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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못 <그림자못>에 허왕후의 슬픈 전설이 어린 칠불암이 비치고 있다. |
ⓒ 경남도민일보 |
땅 힘에 대한 믿음이 담긴 서낭이야기.
자연은 모두 하나라고 말하는 청학동 전설.
자연의 힘을 두려워하고 존경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황산대첩의 뒷이야기.
지리산은 짙은 수풀의 뫼이듯이 켜켜이 쌓인 이야기의 산이다.
이야기(설화)는 사람이 삶을 담아서 주고받으며 즐기는 말꽃으로,
살았던 삶이 아닌 '꿈꾸는 삶'을 담고 있다.
따라서 지리산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골짜기와 자락으로 이루어진 팔백리 둘레에 몸 붙여 살아온
겨레의 꿈이자 삶의 거울이다. 그 이야기 속으로 거칠게나마 들어가 본다.
서낭(신령)이야기-풍수지리사상과 땅 힘
옛날 아주 아득한 옛날, 지리산이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던 어느 아낙이 그걸 보고 "산이 걸어 나온다"하고 소리쳤다.
그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
하동군 화개면 정금마을 '노루목'에 내려오는 이야기로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동군 화개면 탑리 쌍계사 올라가는 길로 가면 약수정이라는 곳이 있다.
약물이 나오는 우물이다. 옛날에는 본디 쌀이 나온 곳이었다.
꼭 한 사람이 먹을 만큼만 쌀이 나왔는데 하루 먹을 거리를 더 나오게 하려고
구멍을 크게 만들려고 쑤셔 그때부터 쌀이 안나오고 물이 나왔다고 전한다.
쌀은 '땅 힘'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신선이야기-자연은 하나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새라고 한다.
옛 사람들은 청학이 사는 청학동을 신선의 고장이라 여겼다.
일찍이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100리, ...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했으며,
이를 본 고려 때의 이인로, 조선 시대의 김종직과 김일손, 유운용 같은 이들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몇 리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 곳에 사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고 했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는 못하였다고 고백한다.
김종직은 피아골을,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운용은 세석고원을 청학동이라고 짚어 보긴 했지만
모두들 확신하지는 못한다.
지리산에 청학동이라고 불리는 곳은 오늘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사는 청학동 말고도
불일폭포 부근, 세석고원,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위쪽), 상덕평 마을(선비샘 아래) 같은 여러 곳이다.
말하자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
부처이야기-허왕후의 슬픈 전설
칠불암에는 허왕후의 슬픈 전설이 아직도 내려온다.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왕자들을 만나보려고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조차 선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허왕후는 참다 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그러나 '우리 칠 형제는 이미 출가 성불하여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는 음성만 들렸다.
허왕후는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아들들은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시라'고 했다.
허왕후가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거기 성불한 일곱 왕자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잠깐, 한번 사라진 일곱 왕자의 모습은 그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연못은 그 뒤로 그림자못(영지)이라 불렀고,
수로왕이 이때 머물렀던 곳을 범왕촌(梵王村)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범왕리(凡王里)로 바뀌었다.
또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大妃村)으로 일컬었는데, 지금은 대비리(大比里)로 바뀌어 있다.
사람이야기-황산대첩과 인월의 비밀
황산대첩과 인월의 이야기는 고려 말엽으로 돌아간다.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왜구가 삼남을 노략질하며 지리산에 진을 치고 살다시피 했다.
고려는 도순찰사 이성계, 도체찰사 변안렬을 중심으로 왜구 토벌에 나섰다.
토벌군이 남원에 닿으니 왜구 아지발도 본진은 운봉에 있었다.
이성계는 날랜 군사 5백을 뽑아 선봉에 서서 산 위의 왜구를 쳐들어갔다.
적진의 선봉에는 아지발도라는 열대여섯 어린 장수가 뛰어난 무예로 고려군을 무찔렀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무예를 아껴 사로잡으려 하자
곁에서 이지란이 그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이라 했다.
이성계는 마음을 고쳐먹고 아지발도의 가슴에다 깃이 큰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화살은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고 아지발도는 더욱 기세를 돋우어 날뛰었다.
이성계는 다시 이지란과 의논한 끝에 화살로 아지발도의 얼굴을 가린 투구를 쏘아 떨어뜨리고
그 틈에 이지란이 재빨리 이지발도의 얼굴에 화살을 꽂았다.
아지발도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지자 전세는 뒤집어졌다.
수많은 왜구가 토벌군의 칼 아래 쓰러지며 운봉에서 인월까지 이십 리 길을 도망쳤다.
이때 시각이 새벽녘으로 달이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달이 넘어가고 어두워지면 피아를 구별할 수가 없어 왜구의 잔당을 소탕할 수가 없어진다.
달빛이 절실해진 이성계는 넘어가는 달을 끌어당기면서 싸워 남아 있던 왜구를 남김없이 무찔렀다고 한다.
달을 끌어당겼다는 뜻의 '인월'이라는 땅이름은 이래서 생겼다고 한다.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만수천 물이 죽은 왜구의 피로 온통 물들어 열흘동안 흐르면서
커다란 바위를 붉게 만들었다. 지금도 붉게 물든 바위를 '피바위'라 부른다.
- 글=경남도민일보 박종순 기자
- 도움말=김수업(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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