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몸통’이 드러나게 될까.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이하 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 사건을 검찰이 재수사하기로 했다. 증거인멸을 청와대가 지시했다는 보도(901호 표지이야기 ‘청와대가 민간인 불법사찰 개입 해명할 차례다’ 참조)와 장진수 전 지원관실 주무관의 추가 폭로가 이어지면서다.
그간 최종석 전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이 자신의 직속 상관이던 이영호 전 고용노사비서관 등을 보호하려고 장 전 주무관을 회유하는 녹음 파일이 공개됐다. 이 전 비서관이 진경락 전 지원관실 총괄지원과장 등을 통해 ‘입막음용’으로 장 전 주무관에게 돈을 건네려 한 일, 지원관실 특수활동비에서 매달 고용노사비서관실 인사들에게 ‘상납’이 이뤄졌다는 폭로도 이어졌다. 야당과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는 검찰에 재수사를 촉구했지만, 검찰은 “고발이 필요하다”며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검찰의 이런 망설임을 두고 법조계 등에선 이명박 대통령과 돈독한 관계인 한상대 검찰총장 탓이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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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간인 불법사찰 증거인멸 재수사에서 ‘윗선’을 밝혀내려면 청와대의 태도가 중요하다. 참여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원들이 3월14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동사무소 앞에서 민간인 사찰 증거인멸 규탄 및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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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거명된 인물 모두 조사해야
검찰이 재수사로 방향을 튼 건 장 전 주무관의 연이은 폭로가 매우 구체적인데다, 민주통합당이 4월 총선 뒤 국정조사와 특별검사제를 통해 진상을 규명하겠다고 압박하자 더는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재수사를 미루다 특검에서 ‘몸통’이 밝혀지면,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을 또 한 번 사야 할 뿐 아니라 거센 검찰 개혁 요구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검찰이 다시 수사를 한다면, 장 전 주무관의 폭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조사를 받아야 한다. 검찰이 밝혀내야 할 의혹의 줄기는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사찰과 증거인멸을 지시한 ‘윗선’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게 중요하다. 검찰 수사에선 이인규 전 공직윤리지원관과 진경락 전 과장이 각각 민간인 불법사찰과 증거인멸의 ‘최고책임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이영호 전 비서관과 최종석 전 행정관이 일상적으로 업무를 지시하거나 보고받는 등 지원관실 운영을 사실상 주도한 여러 정황 등으로 미루어보면, 민간인 불법사찰과 이들의 관련성은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장 전 주무관은 최종석 전 행정관이 자신에게 “망치로 깨부수든지, 강물에 갖다버려도 좋다. 지원관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물리적으로 조치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증거인멸을 직접적으로 지시한 사람이 최 전 행정관이라는 주장이다. 게다가 최 전 행정관은 장 전 주무관에게 하드디스크 파괴를 지시하기에 앞서, 장 전 주무관의 전임자인 김아무개 행정안전부 주무관에게도 지원관실 컴퓨터 파일 삭제를 지시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김 주무관도 검찰 조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최 전 행정관의 직속 상관인 이영호 전 비서관도 검찰 수사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 “이영호 비서관한텐 원망하는 마음이 좀 있지만, 저 사람 더 죽이면 안 되겠단 생각으로 내가 위험을 무릅쓴 것”이라는 최 전 행정관의 육성 녹음 파일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이 전 비서관은 진경락 전 과장과 이아무개 공인노무사를 통해 장 전 주무관에게 2천만원을 건네려 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증거인멸과 사건 은폐에 이 전 비서관이 아무 관련이 없다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기는 어렵다.
둘째, 검찰은 당초 수사가 부실하게 이뤄진 이유를 밝혀내야 한다. 당시 검찰은 최 전 행정관이 장 전 주무관에게 대포폰을 건넨 사실을 확인했고, 모두 4대의 대포폰 통화내역 자료도 입수했다. 장 전 주무관에겐 이 부분과 관련된 내용만 별도로 떼어내 묻기도 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 자료와 신문조서를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다. 최 전 행정관과 이 전 비서관 조사 기록도 제출하지 않았다. 검찰 고위층 또는 청와대의 압력이 없었다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새누리당에서도 “몸통은 이명박”
검찰과 청와대가 수사 상황을 조율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장 전 주무관은 최 전 행정관이 증거인멸을 지시하며 “민정수석실과 얘기가 다 됐다. 검찰에서도 문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육성으로 공개된 최 전 행정관의 말에도 관련된 내용이 있다. “(재수사가 이뤄지면) 민정수석실도 자유롭지 못할 테고…. 여태까지 검찰에서 겁을 절절 내면서 나에 대해 조심했던 게, 내가 죽으면 당장 사건이 특검으로 가고 재수사로 갈 수밖에 없다는 거 검찰도 안단 말이야”라고 말한 것이다. 또 장 전 주무관의 상고이유보충서에는 김진모 전 청와대 민정2비서관이 검찰 고위 관계자와 통화해 최 전 행정관 조사의 수위를 조율했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치권에선 당시 민정수석이던 권재진 법무부 장관과 노환균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이 축소 수사를 이끌었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당시 지원관실 운영 문제를 놓고 민정수석실과 고용노사비서관실은 심한 갈등을 빚었지만, ‘윗선’의 실체가 드러나면 청와대 전체가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꼬리를 잘랐다는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검찰은 지원관실을 누가, 누구를 위해 운영됐으며 정확히 무슨 일을 한 조직인지 밝혀내야 한다. 민간인 불법사찰 사실이 처음 드러났을 때부터 지원관실은 ‘박영준 사조직’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박영준 당시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의 ‘영포 라인’ 인맥이 지원관실에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지원관실에서 매달 280만원을 ‘상납’받은 의혹을 사고 있는 이 전 비서관과 조재정 전 선임행정관, 최 전 행정관 등 고용노사비서관실 핵심 인물도 박 전 차장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원관실은 민간인뿐만 아니라 남경필 의원 등 권력 주류의 뜻을 거스르는 여당 의원들까지 사찰한 사실이 드러났다. 지원관실은 각종 정보를 수집해 동향보고서를 만들고, 이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했다는 의혹도 샀다. 새누리당에서조차 “몸통은 이명박”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지원관실은 이 대통령과 이상득 의원 반대파뿐만 아니라, ‘윗선’의 이권·인사 청탁을 들어주지 않거나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인사들까지 전방위적으로 뒷조사했다. 이런 정보 가운데 일부를 이 대통령에게 보고하며 ‘제대로 통치를 하려면 우리가 필요하다’고 했고, 사찰 당사자에겐 압박용으로 제시해 ‘윗선’의 이해를 관철시키곤 했다”고 말했다. 지원관실이 정권 일부 세력의 ‘흥신소’ 노릇을 했다는 주장이다.
청와대의 침묵 재수사에 나선 검찰이 얼마나 진실을 밝혀낼지는 미지수다. 이번엔 청와대 눈치를 전혀 보지 않으리라 기대하기도 어렵다. 지금까지 청와대는 이 사건과 관련해 어떤 공식적인 언급도 하지 않았다. 장 전 주무관이 말한 대로 최 전 행정관이나 이 전 비서관 선에서 불을 끌지, 그 ‘윗선’까지 밝혀낼지는 청와대의 의중과 무관하지 않다. 검찰이 이번에도 사건의 실체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할 경우, 4월 총선 이후 특검이 불가피해 보인다.
조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