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 재협상 ‘미국은 항상 가능 한국은 불가’, 왜?
(블로그 ‘사람과 세상 사이’ / 오주르디 / 2011-11-09)
야당과 시민단체 등이 한미 FTA의 불평등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해도 정부·여당의 입장은 모호하기 그지없다. ‘불평등 문제’에 대한 정부·여당의 해명은 ‘그렇지 않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정도다. 국가 주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는 ‘독소조항’인 ISD(투자가-국가 소송제도)에 대해서도 ‘관례’라는 말로 즉답을 피해간다.
재협상 ‘불가능’ 아니라면 ‘혈맹’ 위한 희생?
무조건 ‘재협상은 없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미 의회가 FTA 이행법안을 통과시켰으니 재협상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고 펄쩍 뛴다. 국민보다 미 의회를 더 중시하는 정권이다. 정말 재협상은 불가능한 것일까?
2006년 6월부터 진행돼 온 한미 FTA 협상 과정을 보면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재협상 혹은 추가협상이 있었다. 지난 2007년 4월 2일 한미 FTA가 처음 타결된다. 하지만 두 달 뒤인 6월 16일 미국정부는 협상 타결을 본 한국, 페루, 콜롬비아, 파나마 등 4개 국가에게 노동과 환경 분야에 대한 재협상을 요구하고 나선다.
2007년 ‘1차 재협상’ 요구의 이유를 보면 미국 정부가 FTA와 관련해 얼마나 이기적이고 오만하게 행동해 왔는지를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재협상 요구는 FTA 타결 두 달 뒤 발효된 ‘미국 신통상정책’을 FTA 협정문에 반영하겠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의 국내법과 미국정부의 정책 테두리 안에 FTA를 밀어 넣겠다는 의도였다. 이미 타결된 국가 간 ‘약속’보다도 미국의 입장이 우선되는 게 당연하다는 오만함이 짙게 묻어나는 대목이다.
미국의 오만함, FTA를 미국 법과 정책에 맞추려 해
한국정부는 페루, 콜롬비아, 파나마 등의 남미 개도국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으면서 재협상에 응했다. 미국은 국제노동기구(ILO) 선언에 따른 결사의 자유, 단체교섭권의 효과적 인정,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 요인 제거, 아동노동의 철폐와 금지, 고용과 작업의 차별 제거 등의 권리를 법령 또는 관행으로 채택하고 유지할 것을 명문화하라고 주장했다. 또 오존층 파괴 방지 의정서, 지적재산권, 항구 안전 및 환경 보장 등 환경 문제도 FTA 협정문에 반영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페널티 조항도 있었다. 미국은 위반 사항이 발생할 경우 해당 국가를 상대로 특혜 관세 중단 등 무역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 놓았다. 해당 국가의 노동인권과 환경 개선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미국의 이득을 위한 조치였다. 해당 국가의 체계를 미국이 제어할 수 있는 장치 안에 두려는 게 목적이었다.
노동과 환경분야 재협상은 그해 6월 30일 미국의 요구가 전폭 수용되며 타결된다. 그러나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또다시 재협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2009년 1월 힐러리 당시 국무장관 지명자는 한미 FTA 재협상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자동차 분야 재협상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다.
‘재협상 없다’던 정부, 미국 요청에는 ‘순응과 협조’
미국의 ‘재협상’ 요구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반응은 ‘이중적’이었다. 청와대와 외교부는 즉각 “재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지만 국내 반발을 의식한 ‘형식적인 멘트’에 불과했다. 내용적으로는 미국정부에 재협상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드러나 크게 논란이 되기도 했다.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비밀 외교전문 중에는 자동차분야 재협상과 관련된 내용도 포함돼 있다. 전문에 의하면 2009년 2월 19일 주한 미 대사 스티븐스는 ‘재협상 불가가 한국정부의 공식 입장이지만 (이는 미국의 요구를 지나치게 존중한다는 비판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며) 미국에게 너무 양보한다는 인상만 피할 수 있다면 (재협상) 논의가 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2010년 7월 ‘쟁점현안 실무회의’로 포장된 재협상을 시작했다 ‘천안함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의 ‘혈맹’이 국가의 최고 가치라고 주장하던 때였다. 이명박 정권은 ‘그해 12월 3일 재협상 종료와 FTA 타결을 발표했다. 자동차 분야에 대한 미국의 요구가 그대로 반영된 재협상이었다.
