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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에서 백제 사리장엄(舍利莊嚴) 발견

道雨 2009. 2. 17. 11:13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에서 백제 사리장엄(舍利莊嚴) 발견

- 금제사리호와 사리봉안기 등 중요유물 500여점 수습-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 보수정비를 위한 해체조사 과정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조성한 사리장엄을 발견하였다. 지난 1월 14일 1층 심주(心柱) 상면(上面)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금제사리호(金製舍利壺)와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 은제관식(銀製冠飾) 등 유물 500여점을 수습하였는데 이를 오는 1월 19일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공개할 예정이다.


  금제사리호는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다.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을 덮었는데 X선으로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內外函)의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을 확인하였다. 사리호 표면의 다양한 문양과 세공기법(細工技法)은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金板)에 음각(陰刻)하고 주칠(朱漆)하여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였다.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喜捨)하여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년)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文獻史)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금석문(金石文) 자료인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書體)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평가되는 유물이다.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가 일괄로 출토되었고 가공수법도 정교하고 세련되어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 

  

 이번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되었고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되었으며, 매납(埋納)된 유물의 절대연대 확정을 통해 동시기 유물의 편년(編年)이 가능해졌다. 이번 조사는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로 판단된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문화 연구는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향후 수습된 유물을 보존처리한 후, 심층조사하고 그 결과를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연구자와 일반인에게 공개할 계획이다.

 

 

               * 심주해체광경

 

 

                              * 사리장엄 출토상태

 

 

                                      * 금제 사리호 

 

 

                     * 금제 사리봉안기 

 

 

                     * 은제 관식 및 금제소형판 등 유물

 

 

 


 



** 금제 사리봉안기의 원문 해석

 

가만히 생각하건데, 法王(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시고, (중생들의) 바람에 맞추어 몸을 드러내심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석가모니께서는) 왕궁(王宮)에 태어나셔서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3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다. (그러니) 마침내 오색(五色)으로 빛나는 사리(舍利)를 7번 요잡(遶迊,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함)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 할 것이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沙乇(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만민(萬民)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공양하고 영원토록 다함이 없어서 이 선근(善根)을 자량(資糧)으로 하여 대왕폐하(大王陛下)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여, 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교화하게 하소서.


또 원하옵나니, 왕후(王后)의 신심(身心)은 수경(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항상 밝히시며, 금강 같은 몸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不滅)하시어 칠세(七世)의 구원(久遠)까지도 함께 복리(福利)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 함께 불도 이루게 하소서.


번역 : 김상현(동국대학교 교수)

 

 

 

 

 

*** 다음의 글은 금제사리봉안기의 해석에 관한 또 다른 주장입니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2003년 12월 15일부터 300일에 걸쳐 발굴조사한 결과에 의하면,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시대 왕궁 형태의 궁성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즉 백제는 궁성을 창건하기 위한 건물지를 축조하고 기반을 다진 석축과 계단 역할을 하는 월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자리한 후원, 뒷간이 있었던 자리가 세세하게 드러났다.

익산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은 백제 제30대 무왕(武王, A.D. 600-641)대에 조성된 궁성 유적으로, 남북 길이 490여 m, 동서 너비 240여 m에 이르는 장방형 궁궐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연차 발굴 조사를 진행, 백제시대의 궁궐 담장(宮墻) 및 축대(石築), 대형 화장실, 정원(庭園), 와적기단(瓦積基壇) 건물지, 공방지(工房址) 등 궁성 관련 유구와 또, 왕궁사(王宮寺),및 대관관사(大官官寺) 명(銘) 명문와(銘文瓦), 수부(首府)명 인장와, 연화문와당, 금제 영락(瓔珞), 유리 구슬, 뒤처리용 나무 막대, 각종 토기 및 중국제 청자편 등 모두 3천 여점의 중요 유물이 출토됐다.

1. 일본왕이 백제 법왕(法王)에게 은밀이 보낸 지모밀지(枳慕蜜地)에 따라 익산에 왕궁사(王宮寺)가 창건되었다.

