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JSA’ 실제 모델 김훈 중위의 이상한 죽음
판문점 의문사 사건(상)
“자살 미화한 소설을 읽고 김 중위가 자살했다” 국방부의 소설 같은 주장
또 그는 오른손잡이인데 왼손에서만 화약흔이 검출됐다
1년 뒤 같은 소대 전역병의 증언
“선임하사가 북한군과 만났고 그쪽 초소에까지 놀러갔다”
김 중위가 그 낌새 알아차리고 갈등빚은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
‘연꽃으로도 피어 못 날 이 서투른 몸부림의 끝/ 못 믿을 돌덩이나마 하나 죽기 전엔 디뎌 보마. 죽기 전엔/ 꿈 없는 네 하얀 살결에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모든 끝들이여. 잠자는 끝들이여. 죽기 전엔 기어이 결별의 글 한 줄은 써 두고 가마.’
중위 계급장 달고 막 부대배치를 받았던 시절, 나는 이 시인지 유서인지 모를 글을 읽으며 잠시 죽음이라는 무서운 연못 저 밑바닥에 가라앉았다. 1년 전의 사단 헌병대 수사기록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이 글 앞장에는 전방 초소에 근무하던 이병이 턱에다 엠16소총을 대고 쏘아 자살을 했다는 설명과 사진이 붙어 있었다. 턱 밑에는 총알이 들어간 구멍 5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얼굴은 헤어져서 너덜너덜했던 걸로 기억된다. 1984년 초 일이니 그게 그 뒤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수도 없이 보아 오게 된 무수한 주검들의 시작이었다.
나는 너덜너덜해진, 그래서 사람 얼굴로는 도저히 보여지지 않는 그 주검사진을 들여다보면서 그가 남겼다는 ‘자필 유서’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꿈 없는 네 하얀 살결에나마 기어이 불길한 꿈 하나는 남기고 가마.’ 이병이 죽기 전 마지막 그 마음이, 아직 20대였던 내 마음에도 그대로 고스란히 전해져 들어왔다. 김두황 이병이라 했다. 그는 고려대 4학년을 다니다가 운동권 핵심으로 찍혀 경찰에 끌려가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바로 강제로 군에 끌려와 최전방에 배치되었다. 이른바 ‘녹화사업’이었다. 그 시는 백지에 볼펜으로 휘갈겨 쓴 것이었는데 헌병대는 이를 자살의 결정적 증거로 삼았다.
1999년 12월28일 특전사에서 국회 국방위원회 김훈 중위 의문사 조사소위 주관으로 진행한 베레타9 권총 사격 실험. 실험 전 군수사관이 특조단이 주장하는 ‘두손 잡고 오른쪽 머리에 대고 사격하는 자세’로 실험하려는 병사의 사격 자세를 교정해주고 있다. 이 실험에서도 사격병사 6명의 방아쇠 당긴 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됐지만 국방부는 이 증거를 묵살했다. 김척 제공 |
14년 만의 반전, 총기발사 시험해보니
10여년 세월이 흐른 뒤 나는 ‘양평 생매장 사건’으로 청주여자교도소에서 복역중이던 여자가 보내온 엽서에서 ‘기다림밖엔 그 무엇도 남김없는 세월이여’로 시작하는 이 시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 시는 오래전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바라보이던 철책선 초소에서 이병 김두황이 마지막으로 쓴 유시가 아니라 시인 김지하가 쓴 ‘끝’이라는 시였다.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수사기록에 붙어 있던 글은 김 이병의 자필도 아니고 친구가 김 이병에게 편지에 적어 보낸 것이었다. 당시 헌병대는 자살 결론 내기에 급급해서 필적 대조도 안 했거나, 해놓고는 묵살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한때 내겐 여자가 있었어. 아니, 그녀에게 나란 남자가 있었다고 해야 하나. 그녀는 내게 방을 보여 주었지. 멋지지 않아? 노르웨이산 가구(Norwegian Wood)야… 우리는 새벽 2시까지 얘기를 했지. 이제 잘 시간이야. 그녀는 자기는 아침에 사랑을 한다며 깔깔 웃기 시작했어. 나는 안 그렇다며 욕조에 기어들어가 잠을 잤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나 혼자. 그녀는 날아가 버렸어. 멋지지 않니? 노르웨이제 가구가.’ 인도 악기 시타르의 쟁쟁대는 반주에 맞춰 비틀스가 부른 ‘노르웨이의 숲’ 아니 ‘노르웨이산 가구’라는 노래 가사다.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영리한 사람이라 이 비틀스 노래를 그대로 소설로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도 <노르웨이의 숲> 또는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2권짜리 제법 긴 소설이지만 그 내용은 그저 비틀스의 2분30초짜리 노래 가사로 짧게 요약할 수 있겠다. 작가는 자신의 소설을 이렇게 평했다. ‘이 소설을 굳이 정의하자면 성장소설이라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고독하게 싸우고, 상처받고, 상실되고, 상실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 모습이다.’
