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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흔들리는 정체성 그리고 각성

道雨 2008. 10. 18. 16:19

흔들리는 정체성 그리고 각성

                                         - 최수철의 '아우라'를 읽고 -

 

 

작가 최수철의 소설은 쉽게 해독이 되지 않는 암호문을 읽는 것 같다.

한번 읽고서는 작가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그러면서도 작품들은 대체로 '한 길을 걷고 있다'라는 느낌이 든다. 쉽게 읽을 수 없는 난해성, 그러면서도 꼼꼼이 읽다보면 답을 찾아갈 수 있는 매개체가 있다.

 

아우라를 국어사전에서는 '예술 작품에서,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라고  정의한다.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가 어찌 예술작품에 한할 것인가....

글쓴이 최수철은 인간 고유의 속성, 그것은 아우라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현대문명은, 자본주의의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의 문화는 개인의 개성이 가치 있다는 것은 도외시하거나 아니면 대중의 문화 속으로, 모방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게 하는 속성이 있다. 소설 '아우라'는 이러한 현대인들의 흔들리는 내면에 대한 고발이자 아픈 성찰의 기록이라고 할 것이다.

 

  나는 누구의 부름을 받고 고층 건물 안의 사무실로 그를 찾아간다. 건물 안 대형거울을 들여다보니 나 같은 사람이 있다. 거울 속의 나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저절로 걸으며 나를 흉내내고 있었다. 내가 오히려 흉내내는 나를 감당하지 못해 고개 돌릴 때 늙은 쥐가 나타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같이 탄 사람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눈길을 마주하지 않는다. 나도 눈길 둘 길이 없어 층수를 나타내는 숫자를 지켜보는 동안 환각이 일어난다. 층과 층 사이의 간격이 넓어져 사막이 되고 벌판이 되는 가하면 터무니없이 좁아져 나 자신이 그 사이에 납작하게 눌려지고 조각나려는 순간, 늙은 쥐가 나타나 환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사무실에서 그는 다른 사람과 공감하는, 생각하기를 멈춘 사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사물이 되기를 권한다. 처음에는 힘들 줄 알았는데 지금은 편하다는 것이다. 나는 '나마저 사물이 되면 소통을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에 사물이 되기를 거절하면서 이 상황을 어찌 처리해야할지 머뭇거리는 동안 점차 생각과 판단을 잃어가고 나는 수술대 위에서 머리 속과 내장이 모두 꺼내져 미이라가 되고... 그때 늙은 쥐가 나타나 나는 다시 내용물이 채워지고 건물을 빠져 나온다.

  나는 환각이 있기 전부터 자신의 머리를 만져보고 무언가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내게 미소를 지어도 그들의 눈에 내가 담겨 있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채취에 내가 묻어나지 않을 것이며, 우리의 목소리는 각기 자신의 속에서 거품처럼 끓어오른다는, 타인과 나 사이에 존재해야 할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과 나 사이에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를 나는 아우라라고 불렀다. 그리고 늙은 쥐가 나타날 때마다 분열의 고통을 받고 있던 나의 아우라는 다시 회복되곤 한다. 해체와 회복을 거듭하던 나는 결국 나 자신 속으로 아우라를 끌어들인다.  늙은 쥐는 흔들리는 자신을 회복해야 할 때, '나를 잃게 되는 구나'하는 절망과 고투 사이에 끼어 있을 때 늙은 쥐는 나타나서 나를 인간으로 회복시켜 준다. 늙은 쥐는 결국 우리의 정체성,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의 다른 이름이었다.

 

  아우라.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다중인격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는, 그러는 동안 정체감이 흔들렸던 나는 아우라를 번번이 놓치곤 한다. 이것은 결국 개인인 나의 문제이다. 내가 아우라가 없기 때문에, 허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들도 역시 나와 비슷하거나 같은 문제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소설 '아우라'는 상대의 생각에, 느낌에, 소리에 공감하지 못한 채 그 대신 무표정을 지으면서 살아가는 외로운 현대인의 내면의 풍경 한 자락이 그렇게 그려져 있다. 이런 풍경의 사람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떤 점에 연유해서인가? 작품 속의 나는 이 시대를 사는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 우리의 보편적인 상식과 생활 습관, 또한 비슷한 고민과 행복을 맛보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는 결국 이 시대를 대표하는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된다.

  산업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었다. 농업이 자본이었던 시대에는 갖지 못했던 인권과 자유.

그러나 산업의 성격이 자동화 분업화로 바뀌는 동안 사람들은 노동의 즐거움과 성취감을 맛보기 힘들어졌다. 일과 사람이 분리되고, 사람과 사람이 분리되는 순으로 일과 사람이 변해갔다. 이것을 소외라고 부른다. 물질에 바탕을 두고 성장을 이룩한 우리네 사회는 소비를 미덕으로 추켜세우고 사람들의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한껏 커지는데......

  욕망을 마음껏 소유로 전환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소유가 전적으로 가능한 사람이건 부분적으로 가능한 사람이건 간에 소유의 확대를 추구하다보면 상대적으로 정신의 빈곤을 초래하고 정신의 빈곤은 사람들의 인간성을 메마르게 하고, 기계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한다. 노동에서 소외되는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소외되는 사람...... 소외되다 보니 종이같이 팔랑거리는 사람, 사물이 되어 감정을 배제당한 사람 등......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한 존재방식을 추구하면서 살수 있다. 그러면서도 다른사람이 사는 것처럼 사는 게 편해서 남 따라서 산다. 집과 차가 그렇고 여름휴가를 가야하고 아이들은 과외공부를 해야하고......

이렇게 살다가도 어느날 문득 '이건 아닌데? '이런 몸부림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있다.

머물러 있는 자신을, 누구를 따라서 흉내내고 사는 삶에 대한 아픈 각성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내가 머물고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을 나의 의지가 아닌 누군가에게 휘둘린다고 느껴질 때이다.

하지만 이런 각성과 아픔을 직시해서 그리고 상황을 바꿀 힘이 내게 있을까?라는 약한 목소리에 대개는 기가 죽고 만다. 그래서 이런 상황은 모른척 하고 넘어가고 싶다. 또는 비켜가고 싶다. 또는 '아니야!,난 달라지고 싶어!'라고 절규하면서 자신을 지키고자 할 때 이것은 나의 아우라가 늙은 쥐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에게 아우라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작품 속의 '나'가 고통받는 것과도 닮았고 또 다르기도 하다. 다르다는 것은 살고 있는 삶의 공간과 시간이 개별적인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도 아우라가 제시하는 문제는 우리 시대가 공통으로 가지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살아가는 배경이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는 나를 이해할 힘이 있는 동시에 작가는 우리의 공감을 끌어내고 또한 우리의 아우라를 되돌아보게 한다. 현실이 환각일 수 없는 것으로 현실은 눈감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나의 미소, 나의 소리, 나의 냄새로 상대의 가슴에 다가가려는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아우라'를 읽는 동안 나의 정체성, 내가 만들어야 할 나의 모습이라는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출처 : 해운대 부실이
글쓴이 : 부실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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