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2시의 안부전화, "누님이 꽤 미인이시더군요"
되살아난 민간인 사찰, 부정한 권력에 대해 분노한다면 투표하라!
"여보, 전화받으세요."
1996년 2월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우리나라 재야단체의 본부 역할을 하던 '민주주의 민족통일 전국연합'이라는 곳에서 인권위원회 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그날도 여느 때처럼 밤 12시가 넘어서야 막차로 집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집에 들어선 지 채 5분이 지나지 않은 시각, 집 전화의 벨이 울린 것입니다.
'이 시간에 무슨 전화지?' 세수를 하다 나온 저는 뭔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며 아내로부터 전화를 건네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고상만씨, … 되시죠?"
처음 듣는 30대 중반의 남자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목소리의 톤이 달랐습니다. 뭐랄까. 기관원의 냄새가 확 풍기는 음습한 불쾌감이었습니다.
"네. 맞는데요. 그런데 누구시죠?"
기분 나쁜 상상을 애써 떨치며 조용히 다그치듯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제 물음에 상대방의 답변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상대방의 침묵….
"여보세요. 도대체 누구세요?"
"네. 여기는 안기부입니다."
"네? 뭐라고요?"
"국가안전기획부라고요."
정말 황당했다. 진짜야? 뭐야? 이거.
안기부 직원이 나의 안부를 걱정하는 '사찰 공화국'?
"장난하지 말고…. 진짜 누구세요?"
순간 머리가 엉클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평소 재야단체에 일하던 이들끼리 가까운 동료에게 전화하여 "여기 안기분데요"라며 장난치곤 했기에 제 판단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그의 낮고 압박하는 듯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저는 이것이 실제 상황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걸로 누가 이 시간에 전화해서 장난합니까? 진짜 안기부 직원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습니다. 순간 제 머리에서 이제부터 최대한 차분하게 그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떠올랐습니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금 내가 느끼는 이 당혹과 또 다른 공포심이 전화를 건 안기부 직원에게 느껴지지 않도록 하려고 저는 다그쳤습니다.
"네. 그런데 이 시간에 왜 저한테 전화하셨나요?"
"아. 네. 그냥 잘 계신가 해서 안부차 전화 드렸습니다."
그는 '안부 차'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 전화하여 자신을 안기부 직원이라고 밝히면서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네. 뭐라고요? 안부차…."
솔직히 말해 그 후 내가 뭐라고 답변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당황스러웠으며 공포스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들이 내 뇌리에 조각 파편처럼 박혀 오늘까지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고 선생님은 집도 괜찮게 사시는 것 같은데, 왜 전국연합에서 일하시는지 궁금하다"고. "그래서 궁금해서 한번 여쭤보고 싶었다"고. 그러면서 그는 말끝에 내 누님을 언급하며 살고 있는 동네와 "누님이 꽤 미인이시더군요"라는 말까지 곁들였습니다. 그때 제 심정이 어땠을까요. 돌이켜보면 그때 그 전화를 받은 심정은 분노가 아니었습니다. 그 밑도 끝도 없는 한밤중 안기부 직원의 전화는 협박과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간첩 사건 대책위에서 열심히 일한 게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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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통화를 하면서 내 머릿속을 뒤흔든 것은 하나였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저를 정말 두렵게 한 것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대방이 마치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결혼하여 떨어져 살고 있는 누나에 대해 그가 언급하는 말은 충격적이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이 어디까지인지, 저도 모르는 또 다른 저의 약점까지도 그가 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사실. 그렇기에 전화를 받은 내내 저의 공포감은 스스로 형성되고 또다시 깊어지는 혼란스러움의 반복이었습니다.
그렇게 붕 떠 있는 정신 끝에 무슨 말을 했는지 경황이 없을 때쯤 그는 저에게 한번 만나자고 제안했습니다. 저는 바로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주도권을 상실한 제 처지에서 그의 요구를 거절하는 강도는 약했고, 결국 며칠 후 만나기로 약속하게 됩니다. 그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기에 당시 저는 20대의 여린 청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제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먼저 저에게 문제가 될만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봤습니다. 서점에서 팔고 있는 책 한 권을 가지고도 구속이 남발되던 시대였기에 안기부가 문제 삼으려면 저의 행동은 한도 끝도 없을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분명하게 잡히는 심증도 있었습니다. 간첩 사건이었습니다.