국방부 특별 합동조사단은, 1998년 2월24일 낮 12시20분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JSA)에서 머리에 총구멍이 뚫린 채 발견된 김훈 중위가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자살한 거라 했다. 김두황 이병 사건 같다. 수많은 군 의문사 사건을 겪으면서 내린 결론. 군 수사기관이 자살 동기를 찾아내서 가져다 붙이는 그 풍부한 상상력 하나는 알아주어야 한다.
국방부 특조단은 김훈 중위 사망 전 특이 행동으로서 ‘2.20 저녁 소대장실 앞에서 상병 김○○에게 염세 비관적이며 자살도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미화한 소설 <노르웨이의 숲>의 내용을 이야기해주며 읽을 만한 책이라고 알려 준 바 있으며, 2.22 야간 아래 막사에서 병장 박○○이 위 책을 읽고 있자 나도 읽어 보았는데 소설의 구성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며 관심을 표명한 바 있고… 사고 다음날 예정된 업무보고에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 나머지 자살도 인생의 한 부분으로 미화한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통하여 합리화된 자살을 결심’했다고 결론지었다. 사건 발생 1년 만인 1999년 4월의 일이다.
그리고 엊그제인 2012년 5월19일, 별 셋의 장군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길거리를 ‘울며’ 애소하고 다닌 지 14년 만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3월22일 특전사 실내 사격장에서 총기 발사 시험이 있었다. 옛날 김훈 중위가 시신으로 발견되었던 판문점 241소초(GP) 조건과 비슷한 상황을 만들어 10명이 베레타9 권총을 사격했다. 그런데 10명 모두 방아쇠를 당긴 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되었다. 어떤 모습으로 방아쇠를 당겼든.
장군 출신 아버지, 군을 향한 분노
아버지 김척(왼쪽)씨와 아들 김훈. 아버지가 현역 장군 시절 아들의 소위 임관식때 함께 찍은 사진이다. 자료사진 |
애초 현장에 미군이 맨 처음 출동했을 때 김 중위는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왼쪽 관자놀이로 관통상을 입고 소초 안 벽에 기댄 채 숨져 있었다. 그들은 김 중위의 양손에 즉시 봉투를 씌웠고, 4시간 뒤 감식반이 양손에 뇌관화약이 묻어 있는지를 검사했다. 시료 분석 결과 뇌관화약인 바륨이나 안티몬이 김 중위 오른손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고 왼 손바닥에서만 검출되었다.
김훈 중위는 오른손잡이였고 오른쪽 옆머리에 총을 대고 쏘아 자살했다면 오른손에서 뇌관화약 잔재가 묻어나야 했다. 국방부 특조단은 1999년 4월 발표에서 김 중위가 ‘총구를 고정하기 위하여 왼손으로 총열을 잡고 발사’하였기 때문에 왼손에서 화약흔이 나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미국 자료에 따르면 총을 발사한 손에서도 화약흔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어서 김 중위 오른손에서 화약흔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더하여 국방부 쪽 법의학자들은 김 중위가 오른손 검지가 아니라 엄지손가락을 돌려서 안으로 집어넣어 권총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에, 탄피가 튀어나오면서 함께 나오는 화약흔이 오른손 손등에 묻지 않은 것이라는 정말 희한한 주장을 폈다.
김훈 중위 사건을 모델로 한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도 나왔듯이 거기서는 사병들도 권총을 기본화기로 지급받는다. 당연히 권총사격 훈련도 열심히 한다. 그런데 육군사관학교를 3분의 1 상위권으로 졸업한 김 중위가 자살을 하는데 권총이 빗나갈까봐 이를 고정시키려고 왼손으로 총열을 잡고, 오른손은 엄지를 안으로 넣는 아주 특이한 자세로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이번 2012년 총기 발사 시험에서는 이런 특이한 자세에서도 총을 쏜 손에서 모두 화약흔이 검출되었다. 그런데 김 중위의 오른손에서는 왜 아무 반응도 안 나왔나.
김 중위가 방아쇠를 당긴 게 아니다!