1965년, 부여문화재연구소가 왕궁리 오층석탑 해체 수리 때 발견된 사리함과 1971년,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와 비문 내용이 꼭 같았다. 일본에서 발견된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에 따르면, 정관 13년(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벼락이 떨어져 제석정사에 불이 났다" 또 ‘지모밀지(枳慕蜜地)’에 천도(遷都)하라’ 는 대목이 나온다. 즉 지모밀지란 무엇인가? 백제가 멸망에 이를 징조가 있자 일본의 백제왕이 대륙 백제왕에게 은밀이 보낸 밀지(密旨)를 뜻한다.

곧 익산 왕궁리 왕궁터는 [일본의 백제왕]이 대륙 백제의 법왕에게 보낸 ‘지모밀지(枳慕蜜地)’에 따라서 무왕이 도읍지로 정하려 했던 백제 왕궁 예정지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코 백제는 한반도 속의 익산에 왕도로 옮기지 못하고 멸망에 이른다. 익산 왕궁리의 왕궁터에서 뱔견된 왕궁사(王宮寺),및 대관관사(大官官寺)의 명문(銘文)과 같이 전북 금마면 익산의 미륵사(彌勒寺)가 아니고 왕궁사(王宮寺) 및 대관관사(大官官寺’가 틀림없다. 그리고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 주변에서 금당지, 강당지 등 통일신라시대 사찰 유구가 확인된 바 있다.

지모밀지(枳慕蜜地)는 [일본의 백제왕]이 대륙 백제의 제29대 법왕에게 보낸 밀지(密旨)라 사료된다.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은 법왕의 아들이며, 이름은 장(璋:扶餘璋(부여장)이며,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며, 도량이 크고 재주가 뛰어났다. 즉 일본 백제왕이 대륙 백제 법왕(法王)에게 보낸 지모밀지(枳慕蜜地)에서 신라의 帝釋宮(제석궁)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났으니 혼란한 틈을 이용하라, 서동(薯童)은 인물이 준수하고, 지기(志氣)가 영특하니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변장해서 신라의 경도로 들어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善花) 공주와 은밀이 정을 통하여 진평왕의 사위가 되어 신라 영토를 장악하라. 는 지모밀지(枳慕蜜地)라 사료된다.

2. 백제 무왕은 신라 진평왕의 사위이며, 백제 왕후는 신라 선덕여왕과 형제간이 된다.

[삼국유사 무왕(武王)] 고본(古本)에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으나 잘못이다. 백제에는 무강武康이 없다.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扶餘璋(부여장)이다. 그 어머니는 과부(寡婦)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던 것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薯童)이며,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薯여]를 캐다가 파는 것으로 생업(生業)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이름을 서동이라고 불렀다.

서동(薯童)은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선화善化)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경도(서울)로 가서 마을 아이들에게 마를 주어 먹이니 곧 아이들과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동요를 부르게 하였다. 그 동요의 가사는 이러하다.

선화공주(善化公主)는 서동(薯童)과 정을 통하고 밤에는 남몰래 서동방(薯童房)에 찾아가 깨안고 잠자네...

동요(童謠)가 신라 서울에 가득 퍼져서 신라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해서 선화공주를 먼 곳(한반도 속의 익산)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선화공주는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진평왕의 왕후(王后)는 순금(純金)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선화공주가 장차 귀양지(익산)에 도착하려는데 도중에 백제의 서동(무왕)이 나와 공주에게 공손히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선화공주는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저 인연으로 믿고 좋아하니 서동을 따라가면서 공주는 비밀히 정을 통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가 맞는 것도 알았다. 함께 한반도 속의 익산으로 와서 모후(母后)가 준 금을 꺼내 놓고 살아 나갈 계획을 의논하자 서동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무엇이오?" 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황금이요 이금을 가지면 백 년의 부를 누릴 것입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마를 캐던 곳에 황금을 흙덩이처럼 쌓아 두었소"

공주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말했다. "그 금은 천하의 가장 큰 보배이니 그대는 지금 그 금이
있는 곳을 아시면 우리 부모님이 계신 대궐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좋소이다" 이에 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師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이 금을 실어 보낼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말하기를 "내가 신통(神通)한 힘으로 보낼 터이니 금을 이리로 가져오시오" 이리하여 공주가 부모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사자사(師子寺) 앞에 금을 갖다 놓았다.