1995년 10월 24일 충남 부여 정각사에서 무장간첩 김동식이 체포되었습니다. 난데없는 간첩 출현으로 시끌시끌하더니 생각지도 못한 불똥이 재야단체에 튀었습니다. 결국, 간첩 김동식을 만나고도 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며 청년 재야인사 6명이 안기부에 의해 연행되었고 모두 구속되었습니다. 1996년 4월 총선을 불과 여섯 달 앞두고 벌어진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이 사건이 조작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유는 간첩의 행적 때문이었습니다. 재야인사 6명이 구속된 이 사건의 발단은 어처구니없게도 간첩 김동식의 수첩 때문이었습니다. 마치 연예인의 스케줄 수첩처럼 김동식은 자신이 접촉했던 이들의 이름과 시간, 장소를 꼼꼼하게 적어놨던 것입니다. 안기부는 이를 근거로 대상자를 검거했던 것입니다. 반면 구속된 이들은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훤한 대낮에 사무실로 찾아온 낯선 남자가 사람들이 빈번한 그곳에서 뜬금없이 "나는 북에서 내려온 통일 일꾼입니다. 선생님과 통일 사업을 벌이러 왔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황당한 일을 접하고 이들은 둘 중 하나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미친 놈'이거나 또는 안기부 등 공안기관의 공작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체포된 이들 중에는 "이딴 식으로 사람을 놀리지 말라. 안기부에서 이런 식으로 공작하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리하면 이 사건은 지금도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당연히 '공안조작 의혹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저는 이 대책위에서 총간사 역할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이후 안기부와 재야단체 간의 공방이 격화되었고 구속적부심 재판 과정을 통해 많은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총간사였던 저는 이 같은 의혹에 대해 언론 기고와 방송 인터뷰 등을 통해 진실을 파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안기부 요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던 것입니다.
프락치 행위를 요구한 안기부 요원... 두려웠습니다
며칠 후, 결국 저는 약속 장소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어떻게 나를 알게 되었냐"는 물음에 그는 예상처럼 "간첩사건 조작 대책위 활동을 열심히 하셔서 어떤 분인가 궁금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간첩사건에 대해 많은 오해한 것 같다고 하면서 그 말끝 중간중간에 저와 관련한 말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고향과 출신 학교, 그리고 예전 활동에 대한 언급이 그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냐"고 되물으니 "그냥 관심이 있어서 좀 알아봤다"며 알 듯 모를 듯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난감해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그가 생각지도 못한 요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도울 수 있는 것은 도우면 좋지 않겠냐"는 말과 함께 그는 당시 나우누리 게시판으로 운영하고 있던 전국연합 카페의 접속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사실상의 프락치 역할을 요구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정리하면 제 선택은 하나였습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저는 이 모든 과정을 제가 속한 단체의 사무처장에게 모두 말했습니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알려 달라며 다시 만난 안기부 직원에게 저는 "모든 사실에 대해 연합에 보고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황해 하며 "다시는 연락하거나 만나자고 하지 않을 테니, 여기서 서로 없던 일로 하자"라고 하고 떠났습니다. 다행히 그 일 이후 저는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가 남긴 사찰의 두려움과 어디선가 나를 주시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굵은 공포의 생채기는 남았지만 그래도 그 정도에서 그 파문이 마무리 된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잊었던 그를 다시 만난 것은 그 후 3년이 지난 1999년 여름이었습니다. 전국연합에서 천주교 인권위원회로 옮겨 일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농성하는 분들을 지나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가는데, 어디선가 낯익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예전 바로 그 안기부 요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제 심장은 다시 심하게 요동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저보다 더 놀라고 당황해 하는 안기부 요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다가와 그는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습니다. 잘 지냈냐고 묻는 그에게 여기는 어쩐 일이냐는 수인사를 나눈 후 그가 예전 일을 꺼냈습니다.
요지는 이랬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 참 미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며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바뀌었고 일도 변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 회사도 과거 불법적인 국내 정치 개입이나 재야인사 뒷조사 등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 남북 관계에 대한 정보만 수집하는 기관으로 탈바꿈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민주정부가 들어섰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이제 다시는 밤 12시 안기부가 안부를 묻는 황당하고 두려운 일은 없겠구나" 하는 안도감.
그의 말에 제가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찰하던 사람과 당한 사람으로서 그 끔찍한 기억을 역사 속에 묻어 버리는 악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며 가는 그가 저에게 "다시 또 보시죠"라고 말했을 때, 저는 "그래도 선생님을 또 보는 것은 싫습니다"라고 웃으며 답한 기억이 선합니다.
사찰 하는 민주주의? 투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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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악몽 같은 사찰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민간인 김종익씨 사찰로 시작된 파문이 이제 김제동, 김미화 등 연예인을 비롯하여 사실상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10년간의 민주정부 시대를 거치며 적어도 사라졌다고 믿었던 그 민간인 사찰이 다시 도래했음을 확인하는 저로서는 참담함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사찰하는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주인을 물어버리는 권력은 공권력이 아닙니다. 누구나 마음대로 자신의 의사 표현을 할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 그리고 이로인해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하지 않는 나라.
만약 그것 때문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이가 있다면 그의 피해망상을 걱정하는 세상이 올바른 나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두렵습니다. 저의 이 같은 비판의 목소리 때문에 혹시 오늘 밤 12시, 또다시 제 안부를 묻는 공안기관원의 전화가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호소합니다.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민주주의를 갈망한다면 이번 총선에 반드시 참여하여 주십시오. 부정한 권력을 부정한다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이들을 단죄할 수 있는 국민의 효율적인 무기는 바로 투표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잃어버린 민주주의'를 찾아와야 합니다.
4월 11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여러분을 투표소에서 만나기를 기대합니다.
[ 오마이뉴스, 고상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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