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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석가탑 무구정경은 다보탑서 나왔다

道雨 2009. 4. 8. 11:09

 

석가탑 무구정경은 다보탑서 나왔다

박상국씨 "틀림없는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을 해체할 때 수습한 묵서지편(墨書紙編)이라는 이름의 고문서 뭉치가 해독된 것은 최근이다. 이 묵서지편에는 2종류의 석탑 중수기(重修記)가 포함된 것으로 드러났다

 

문서 자체에 기록된 내용을 기준으로 구별하면 하나는 '태평(太平) 4년(1024) 불국사 무구정광탑(無垢淨光塔) 중수기'이며 다른 하나는 '태평 18년(1038) 불국사 서석탑(西石塔) 중수기'다. 이 중 서석탑이 석가탑을 지칭하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다보탑에 비해 서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무구정광탑. 같은 중수기인데 탑 명칭을 달리 표기할 까닭이 없으며, 나아가 무구정광탑 중수기에 기록된 탑에 관한 기술이 다보탑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 무구정광탑 중수기는 출토된 곳이 석가탑이긴 하지만, 실제는 다보탑 중수기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금까지 이런 주장을 반대하던 문화재위원인 불교서지학 전공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지난 1년간 중수기를 세밀히 분석한 결과 "2종류의 중수기가 동일한 탑(석가탑)의 중수기임을 입증하기에는 역부족임을 느낀다"고 7일 말했다.

따라서 두 중수기 중 1024년에 작성한 무구정광탑 중수기는 '다보탑 중수기'로 봐야 한다면서 "그러므로 묵서지편에 포함된 두 중수기는 불국사 쌍탑, 즉, 다보탑과 석가탑의 중수기"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박 원장은 "두 중수기 모두 다보탑과 석가탑의 창건이 신라 경덕왕 원년(740)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이를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면서 "이 창건시점은 현존 세계 최고목판 인쇄물로 평가되는 석가탑 출토 무구정광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의 제작 연대를 해명하는 데도 결정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들 중수기가 공개된 직후 무구정경은 심대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 중수기에 무구정경을 중수 때 봉안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세계 최고 목판인쇄물이라는 무구정경은 다보탑, 혹은 석가탑이 중수된 11세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하지만 박 원장은 무구정경이란 표현이 두 중수기 중에서도 유독 1024년에 작성된 무구정광탑(다보탑) 중수기에만 2종류가 보이며, 1038년에 쓴 서석탑(석가탑) 중수기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선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원인을 박 원장은 "경덕왕 시대에 다보탑과 석가탑을 동시에 창건할 때 다보탑에만 무구정경을 넣고 석가탑에는 넣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무구정광탑(다보탑) 중수기에 '무구정경 99편(偏)'(99라는 숫자는 '9'로 보기도 한다)과 '무구정경 1권(卷)'이라고 각각 표기된 무구정경이 다보탑 창건 당시에 넣은 공양품임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박 원장은 "무구정경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무구정광탑) 중수기 문맥을 보면, 이는 1024년에 다보탑을 중수할 때, 사리공 안에서 수습한 물품 목록에 포함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서 "따라서 중수기에서 말하는 무구정경이 석탑 창건기의 봉안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한데 다보탑 창건 때 넣었다는 무구정경 두 종류 중 현존 세계최고 목판인쇄물이라는 '무구정경 1권'이 정작 발견된 곳은 왜 석가탑이냐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런 의문에 박 원장은 "다보탑을 수리할 때 수습한 두 종류의 무구정경 중 중수기에서 '무구정경 1권'이라고 표현한 경전을 석가탑으로 옮겨 안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보탑에서 빼낸 경전을 석가탑으로 옮겨 안치하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박 원장은 "1024년 다보탑을 중수한 내력을 기록한 중수기가 그보다 14년이 지난 뒤인 1038년에 수리된 석가탑에 들어간 사실을 주목할 수 있다"면서 "다보탑 중수기가 석가탑으로 옮겨 봉안됐듯이 다보탑에 있던 두 종류의 무구정경 중 1종류가 석가탑으로 옮겨갔다"고 설명했다.

그에 의하면, 1024년에 1차로 중수한 다보탑은 지진의 여파로 1038년에 석가탑과 함께 2차 중수를 해야 했다. 따라서 석가탑에서 수습한 무구정경이 현존 세계최고 목판인쇄물이라는 사실은 "결코 흔들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을 담은 그의 논문 '석가탑 무구정광다라니경'은 국립중앙박물관과 대한불교조계종이 기획하는 '석가탑 중수 보고서'(전 4권) 중 조만간 나올 권1에 실릴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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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무구정경의 제작연대는 742년 이전

박상국 문화유산연구원장 ‘11세기 봉안론’ 일축

 

 

1966년 불국사 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하 무구정경·국보 제126호)이 발견됐다.

