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신라의 금귀걸이는 급조품`이 아니다

道雨 2008. 12. 22. 11:47

'신라의 금귀걸이는 급조품'이 아니다

 

 

 

 

 오늘자 연합뉴스에 의하면 '신라의 금귀걸이가 급조품'이라는 말로 신라유물에 대하여 폄훼하는 판단을 하는 것이 보인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라의 금귀걸이'도 흔히 우리가 자랑스럽게 보여주는 화려하고 큰 귀걸이가 아니라 단순한 작은 소형 금귀걸이 부장품을 마치 전체를 대표하는 최고의 신라 귀걸이인양 '신라의 금귀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도 문제다.

 

신라 귀걸이는 고분에서 나온 것으로 찬란한 신라문화의 상징의 하나로 정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고분 문화의 금장식의 반 이상이 신라의 고분 금장식들이라고 할 정도로 그 양에서도 세계 최고의 위치에 있다. 그런 신라 고분 유물을 평가하는 기사에서 단지 귀걸이의 각 쌍들이 무게에서나 함량에서 차이가 난다고 해서 단정적으로 '급조품'으로 평가절하하는 표현을 서슴치 않는 것은 무식의 소치라 하지 않을 수 없는 태도다.

 

단지 조그만 파편 조각 하나도 귀중한 문화재로 평가하는 세계 각국의 고고학적 평가와는 달리 어떻게 하여 신라의 귀중한 문화재에 대하여 '급조품'이라는 말을 쓰는가 말이다. 이번 연구로 각 쌍의 귀걸이가 차이가 남으로 죽은자가 쓰던 유품이 아니라는 부장품론에 힘이 실린다는 해석은 좋은 분석이다. 그러나 본인이 쓰지 않던 부장품이라면 꼭 특정 한 곳의 제조품으로 각쌍의 귀걸이가 만들어져 부장되었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분석은 분명 잘못되었다. 세 쌍의 귀걸이들은 각 쌍의 한쪽 귀걸이들마다 피장자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을 장례 참여 의식으로 죽은자를 애도하기 위하여 한쪽씩만 부장시켰을 수 있었다는 해석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진옥 연구원과 한국전통문화학교 강대일 교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제 태환이식(太環耳飾 굵은고리 귀걸이) 3쌍의 성분과 구조를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주진옥 연구원의 주장에 의하면 "한 쌍임에도 불구하고 제작기법이나 금속의 성분, 중량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점으로 미뤄볼 때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제 귀걸이는 제작기간에 쫓겨 만든 급조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고고학적 판단과 해석에서 일방적이고 무모한 해석을 내리는 것을 다시 볼 수 있다. 고분에 부장된 귀걸이 한 쌍이 전혀 똑같은 제작 방법을 통하여 만들어져야 된다는 기준은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그런 귀걸이가 양쪽 모두 같은 함량에 같은 방법으로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죽은 자를 위하여 부장품 제조 전문담당이 따로 있는 것처럼 오해한데서 비롯된다. 과연 죽은자들에 대한 부장품이 따로 만들어넣는 것만이 존재하는가?

 

부장품은 죽은 자에 대한 예우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각각 자신들이 사용하는 한쪽의 귀걸이를 부장품으로 넣어줌으로써 장례에 함께 자신도 참여한다는 의식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이별이나 사별의 경우 물품의 한쪽을 나눠서 하나는 가는 자에게 나머지 반은 남아 있는자가 나누어 갖는 풍습은 고대 인류학적 문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가는 자에게 자신의 분신을 나눠 함께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관습이다.

