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고인돌, 청동기인들의 긴 눈짓

道雨 2008. 11. 7. 12:12

고인돌, 청동기인들의 긴 눈짓

전 세계 고인돌의 40%가 한반도에

 

 

강화고인돌  

2000년 12월 2일 한국의 작은 도시인 화순, 고창, 강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일이 일어났다.

이 지역에 자리 잡은 한 무더기의 돌덩이들 때문이었다. 이 돌덩이들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이 돌덩이들은 특이하게도 큰 바위들이 전혀 있을 만하지 않은 곳, 이를테면 마을 어귀 당산나무 아래나 논두렁 사이, 누구네 집 뒷마당 같은 곳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생김새는 넓고 평평하여 그 마을 사람들은 그곳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용되거나 고추를 널어 말리기에 제격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저 조금 특이한 한 무더기의 돌. 과연 이 돌들이 무엇이기에 세상의 관심을 한꺼번에 집중시킬 수 있었을까?

그것은 100여 년 전 이 돌들 아래에서 사람의 뼈와 부장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고대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이 돌무덤은 받치는 돌이 덮는 돌을 고이고 있다고 하여 고인돌이라는 예쁜 이름도 얻게 되었다.

‘도대체 이 큰 돌들이 어떻게 우리 밭 한가운데에 와 있는 것일까?’

고인돌이 군을 이루고 있는 전남 화순 같은 곳의 아이들이라면 한 번쯤 이런 의문을 떠올려 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옛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고려시대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다음날 금마군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이란 것을 구경하였다. 지석이란 것은 세속에서 전하기를 옛날 성인이 고여 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신기한 기술로 이상하다”

이와 같이 세월에 걸쳐 이 돌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그 호기심의 끝은 경이로움이었다. 함께 부비고 살아왔던 돌들이 고대인의 자취였으며 우리는 이 돌들을 바라보며 수천 년의 세월과 마주하고 있었다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고인돌은 많은 향토사학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고, 그 지방 아이들을 고인돌 학자로 성장하게 했다.

두 다리로 근엄하게 버티고 선 북방식 고인돌에서부터 묵직하게 내려앉은 키 작은 남방식 고인돌까지 한반도에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인돌만 무려 4만기가 넘는다.

이것은 전 세계 고인돌의 40%에 해당하는 양으로 과연 ‘고인돌 왕국’이라고 불릴 만하다. 우리의 선조 청동기인들은 어디서 그 큰 돌덩어리를 구해다가 사정없이 잡아당기는 중력을 극복해내고 이렇게 많은 고인돌들을 쌓아올린 것일까?

덮개돌 운반하기  

고인돌은 덮개돌을 구하고 운반하기 쉬운 바위나 암벽이 있는 산 근처에 있다.

아마도 청동기인들은 처음에는 주변 산에서 자연풍화현상으로 떨어져 나온 바위를 그대로 옮겨다 썼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한 관찰력 좋은 청동기인이 멋진 발견을 해내었다. 바위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면 암벽에서 돌을 떼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바위틈이나 암석의 결을 따라 인위적으로 작은 구멍을 낸다.

그리고 이 구멍에 물을 흘려 넣거나 마른 나무를 박아 넣고 물을 붓는다. 시간이 지나면, 돌이 조각이 되어 떨어진다!

 

즉 청동기인들은 물질의 팽창압을 이용했던 것이다. 기체-액체-고체로 갈수록 부피가 줄어드는 다른 물질들과 달리 물은 액체에서 고체로 상태변화를 할 때 부피가 오히려 늘어나는 특이한 물질이다.

그렇다면 암석의 결에 부은 물은 어떻게 될까? 물은 추운 겨울을 지나면서 얼음이 된다. 그리고 부피가 팽창한다. 이때 팽창하는 힘 즉 팽창압이 발생한다. 이것이 바윗돌을 떼어낼 만큼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그 청동기 시대에 돌에 대한 축적된 지식과 그것을 다루는 아이디어를 가진 전문가가 있었나 보다. 마치 오늘날의 석공과 같이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구를 반 바퀴쯤 돌아야 나타나는 이집트에서도 피라미드를 만들 때 사용한 돌을 이런 방법으로 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채석하는 방법은 현대에도 아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거제도 학산리 고인돌  

이제 떼어낸 덮개돌과 받침돌들을 운반할 차례다.

그런데 덮개돌의 무게는 대부분 5톤 이상이며 40톤까지도 나간다. 이것을 옮기려고 하니 청동기인들의 팔 근육이 단단하게 수축하고 그들의 이마에는 파랗게 핏줄이 선다. 그러나 비웃기라도 하듯이 돌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중력이 돌들을 아래로 잡아당기고 마찰력이 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뒤로 잡아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라면 중장비를 이용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러한 기계가 없던 시절, 청동기인들은 과연 이 난관을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청동기인들은 그들 나름의 포크레인과 트럭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각각 지레의 원리와 바퀴의 원리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가 있다면 지구라도 들어올려 보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이것은 일의 원리를 아는 자의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일의 원리는, 도구를 사용할 때와 사용하지 않을 때 일의 양은 일정하다는 원리이다. ‘도구를 사용할 때와 사용하지 않을 일의 양이 같다고? 그렇다면 도구를 사용할 이유가 없지 않나?’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다. 비록 일은 같지만 도구를 사용하면 인간은 힘의 측면에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은 ‘작용하는 힘’과 그 힘의 방향으로 ‘물체가 이동한 거리’의 곱으로 나타내어진다. 그렇다면 힘을 작게 작용하고 싶다면 물체를 이동시키는 거리를 길게 하면 그만이다. 지레는 힘을 작게 작용하기 위하여 이동거리를 길게 하도록 만든 도구이다.