무구정경은 석가탑이 건립된 751년(경덕왕 10년) 이전에 제작된 세계 최고의 인쇄물이라는 흔들림 없는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는 중국 둔황 출토 금강경(868년)보다도 110년 이상 앞선 것. 당대에 건립된 석가탑이 이후엔 한번도 중수된 적이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1966년 발견 당시 무구정경과 함께 발견된 묵서지편(墨書紙片)이 판독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변하고 만다

 

떡진 상태로 보관돼 있던 묵서지편은 '무구정광탑중수기'와 '보협인다라니경' '서석탑중수형지기' 등 4종의 문건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런데 이 문건을 판독한 결과 석가탑이 고려시대인 1024년과 1038년 두차례에 걸쳐 수리된 것으로 일단 밝혀졌다.

이로 인해 무구정경이 창건 당시인 8세기 중반이 아니라, 11세기에 봉안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인쇄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어서 충격이 컸다.

그런데 불교서지학 전공자인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은 7일 "묵서지편 내용으로 볼 때 무구정경의 제작 연도는 통일신라시대가 확실하며, 연대도 당초 알려진 751년 무렵이 아니라 742년 이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리니경 목판본'은 원래 742년 이전 제작돼 다보탑에 있던 것을 석가탑 수리 때(1038년) 옮겨 봉안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 석가탑에 봉안돼 있던 '다보탑중수기'


처음 묵서가 판독될 때만 해도 '무구정광탑중수기(1024년)'와 '서석탑중수형지기(1038년)'는 모두 석가탑 중수와 관련된 것으로 짐작됐다. 석가탑에서 나온 문서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젊은 연구자들은 이 가운데 '무구정광탑중수기'는 석가탑이 아니라 '다보탑중수기'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중수기에서 탑의 해체를 기술한 부분을 보면 대롱 모양의 기둥과 꽃술 모양의 기둥, 연꽃 모양의 통주(筒柱)가 보인다"면서 "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다보탑의 형상임이 분명하다"고 밝힌 것이다.

또한 다보탑은 일제시대 때(1925년) 해체됐는데, 이때 반출된 오쿠라컬렉션(도쿄박물관 소장)의 금동원통형사리함 등이 문제의 '무구정광탑중수기' 기록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1966년 비단으로 싸서 여러번 실로 묶인 채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맨 왼쪽)과

1024년(가운데)·1038년 수리(오른쪽) 때 봉안한 중수기 세부명문. 

박상국 원장은 "이런 연구를 토대로 볼 때 훨씬 정교하게 만들어진 다보탑은 그만큼 붕괴 위험에 쉽게 노출돼 1024년에 수리했으며, 이보다 튼튼한 석가탑은 지진 등에 의한 손상을 입은 1038년 수리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 무구정경의 제작 연대는 742년 이전


다보탑중수기(무구정광탑중수기)와 석가탑중수기(서석탑중수형지기)를 보면 천보(天寶) 원년, 즉 742년이라는 창건 연대와 함께 285년 만에 수리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박상국 원장은 "지금까지는 다보·석가탑의 창건 연대를 751년 이전이라고 했지만, 이들 중수기 명문을 보면 742년 이전임이 분명히 드러났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다라니경 역시 그때 집어넣은 것일까.

박 원장에 따르면 1024년 다보탑 중수 때 다보탑에는 742년 이전에 제작된 무구정경 2종류가 봉안돼 있었다. 이것은 '다보탑 중수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그런데 1038년 지진으로 붕괴 위기에 놓인 석가탑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다보탑에서 나온 무구정경 가운데 1종류와 다보탑중수기(무구정경중수기), 그리고 새롭게 보협인다라니경을 석가탑에 봉안한 것이다. 이때 석가탑에 봉안한 무구정경이 바로 우리나라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것이다.

◇ 무구정경은 고려 때 유행하지 않았다
무구정경은 고려 때 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 박 원장의 흔들림없는 주장이다.

즉, 이 경전은 당나라 측천무후 때인 704년 이후 신라에 들어와 대유행한 것이다. 8~9세기 탑을 세울 때는 어김없이 무구정경을 봉안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석가·다보탑이 중수됐던 고려 때에는 탑을 만들 때 무구정경이 아니라 다른 경전인 보협인다라니경을 봉안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박상국 원장은 "유행이 지난 무구정경을 굳이 만들어 봉안했을 리 없다는 것"이라며 고려시대 제작설을 일축했다.

*********************************< 경향신문/이기환 선임기자 2009.4.7>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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