 

조선시대의 기생들이 사랑하는 연인과 이별하면서 '이빨'을 이별소품으로 받아가는 예는 차치하고라도 요즈음 인기 드라마 '주몽'에서도 보여주었듯이 주몽은 그의 아들과 부인을 이별하면서 그의 단검을 부러트려 그의 아들 유리에게 주어 나중에 자신을 찾는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장면은 문헌사료의 고증을 거쳐 나온 장면이다. 어린 아들이 가진 부러진 칼 끝은 아버지 주몽의 분신과 같은 것이며 언제나 아버지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동시에 단검의 자루부분은 아버지 주몽이 아들이 가진 칼끝의 부분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의식의 별리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신라 귀걸이를 요즈음처럼 단순한 장식으로만 해석해서도 안된다. 고대인류에게 귀는 소리를 듣는 특별한 예우를 했던 얼굴 기관이다. 짐승들의 귀가 큰 이유는 야생의 살벌한 정글법칙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대의 생존 기관이기 때문이며, 인간 또한 그 속에서 살아남았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배경과 함께 원시 인류 문화에서 소리는 이 세상과 저세상 심지어 신의 메시지도 '소리'로서 표현되어 소리는 문자보다 더 중요한 전달매체였다.

 

복음이라든지 '판소리'의 소리는 모두 고대사회의 종교적인 전달 매체의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렇기에 소리를 듣는 귀에 대하여서는 얼굴 중에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 귀에 귀걸이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죽은자나 신에게서 듣는 '안테나' 이미지를 가진 장식으로 받아들였을 수 있다.

 

귀걸이를 나눠 갖는다는 것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상징적 소통 이미지를 가지는 것이다. 귀걸이 한 쌍 중 한 쪽은 차안을 다른 한쪽은 피안을 상징한다는 것은 한 손바닥만 들어 인사하는 소림사 권법에서 이 세상을 다루는 한 손바닥과 기도하는 한 손바닥이 각각 다른 것과 같은 이치로 풀이해야 한다. 이러한 분신적인 나눔은 문화인류학적 인간의 의식에 포함된다. 마이클 조던이 남자로서 귀걸이를 한 이유와 또 한쪽 귀만 귀걸이를 한 이유를 묻자 귀걸이 한 쪽은 그쪽만큼 터프한 이미지를 주고 나머지 귀걸이를 하지 않은 하나는 젠틀한 이미지를 준다는 것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번 발표의 분석 대상이 된 황남대총의 귀걸이 세 쌍은 한 곳에서 귀걸이 한 쌍씩 만들어 세 쌍을 그대로 고분에 묻은 것이 아니라 도합 여섯 명의 살아 있는 사람들이 사용하던 귀걸이 중 한 쪽씩을 장례 참여의식으로 '함께 죽는다'는 심리적 순장의 의미로 부장시킨 것이다. 사자와 생자의 이별의 징표로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때 증거로 삼고자 하는 심리에서 자신이 평소에 차고 있던 귀걸이 중 한 쪽을 피장자 옆에 고이 함께 묻히게 한 것에서 각 귀걸이의 내용이 차이가 비롯된 것으로 나는 해석한다. 

 

신라 황남대총의 대표적인 금귀걸이는 이번에 분석된 작은 것들이 대표적인 것이 아니라 다음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하고 큰 귀걸이이다. 이런 훌륭한 황남대총 귀걸이를 위의 작은 귀걸이로 대표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 경주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진짜 대표적인 '신라 금귀걸이'의 하나

              신라 금귀걸이를 '급조품' 정도로 폄하할 수 없는 압도되는 예술품이다.

 

