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전설, 설화

신의 물방울

道雨 2008. 10. 18. 15:50

 

 

신의 물방울 

[김학민의 주류인생] 김학민의 ‘술 이야기’ 첫 회

술은 맨 먼저 누가 만들었는가, 원숭이인가 인간인가 신인가

 

» 헨드릭 골치우스의 판화 <바쿠스>.
호모사피엔스 키키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먹을 것을 찾아 숲 속으로 들어갔다. 행여 돌도끼로 잡을 수 있는 작은 짐승이라도 걸리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오늘도 나무 열매로 온 식구가 배를 채워야 할 형편이다.

그러나 한나절을 쏘아다녀도 키키의 보잘것없는 사냥 도구에 잡힐 짐승은 한 마리도 만나지 못했다.

오늘도 허탕이군. 할 수 없지. 나무 열매라도 주워가자.

이제 막 돌과 흙으로 도구도 만들어보고 땅에 씨앗도 뿌려보았지만, 거기서 나온 알곡으로 식구들의 주린 배를 모두 채울 수는 없었다.

 

키키는 문득 며칠 전 불그스름한 열매를 주워먹었을 때 입 안에 가득했던 맛을 기억해내고는 그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무에는 원숭이들이 가지가지 매달려 열매를 따먹고 있었다.

키키는 떨어진 열매를 허겁지겁 주워먹어 가면서 한편으로는 식구들을 위해 열심히 열매를 쓸어모았다. 한참을 먹다 보니 배는 부른데 목이 마르다.

바윗돌 우묵 팬 곳에 물이 고여 있다. 물속에는 떨어진 나무 열매들이 뭉개져 있었지만, 원숭이들은 그 물을 잘도 마시고 있다. 키키는 원숭이들을 쫓아버리고는 머리를 숙여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새콤달콤한 느낌이 사르르 목젖을 타고 넘어가는 듯하더니 머리끝까지 뜨거운 기운이 확 뻗쳐 올라왔다. 그리고 그 야릇한 맛은 입 안에 한참 동안 머물러 있으면서 온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을 갖게 했다. 키키는 나무 열매를 대충 챙기고는, 후들거리며 초막으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처럼 최초로 술을 빚은, 또는 발견한 생명체는 신도 사람도 아닌 원숭이로 추정된다. 바윗돌 움푹 팬 곳이나 나뭇등걸 틈에 자연적으로 떨어지거나 원숭이가 숨겨놓은 과실이 우연히 발효된다. 이것을 처음에는 원숭이가, 나중에는 인간이 먹어보고 맛이 좋아 계속 만들어 먹은 것이 술로 발전했다는 설이다.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는 “신은 물을 만들었고, 인간은 술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단정하면 술의 발명을 놓고 신과 인간 사이에 분쟁이 생기지 않을까?

 

자연발효는 16도를 넘지 못한다. 16도에 이르면 효모는 더 이상 발효작용을 하지 못하고 죽어버린다. 그래서 나는 16도는 신이 인간에게 허용한 알코올의 최대 임계치이며, 이후 영악한 인간들이 16도 술을 증류하고 증류해 몇십 도짜리 독주로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서양에서는 로마신화 속의 바쿠스 신이 술을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고, 동양에서는 하나라 때 의적(儀狄)과 두강(杜康)이 처음으로 곡류로 술을 빚어 왕에게 헌상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이집트 신화에서는 오시리스가 사자(死者)의 나라의 왕이 된 뒤 보리로 술을 빚는 법을 최초로 가르쳤다고 하며, 구약성서의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는 하느님이 노아에게 포도 재배법과 포도주 제조법을 가르쳐주었다고 씌어 있다.

 

술은 인간의 슬픔을 잊게 하고 기쁨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술은 인간 사이의 경계심을 풀게 하여 사랑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술은 인간의 용기를 북돋워 진실을 드러내게 하기도 한다. 적당한 술은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기능에 자극과 활력을 주어 건강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술은 인간으로 하여금 알코올 뒤에 숨어 태연하게 거짓을 뱉어내게 하기도 한다. 또 술은 인간의 염치를 쫓아내고 짐승의 본성을 드러내게도 한다.

술은 기억을 지워 인간의 일상을 뒤흔들기도 한다. 그리고 지나친 술은 정신적·육체적 기능을 악화시켜 인간을 황폐화시킨다.


이처럼 술은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두 얼굴의 모습으로 지배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 속에 감추어진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드러나게 희롱하는 물질을 왜 인간이 만들어냈겠는가?

물도 신이 만들고 술도 신이 만들지 않았을까?

다만 술이 16도를 넘은 뒤 술의 피폐성이 만연한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른 인간에 대한 징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