즉 무거운 덮개돌에 지레와 받침대를 받치고 받침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인간이 힘을 가하면 제아무리 무거운 돌이라도 움직인다는 소리이다.

덮개돌을 운반하는 과정에서 지렛대가 해결해 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덮개돌을 멀리 끌고 갈 때에 지면과 돌 사이에 발생하는 마찰력을 극복하는 문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청동기인들은 어떤 재치를 발휘했을까?

 

전북 진안 여의곡 고인돌 주변에는 200m에 이르는 덮개돌 이동로로 추정되는 흔적이 조사되었다고 한다. 이는 너비가 150~200m의 간격을 두고 철도처럼 나란하게 열 지어 나타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길의 양단에 길이 3~4m, 깊이 10cm 내외의 흔적들이 여러 겹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학자들은 이를 지름 10cm 내외의 통나무를 3~4m로 자른 후 바닥에 레일처럼 깐 흔적이라고 추정한다. 즉 이것은 원시적 바퀴의 모습이다. 바닥에 깔린 통나무 위에 다시 그 위를 가로지르는 통나무를 여러 개 배치한 후 덮개돌을 올리고 끌어 운반한다.

자, 이제 돌도 마련했고 그 돌들을 고인돌 세울 장소까지 운반하였다. 이제 받침돌을 세우고 육중한 덮개돌을 그 위에 얹어 놓을 차례! 이 과정에는 어떤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있을까?

단 두 개의 날렵한 받침돌로 덮개돌을 지탱해야 하는 북방식 고인돌의 경우를 보자. 청동기인들은 땅에 구덩이를 판 후 거기에 받침돌을 박아 세웠다. 그러고 나서 구덩이의 남은 부분에 베개만한 돌들을 쐐기처럼 맞물리게 해 단단하게 고정시켰다. 훗날 덮개돌이 사라진다 하여도 받침돌은 꼿꼿하게 서 있을 것이다. 이는 무척 단단한 기초공사였다.

채석장의 흔적  

이제 힘센 장사라도 나타나서 덮개돌을 번쩍 들어 올려놓아 주었으면 하는 단계다. 여기서도 어느 똘똘한 청동기인이 나타났다. 그는 덮개돌의 수직이동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꿔놓았을 것이다.

 

물체를 사선으로 끌어올리는 빗면을 이용한 것이다. 빗면의 효과도 일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 빗면을 이용하면 물체를 수직으로 들어올리는 것보다 더 긴 거리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나 들이는 힘의 크기를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배고픈 청동기인들이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다. 그들은 빗면을 만들기 위하여 돌 사이와 주변을 언덕처럼 흙으로 메웠다. 그리고 그 빗면을 따라 덮개돌을 끌고 올라갔다. 영차, 영차, 덮개돌이 올라간다.

이제 남은 일은? 깨끗하게 흙을 치워 버리면 끝! 후대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구조물이 완성되었다.

이렇게 정말 정교하고 과학적인 작업을 통해 탄생한 고인돌. 물론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해서 인간 힘의 한계를 극복하였다고는 하지만 고인돌을 만드는 데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을까? 마침 이것을 가늠할 수 있는 실험이 전북 고창에서 행해졌다.

전북 고창의 실험은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의 일부인 덮개돌 운반하는 과정을 재현해 본 것이었다.

실험결과 덮개돌과 이동하는 길이 준비된 상태에서 9.8톤을 85명이 동원되어 4시간 동안 70m를 끌었다고 한다.

덮개돌의 무게가 대부분 5톤 이상에서 40톤까지도 나가며, 덮개돌을 채취하는 사람, 길을 만드는 사람, 통나무를 고이는 사람, 음식물을 제공하는 사람들까지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다.

「고인돌 이야기」의 저자 이영문 교수는 적게는 50여 명에서 많게는 300명 정도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고인돌 축조에 동원된 사람이 5인 기준 한 가족 당 1~2명이라고 할 때 많게는 1000명에서 1500명의 인구수를 가진 집단이어야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인력을 동원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게 할 강력한 지도자가 있었음을 암시하며, 생산 활동이 아닌 곳에 에너지를 쏟을 수 있을 만큼 잉여생산물도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마을 양쪽 산기슭에 줄지어 남아 있는 고인돌들. 옛날 사람들은 고인돌을 보며 힘이 센 장수들이 공기놀이를 하던 공기돌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청동기 시대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학유산답사를 통해 고인돌을 다시 바라보고 나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고인돌은 청동기인들이 보내온 긴 눈짓이라는 것 말이다. 조상들의 현명하고 깊은 눈짓을 통하여 우리는 이제 수천 년 전 청동기인의 생각과 과학과 문화를 읽어내고 있다.

 

 

*********************************<꿈꾸는 과학/ 오혜영>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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