그런데도 과연 아무런 근거도 없이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세 쌍의 귀걸이가 각각 그 쌍의 내용의 성분이나 무게가 다르다고 해서 '급조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단순히 '급조'라는 논리로 보더라도 무게라든지 내용물을 다르게 그렇게 급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급조일수록 방법이 비슷하고 무게도 비슷해야 하는데 너무 큰 차이가 나는게 아닌가. 크게 차이나는 양쪽 귀걸이의 함량이나 함유물로 나타나는 것은 그 한쪽 각각의 만든 곳이 각각 다른 곳에서 연유하고 있다는 판단은 왜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금과 은을 합금하는 과정이나 판을 잇대는 과정 등 어느 하나도 '급조'일 수 없는 귀중한 문화적 예술 과정을 거쳐 나온 것이 신라인들의 금귀걸이이다. 더더욱 죽은자에 대한 조의의 참여정신의 더욱 아름다운 의미가 고분들에 부장된 금귀걸이들에 남아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서 새로운 사실에 대하여 지나치게 흥분되기에 앞서 그 발표에는 신중함을 가지고 비교문화사적 경험과 토론 과정을 거쳐 검토된 연후에 발표를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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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귀걸이 알고보니 부장용 급조품? [연합] 2007.02.15 14:57 입력 
 
전세계에서 출토된 금장신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신라의 금장신구들.

그러나 화려한 명성에 비해 신라 금장신구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는 미흡한 실정이다. 특히 그 용도를 두고 평상시 착장용이라는 주장과 부장용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부장용임을 주장하는 쪽은 금관의 경우 지지대가 없으면 무너질 정도로 구조가 튼튼하지 못하고 4㎏이 넘는 금 허리띠나 스파이크가 달린 금동신발 역시 일상적으로 착용하기에는 무리라고 지적한다.

반면 평상시 착장용임을 주장하는 쪽은 조선 왕실의 여인들은 장신구까지 더하면 10㎏ 이상 나가는 가채를 일상적으로 착용했다며 최소한 의전 행사에 잠시 착용하는 정도로는 큰 무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상반된 주장이 맞서고 있는 가운데 신라 금귀걸이의 성분과 구조를 분석한 결과 제작기간에 쫓겨 급조한 제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진옥 연구원과 한국전통문화학교 강대일 교수는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제 태환이식(太環耳飾 굵은고리 귀걸이) 3쌍의 성분과 구조를 분석한 논문을 최근 발간된 보존과학연구 27호(국립문화재연구소 펴냄)에 실었다.

연구결과 3쌍의 귀걸이 가운데 1쌍의 경우 한 쪽은 금 88%과 은 11.5%가 섞인 금ㆍ은 합금인 반면 다른 한 쪽은 99.5%의 순은에 금도금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한 쌍의 귀걸이도 금과 은의 함유 비율이 각각 80.95% 대 18.59%와 87.2% 대 12.2%로 서로 다르게 나타났으며 제작방식에 있어서도 한 쪽은 1개의 통판으로 만든 반면 다른 한 쪽은 2개의 판으로 반구형 고리를 만들어 접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통판으로 만든 쪽은 중량이 3.96g이었으나 2개의 판으로 제작한 쪽은 5.96g으로 통판으로 제작한 귀걸이보다 1.5배 가까이 무거웠다.

나머지 한 쌍의 귀걸이는 두 쪽의 성분이 동일했으나 금의 비율이 66.4%에 불과해 다른 2쌍의 귀걸이 보다 붉은 색을 띠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주 연구원은 "한 쌍임에도 불구하고 제작기법이나 금속의 성분, 중량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점으로 미뤄볼 때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금제 귀걸이는 제작기간에 쫓겨 만든 급조품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즉, 무덤의 주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장례기간 내에 부장품을 마련하다보니 제작을 서두르게 됐다는 해석이다.

주 연구원은 한 걸음 더 나가 제작방식이나 성분이 제각각인 점을 들어 3쌍의 금귀걸이는 각 부분이 따로 제작된 뒤 유사시(사망시) 결합된 일종의 조립품이라는 추측도 내놨다.

주 연구원은 "유물에 상처를 낼 수 없기 때문에 신라 금장신구에 대한 연구는 육안분석이 대부분이었다"며 "첨단 과학기기를 이용해 비파괴 분석을 시도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밝혔다.

황남대총 금귀걸이들이 장례기간에 맞춰 급조된 것이라는 연구 결과는 신라 금장신구들이 부장용으로 제작됐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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