지명법사의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그 금을 신라 궁중으로 보내자 신라 진평왕(眞平王)은 그 신비스러운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서동을 존경해서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서 드디어 백제 왕위에 올랐다.

어느 날 무왕(서동)이 부인과 함께 신라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 밑 큰 못 가에 이르자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무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은 부인의 말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상(像)을 만들고 전각(殿閣)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 삼국사기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 했다. 신라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그 역사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이 분을 법왕(法王)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백제왕후는 대륙 백제가 멸망의 징후가 나타나자 한반도 속의 익산에 왕흥사를 창건하여 불도의 위신력으로 나라를 영구히 보전하고자 사리와 함께 친필 사리봉안기를 넣었다. 무왕은 41년 재위기간 동안 신라 영토를 빼앗기 위해 빈번히 신라를 침략하였다. 서기 630년 사비궁(宮:중국 사천성)을 중수(重修)하고 634년에는 왕궁남쪽에 인공 섬을 만들었다.

또 무왕은 재위 후반기에 현재 한반도 속의 익산지역에 도읍지로 옮기기 위해 총면적 1338만4699㎡(약 404만8870평)에 이르는 거대한 왕궁평성(王宮坪城)을 건설하고 왕궁사(王宮寺: 현 미륵사)를 창건했던 것이다.

 

한반도 땅은 본래 신라의 영토이다.

근세에 충남 부여의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사리기(舍利器), 전북 익산 왕궁리유적 등이 발굴되자 조국을 배신했던 민족 반역자 이병도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마치 초기의 백제가 한반도 속에서 건국되었던 것처럼 입증하려고 잇따라 발표하고 있다.

한반도 땅은 본래 신라의 영토이었으나 4세기 중반 이후부터 백제의 영토가 된다. 근세에 발굴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와 충남 부여의 백제 왕흥사 터에서 발굴된 사리기(舍利器), 전북 익산 왕궁리 유적 등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기 668년 신라의 문무왕이 3국을 통일한 후 한반도는 다시 신라의 영토가 된다.

1979년 2월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서 발견된 국내 유일한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본서 227페이지참조)에서 고구려와 신라는 형제국(여형여제'(如兄如弟)으로서 신라 영토내(新羅土內)의 각성에 가득 찬 왜병을 광개토대왕과 관병이 도착하자 왜병이 황급히 달아나는 왜적 등 뒤까지 바짝 추격하여 일본의 任那加羅(임나가라)까지 쫓아가 城(성)을 拔本(발본) 索出(색출)하여 즉시 항복시키었다.

長壽弘濟好太烈帝(장수홍제호열제)는 연호를 建興(건흥)이라하고 仁義(인의)로서 나라를 다스려 먼 곳까지 개척하여 강역은 점점 넓어져 熊津江(웅진강) 북쪽은 고구려에 소속시켜 굳게 지켰다. 신유(辛酉 421년)은 장수왕 9년이며, 신라의 눌지왕 5년이다. 따라서 '중원고구려비'는 신라 영토내의 각성에 가득 찬 왜적을 물리쳐 주신 광개토대왕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장수왕 9년 신유(辛酉 421)년에 신라 눌지왕(訥祗王)이 광개토호태왕의 은공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비석이었다.

백제왕후는 한반도 속의 전북 익산에 왕궁사(王宮寺)를 건립하고, 금제사리봉안(金制舍利奉安)하여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유구한 역사의 7세기(700년) 전통의 백제가 영원히 계승 할 수 있도록 기원하며, 간절한 발원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700년을 넘기지 못하고 결국 663년에 멸망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