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를 미국에서 발굴

道雨 2009. 3. 19. 12:04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 발굴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사용한 국새의 손잡이 부분인 거북이형 손잡이.

이 국새는 전체 높이 4.8cm에 무게는 794g이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려있다

 

  

 

고종황제 국새를 구입한 직후 지금까지 약 3개월에 걸친 관련 기록 검토와 유물 분석 등의 과정을 거쳐

이 유물이 바로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한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분실된 고종황제의 국새임을 확인했다고 17일 밝혔다

 

 

 

 

지금까지 단 한 점도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고 보고된 조선왕조 임금의 친서(親書)에 사용한 실무용 국새(國璽)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국립고궁박물관(관장 정종수)은 17일 오전 이건무 문화재청장이 참석한 가운데 박물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12월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한 현존하는 유일한 대한제국시대 국새를 재미교포로부터 구입했다고 발표했다.

 

박물관은 이 국새를 구입한 직후 지금까지 약 3개월에 걸쳐 관련 기록을 검토하고 분석한 결과, 이 유물이 바로 식민지시대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사라진 고종황제의 국새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국새는 외함은 분실되고 보통(寶筒)이라 일컫는 내함과 함께 입수됐다. 국새는 전체 높이 4.8cm에 무게는 794g이었다. 손잡이는 거북 모양이며 비단실로 짠 끈이 달렸다. 정사각형 인장면(도장을 찍는 면)에는 '황제어새'(皇帝御璽)라는 글자를 양각(陽刻.돋을새김)했다.

이들 글자 중 '皇'자는 '白'에 해당하는 부분을 '自'로 썼으며, 이는 "대한제국기 고종시대에 사용된 다른 국새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박물관 측은 덧붙였다.

내함은 황동(黃銅)으로 3단으로 만들어 하단에는 인주(印朱)를 넣을 수 있게 했으며, 그 윗단에 국새를 넣었다. 나아가 뚜껑은 네 면을 경사지게 꺾어 마무리했다.

하단과 뚜껑 내부는 붉은 비단을 직접 접착해 마무리했으나 국새가 들어가는 상단은 두께 0.5cm의 소나무로 내곽을 만든 뒤 붉은 천을 붙여 마감했다.

고궁박물관이 국새 성분을 비파괴 분석한 결과 은(銀)과 금(金) 비율이 거북형 손잡이는 81:18인 반면, 몸체는 57:41로 나타나 손잡이와 몸체를 따로 제작해 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박물관 측은 "고종이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프랑스 황제에게 보낸 10여 통의 편지에서 사용한 황제어새로는 두 종류가 확인됐지만 이에 사용한 도장 실물은 사라진 것으로 간주됐으며, 그 중 1점이 유리원판 사진으로만 남아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었다"면서 "이 국새가 바로 유리원판 사진으로 남은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확인한 국새는 "그 제작기록이 보이진 않지만 '문화각(文華閣)의 옥새와 책문(冊文) 등을 보수하도록 하다'라는 고종실록(광무 5년 11월 16일)의 기록 등으로 미뤄 1901-1903년 무렵에 제작됐으며, 1903년 이탈리아 황제에게 보낸 친서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박물관 측은 설명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이 국새가 가짜일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검토한 결과 도저히 그럴 가능성은 없다는 확신에 도달했다"고 말했으며, 정종수 고궁박물관장 또한 "이것이 가짜라면 이를 만든 사람은 인간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말로 자신감을 표출했다.

500년간 지속된 조선왕조에는 모두 27명에 이르는 임금이 있었으며 이들 임금은 이번 고종황제의 국새처럼 실무용 도장을 무수히 제작해 친서 등에 사용했을 테지만 그런 실물은 남아있지 않다.

다만, 일제 강점 직후 조선총독부가 압수한 고종황제의 국새류 중 제고지보(制誥之寶)와 대원수보(大元帥寶), 그리고 칙명지보(勅命之寶) 등 3점이 일본으로 유출됐다가 해방 이후에 반환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을 뿐이다.

이들 국새류는 명칭으로 보아 황제가 국내의 신민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군대를 통수할 때 사용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것을 실제 사용한 사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고궁박물관을 비롯한 국내외 일부 기관 등이 소장한 '임금 도장'은 대부분 어보(御寶)라 해서, 그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일 뿐이며, 왕이 생전에 실제로 사용한 국새는 아니다.

이런 중요성을 고려해 고궁박물관은 이 국새에 대한 국보 지정절차를 밟기로 했으며, 그와 동시에 일반공개도 하겠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09.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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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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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의 역사를 소급해 올라가면 ‘삼국유사’에까지 도달한다. ‘삼국유사’ 첫 장에 우리나라의 최초 고대국가는 ‘하늘로부터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아 국가를 열었다’는 대목이 보인다.

 ‘천부인’이라고 하는 도장은 하늘의 뜻과 권위를 상징한다. 천부인을 받았다는 것은 하늘의 결재를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조선조의 역대 왕들이 사용하였던 도장인 옥새도 바로 이러한 맥락의 권위를 상징한다. 왕이 지닌 권위를 가장 작은 조형물로 압축한 것이 옥새이다. 그래서 왕이 바뀔 때마다 옥새를 확보하는 일이 관건이었다.

