100알을 탑 속에 봉안하였다는 내용이 이 탑의 발국과정에서 나온 찰주본기에 적혀있다.
황룡사는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이었기 때문에 왕이 직접 참여하여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인왕회(仁王會), 국왕 참석 하에 100명의 고승이 모여 불경을 강론하는 백고좌강회(百高座講會) 등이 통일 전부터 신라가 망해 가는 경애왕 말년까지 여러 차례 있었다. 신라 멸망 후에도 황룡사는 고려 왕조에서도 깊은 숭상과 보호를 받았으나 1238년(고종 25) 몽고군의 침입으로 목탑은 물론 일체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 찰주세울 때 백제 망하는 꿈
9층 목탑의 건축 총감독은 백제의 장인 아비지. 아비지가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던 날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주변의 구한(九韓) 즉 말갈, 고구려, 백제, 왜 등의 침범을 막기 위해 지은 것이라는 내용이 '삼국유사'와 황룡사지 발굴과정에서 나온 '찰주본기'(刹柱本記)에 기록되어 있다.
황룡사지 복원모형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경주국립박물관, 독립기념관 등에 있고, 지금 한창 경주는 첨단디지털기술로 재현된 황룡사 9층 목탑의 신비에 젖어있다.
2007 세계경주문화엑스포장의 경주타워에 들어선 황룡사 9층 목탑을 형상화한 경주타워에서 황룡사를 포함한 경주, 신라의 역사 문화를 용출해내는 이색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 영상과 조명, 레이저, 불꽃, 음향 등이 함께하는 첨단멀티미디어쇼는 황룡사 9층 목탑 탄생설화를 현대양식으로 스토리텔링하면서, 황룡사의 부활을 약속하고 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솟구치는 천년의 빛, 탄생을 알리는 기운찬 아기의 울음소리 들리고, 하늘로부터 오색청롱한 빛이 쏟아져 내리면서 알에서 금빛을 가진 신비로운 아이가 탄생하고, 황룡의 모습이 암시된다.
석굴암 본존불의 은은한 미소가 담긴 얼굴이 화면을 오가고, 황룡사 첨단 9층탑은 층마다 다른 컬러, 패턴으로 채워진다.
전층에 신비한 푸른 불이 들어오면 황룡사 9층탑이 등장한다. 전쟁을 넘어, 분쟁을 넘어 생명이 탄생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이 완성되면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이 등장한다. 용이 승천하고, 눈부신 별들이 이 땅으로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비록 지금은 사라진 황룡사 9층 목탑이 1362년 전에 세워졌기에 21세기 오늘날 우리가 풍성한 이야기거리에 젖을 수 있다. 경주역사사적지구 조성으로 하루빨리 황룡사 9층 목탑이 복원되기를 바라본다.
****************************** <매일신문/최미화기자 사진·정우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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