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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경희궁 흥화문, 이토오 히로부미 추모사당으로 뜯겨

道雨 2009. 3. 19. 11:57

 

경희궁 흥화문, 이토오 히로부미 추모사당으로 뜯겨

 

경희궁, 끝나지 않은 영욕의 역사

 

이토 히로부미 호 딴 '경춘문'

경희궁 흥화문(興化門)은 '비운의 문'으로 불린다.

1932년 조선총독부는 지금의 장충단공원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인 '박문사(博文祠)'를 지으면서

흥화문을 옮겨와 사당의 정문으로 사용했다.

흥화문뿐 아니라 여러 문화재의 건축자재들이 박문사 건립에 동원됐다

 

 


일제, 궁궐 헐고 ‘통감부중학교’ 건립 … 흥화문은 이등박문 추모사당 정문으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한국건축사에 등장할만큼 중요한 건축물이다. 흥화문에서 보이는 살미(공포의 세로부재)첨차(공포의 가로부재)의 일체화나 초각을 새긴 운궁 등은 같은 시기 일본이나 중국의 다포 계통(공포가 많은 양식) 건축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형식이다.

건축학자들은 이같은 양식은 오히려 고려말이나 조선초에서 나타난다며 이를 ‘16세기 이후 다포형식에 우리나라의 토착적인 주심포 기법이 가미된 것’으로 해석한다. 중국 원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다포 계통의 건축이 이때 와서 비로소 조선의 고유한 형식으로 새로운 방향을 잡았다는 것이다.

경희궁 흥화문으로 대표되는 이같은 형식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창경궁 명정전(1616)이나 창녕 관룡사 대웅전(1618) 등에서도 널리 확인된다.

이런 중요한 건축물이지만 흥화문은 원래의 자리와 좌향을 잃어버렸다. 그나마 좌우 담장은 물론 궁궐 문의 위용을 돋보이게 하던 월대(月臺)도 없이 덜렁 문만 복원되어 있다. 한 나라의 궁궐 정문이 왜 이런 굴욕을 당하고 있을까.

1988년까지 신라호텔 정문 노릇

순종(純宗) 3년(1909년) 일제 통감부는 경희궁을 헐고 그 자리에 통감부중학교를 지었다.

통감부중학교는 일본인 자제와 조선인 자제에게 신교육을 실시한다는 명분을 달고 있었지만 내용적으로는 ‘일본인 거류민단립중학교’였다. 일제강점 이후 통감부중학교는 ‘총독부중학교’를 거쳐 ‘경성중·고등학교’, 즉 서울중·고등학교의 전신이 된다.

이후 숭정전 희상전 흥정당 흥화문과 회랑만 잡초더미 속에 묻혀 있었는데, 1926년에는 그나마 숭정전과 희상전이 조계사(曺溪寺 : 현 동국대학교)에 옮겨졌고 흥정당은 1928년 장충동 2가 광운사(光雲寺)로 옮겨가 정문인 흥화문만 덩그러니 남게 됐다.

1932년 일제는 남산 동쪽자락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을 지으면서 흥화문을 뜯어다 정문으로 세웠다. 남의 나라 궁궐 정문을 뜯어다가 제국주의 침략의 화신을 기리는 절의 정문으로 세운 참담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광복 이후다.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흥화문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박문사가 외국사절들을 접대하는 영빈관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영빈관 자리에는 나중에 신라호텔이 들어섰다. 1988년까지 흥화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신라호텔 정문 노릇을 해야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건축학자들의 건의가 이어졌다. 외국사람들이 신라호텔에 와서 ‘왜 이런 기와집이 현대식 호텔 앞에 서 있느냐’라고 묻기라도 한다면 나라망신이라는 호소였다.

제자리를 잃어버린 흥화문

1988년 흥화문은 경희궁으로 돌아왔지만 제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흥화문이 서 있던 자리에 이미 다른 빌딩(현 구세군회관)이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흥화문은 제자리가 아닌 궁의 남서쪽 모퉁이에 남향으로 아주 어색하게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다.

황평우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장은 “경희궁 복원계획을 제대로 세우려면 흥화문의 위치부터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며 “현 서울역사박물관 앞으로 옮기는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희궁 일대 건축물 발굴조사를 진행했던 명지대 건축학부 김홍식 교수는 “서울시는 1994년 서울정도 600주년 기념관으로 임시 건축했던 건물도 철거하지 않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프라다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경희궁 유구 위에 대형 철골건축물까지 허가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조치”라고 비판했다.

광해군 때 건립한 이궁

일제 때 본격적인 수난

영조는 치세 기간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내

경희궁은 서울의 우백호인 인왕산 자락에 기대어 자리잡았다. 산줄기로는 백두대간 철령에서 대성산―백운산―운악산―도봉산―북한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한 지맥이요, 더 자세히 보면 북한산 보현봉에서 형제봉을 거쳐 북악산―인왕산―남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바로 안쪽이다.

이 산줄기는 서대문―남대문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이 축선을 따라가면 사직단과 경희궁, 덕수궁이 차례로 자리잡고 있어 옛 선조들의 풍수지리 개념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은 도로와 온갖 건축물로 제각기 단절된 생태섬이 돼 버렸지만, 원래 인왕산과 사직단, 경희궁, 덕수궁은 거대한 녹지대로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봄마다 늦은 저녁이면 경희궁 뒤편 숲에는 천연기념물 324호 소쩍새가 날아와 선명한 울음을 토해낸다.

경희궁은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1608~1623) 때 지어졌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궁궐을 새로 짓는 일을 주도한 인물이다.

그는 점점 노골화되어가는 사대부들 간의 권력다툼 속에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과정에서 풍수가들의 말에 따라 도성 안에 새로 2곳의 궁궐을 지었다.

창경궁 중건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때(1616) 광해군은 인왕산 아래 사직단 뒤편에 새로운 궁궐인 인경궁(仁慶宮)을 지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정비되기는 했어도 이궁(離宮)으로 궁궐이 하나 더 필요했으므로 이 공사는 어느 정도 인정할 만한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경궁 공사를 하면서 또 다시 돈의문(서대문) 안 색문동(塞門洞)에 경덕궁(慶德宮)이란 이름의 새 궁궐을 지었으니, 순전히 그곳에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풍수가들의 말에 따른 결정이었다.

그곳에는 원래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원군(定遠君)의 집이 있었다. 정원군의 아들이 뒤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니 풍수가들의 말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당시 글자 뜻이 좋다는 인왕산을 끼고 지어진 2곳의 궁궐 가운데 인경궁은 광해군이 왕위에서 쫓겨나면서 빈 궁궐이 되었고, 부자재는 인조 때 창덕궁과 창경궁을 수리하는 데 써서 흔적이 사라졌다.

경덕궁은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일부 전해지고 있다. 경희궁은 조선후기 270년 동안 경복궁 대신 정궁으로 쓰인 동궐(창덕궁)에 대해 ‘서궐’(西闕)로 불렸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했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러나 고종 연간에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경복궁이 법궁이 되고 동궐(창덕궁)이 이궁이 되었고, 그 결과 경희궁은 왕이 살지 않는 빈 궁궐이 되었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던 경희궁은 일제 침략 이후 본격적인 수난을 당하게 된다.

글·사진 남준기 기자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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