인조반정 때 혁명군이 거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손을 썼던 일이 광해군으로부터 옥새를 돌려받는 일이었다. 왕이 사망하였을 때는 부인인 대비가 옥새를 보존하고 있다가, 세자가 왕으로 즉위할 때 옥새를 전해 주었다. 조선시대에 새로운 왕이 즉위할 때 가장 중요한 의례가 바로 옥새를 인수인계하는 부분이었다.

 

조선왕조 옥새의 시작은 정도전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이때부터 옥새를 제조하는 비방을 적어 놓은 ‘영새(榮璽)부’라고 하는 장부가 전해져 왔었는데 중간에 오면서 옥새를 위조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나라에서 특별히 지정하는 옥새전각장 1인에게만 그 내용이 비전으로 전해져 왔다.

그 영새부를 이어받은 마지막 옥새전각장이 민홍규(51)이다.

영새부의 제일 첫 구절은 ‘새인용처지천태(璽印用處地天泰)’라는 내용이다. ‘지천태’는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밑에 있으니 평화롭다는 의미를 지닌 주역의 괘 이름이다. ‘옥새는 지천태의 평화를 위해서 사용한다’는 의미가 도출된다. 옥새의 제작과정에는 동양사상의 3대 축인 천시(天時)·지리(地理)·인사(人事)의 삼재(三才) 사상이 농축되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만큼 옥새 제작은 인격 수양과 철학이 요구되는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민홍규에 의하면 옥새를 배우는 데 고전공부 4년, 서예공부 4년, 전각학습 4년을 합해서 총 12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한다. 그는 36년 동안 옥새 만들다가 폐와 신장까지 잃었다. 현재 한·중·일 3국 중에서 옥새 제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민홍규 한 사람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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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대 국새 '태극익룡 1호 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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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대 국새, '거북 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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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3대 국새, '봉황 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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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의 안쪽 깊숙히까지 균열이 생겼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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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국새 '봉황 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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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새와 어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국새는 실무용, 어보는 의례용


 


임금의 도장은 보통 국새 혹은 어보(御寶)라 칭한다. 이번에 국립고궁박물관이 확보한 고종황제의 도장은 어보가 아닌 국새다.

국새는 실무용, 어보는 의례용이라는 차이를 갖고있다.
국립고궁박물관이 확보한 고종황제의 국새도 이탈리아 황제 등에게 보낸 서찰 등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의 임금들이 문서에 도장을 찍는데 사용했기 때문에 국새의 활용도는 매우 높았다. 옥새(玉璽), 국인(國印), 새보(璽寶), 대보(大寶), 어새(御璽) 등 다양한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 '상서원'이라는 관청에서 보관했다.

국새는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왕위 계승 또는 국가 권력 이양의 징표로서 사용됐다. 도장에는 성격에 따라 '조선왕보'(朝鮮王寶), '대한국새'(大韓國璽), '황제어새'(皇帝御璽), '시명지보'(施命之寶), '제고지보'((制誥之寶), '대원수보'(大元帥寶)라는 글씨를 새겼다.

손잡이의 형태는 거북이나 용모양이고, 조각기법이 섬세하고 정교하다. 금과 은의 성분은 41:57. 무게는 실무용이기 때문에 높이 4.6㎝, 무게 794g이었다.

반면 어보는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안치하기 위해 제작한 '의례용'이기 때문에 왕이 생전에 사용한 도장은 아니다.

의례용으로만 사용됐기 때문에 별다른 별칭도 없으며 상서원이 아닌 종묘 신실에 보관됐다. 또한 왕실의 영원한 대를 이어간다는 영속성을 담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도장에는 왕이나 왕비의 존호(尊號), 시호(諡號), 휘호(徽號) 등을 새겼다.

손잡이의 형태는 용이나 거북을 사용했으며 실제로 왕이 사용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높이는 9.6㎝, 무게도 4㎏에 달할 정도로 매우 컸다. 주요성분은 금 대신 구리와 은을 54:23으로 혼합했다. 국새에 비해 크기가 커 조각선이 굵고 덜 정교하다.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이번에 발견된 국새는 주로 고종황제가 친서에 사용했다는 점에서 어보가 아닌 국새"라며 "국새는 공문서에 사용할 때 '대한국새' 혹은 '황제지보' 등으로 불리웠고, 친서에 사용할 때는 '황제어새'라는 명칭으로 사용되는 등 사용처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어보는 어보로만 불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번에 발견된 국새에 '황제어새'라는 글씨가 새겨진 점으로 미뤄 비밀리에 제작돼 고종황제가 직접 소지하고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원래 국새는 상서원에서 관리하는 것이 상례이나, 황제가 이 국새를 직접 소지하고 관리한 점은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이나 긴장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서울=연합뉴스/ 송광호 기자  2009.3.17>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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