자동차 분야 양보로 큰 손실을 보게 됐다는 지적이 일자 정부는 “이익균형을 이룬 재협상”이라며 “손해 본 것 없다”고 우겼다. 최대 기대치였던 자동차 분야가 재협상으로 인해 엉망이 됐지만 정부는 제약, 양돈 분야에서 “얻은 것도 있다”며 말꼬리를 돌리기 바빴다. 자동차 분야에서 4조 원을 내주고 제약과 양돈 분야에서 2000억을 얻은 계산서를 놓고도 ‘잃은 게 없는 협상’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미국은 쉽게 ‘재협상 관철’, 한국은 촛불집회 덕택에 딱 한 번
거짓과 궤변을 동원해 우겨대는 것도 지쳤는지 자동차 재협상이 ‘굴욕적인 퍼주기 협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발언도 있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이 “2007년(노동환경분야 재협상) 협상에 비해 (자동차 재협상이) 경제적으로 양보해야 할 규모가 커졌다는 점을 인정하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볼 수 있다”고 답했다. 양보가 아니라 ‘윈윈’이라고 우기던 김 본부장이 진실을 말하는 순간이었다.
미국 측의 재협상 요구에 한국정부는 순응했다. 남미의 개도국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으면서도 재협상 요구만 있으면 협조해 왔다. 반면 한국이 추가협상을 관철시킨 건 단 한 번뿐. 그것도 매우 어렵게 성사됐다. 정부의 노력이 아니라 국민의 노력에 의해서였다.
정부가 일방적으로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을 약속하자 국민들이 반발했다. 촛불시위가 확산되며 정권퇴진운동으로 번졌다. 추가협상도 재협상도 없다던 정부가 정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지자 미국 정부에 추가협상을 해달라고 읍소했다. 이득이 좀 줄더라도 일단 쇠고기 수입개방을 관철하는 게 낫다 싶은지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의 요구를 들어줬다. 거대한 촛불의 물결이 없었더라면 쇠고기 추가협상은 절대 불가능했을 것이다.
미국에게는 ‘관대’, 국민에게는 ‘억압적’
한국도 주권국가다. 미국은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어도 한국은 그럴 수 없다는 청와대의 논리가 국민을 화나게 만들고 있다. 국익을 저해할 요인이 많은 ‘불평등조약’을 밀어붙이는 정부를 보며 ‘우리가 미국의 속국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많다.
‘재협상 없다’면서 뒤로는 미국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왔다. 미국에게는 관대하기 짝이 없는 정권이면서 국민들에게는 억압적이다. 인터넷을 감시하고 한미 FTA의 문제점을 조금 과다하게 지적하면 구속하겠다고 겁박하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한미 FTA 반대를 위한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정부도 한미 FTA 협정이 ‘불평등 조약’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 정부에게 재협상 요구를 하기 어렵다면 국민에게 맡기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반대 집회를 막으려고만 하지 말고 국민의 무엇 때문에 미국과의 FTA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지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 국민이 미국정부를 상대로 FTA 불평등 요소를 지적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재협상 요구 어려우면 ‘촛불’에 맡겨라
혹여 정부가 미국에게 재협상 요구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데 있는 건가. 그간 정부는 “한국에게 한미 FTA는 단순한 경제 이슈를 넘어 한미동맹의 핵심”이며 “한미관계의 지주”라고 말해왔다.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건가? 경제적 득실을 떠나 한미동맹을 확보하려는 게 목적이란 말인가.
경제적 이유를 떠나 외교와 안보의 목적으로 한미 FTA를 추진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불평등 요소’를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협상에 미온적이라면, 크게 잘못된 판단이다. 미국과 외교와 안보를 내어 주는 보호조약이라도 체결하겠다는 말인가?
국가의 운명을 한미동맹에만 의존할 수 없다. 당장 재협상에 나서든지 아니면 국민이 ‘민의의 목소리’로 미국 정부에게 재협상 의지를 피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주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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