1998년 5월, 김 중위 아버지가 천주교 인권위원회에 찾아왔다. 바로 김훈 중위가 근무하던 1군단의 군단장을 지낸 예비역 중장도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다른 부모들과 다를 게 전혀 없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유가족에게는 사실을 다 털어놓은 전역병이 수사팀에 불려가 진술을 번복하는 일은 우리를 너무나 슬프게 했습니다. 군에서 의문사한 아들을 둔 부모들을 만났습니다. 모두들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고통 속에서 오직 아들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생업을 팽개치고 있는 이들. 바로 우리 가족의 모습이었습니다. 도대체 자랑스럽게 보낸 군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국방부는 아는가. 3성 장군 출신인 저조차도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그들은 수사관을 제대로 만날 수도 없고 정보도 완전히 차단되어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이들의 참담한 심정을 저는 제 자식을 잃고서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천주교 인권위원회는 아들이 군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부모들의 호소가 밀려들어 아예 특별위원회까지 만든 상태였다. 인권위원회가 나름 열심히 활동을 한 성과는 나중에 국가기구인 ‘군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드는 데 밑돌이 되었다.
‘월북’ 김중사는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그해 9월 인권위는 ‘군내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한 법의학 공개토론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는 미국에서 30년 이상 수많은 총기 사건 법의학 감정을 해온 노여수 박사가 참석했다. 그는 김훈 중위가 타살되었다는 소견을 냈다. 그 뒤 에스비에스(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타살 의혹을 제기했고 국회 국방위원회에 소위원회가 만들어졌다.
12월3일 국회에서는 난리가 났다. 김훈 중위 소대에 근무했던 전역병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소대 선임하사가 상대편 북한 인민군들과 여러차례 만났고 그쪽 초소에까지 놀러 갔다 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거기 더해 1998년 2월 귀순한 인민군 상위도 국회에 나와 김훈 중위가 241소초장으로 오기 전, 자신들이 남쪽 소초원들을 여러차례 만나 포섭을 시도했다고 진술했다.
김 중위가 소초장으로 부임한 뒤, 부소대장인 선임하사와 고참 사병들이 인민군을 접촉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소대원들과 갈등을 빚게 되는 과정에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닌지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국방부 특조단은 1998년 4월자 ‘수사 결과’에서 김○○ 중사가 97년 7월부터 11월까지 인민군 상등병과 중좌를 30차례 접촉했고, 돼지고기 볶음 400그램 정도를 가지고 가서 중좌가 가져온 인삼주를 같이 마셨고, 남쪽 폐회로텔레비전(CCTV) 카메라 감시를 피하여 월북해서 인민군 소초를 확인하고 복귀했다고 발표했다. 영화와 똑같다.
국회 국방위 하경근 의원은 후에 특조단의 이 발표가 김 중사 감싸기라는 취지로 강하게 반박했다. 기무사는 12월4일 김 중사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며칠 뒤 타살 의혹을 제기하는 들끓는 여론에 못 이겨 국방부는 양인목 중장을 단장으로 하는 특조단을 구성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위원장이던 나와, 운영위원 이덕우 변호사, 재미 법의학자 노여수 박사는 자문위원으로 참여했다. 이 변호사는 그 이후 민사소송 등 인권위의 김훈 중위 사건 규명활동 책임을 맡았다. 그해 마지막 날 나는 이돈명 변호사를 모시고 양 중장을 만났다. 그는 우리에게 수사기록을 다 보여주고 필요하면 조사 과정에 자문위원들이 입회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불과 보름 뒤 이 말은 그저 말뿐이었음이 드러났다.
**********************************************************************************************************
판문점 의문사 사건(하)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미군 탓이 크다
1999년 1월 어느 날, 날씨가 매섭게 추웠던가. 나는 판문점 인근 241소초에 갔다. 특조단 양인목 중장은 이날 권총 발사 시험을 통해 두 가지를 확인해 보기로 나와 분명히 약속을 했었다. 첫째, 현장 벙커 안에서 실제로 베레타9 권총을 사격한 후 총을 쏜 사람 손에서 뇌관 화약이 묻어나는지. 둘째, 권총을 장전하려면 노리쇠를 뒤로 당겼다 놓아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지문이 노리쇠에 남지 않을 수도 있는지.
미군은 사건 발생 직후 김 중위 양손에 누런 종이봉투를 씌워 바람이나 사람에 의해 화약흔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존을 했다. 그런데도 오른손에서 화약성분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건, 타살을 강력하게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였다. 그리고 권총 노리쇠에는 당연히 총을 장전한 사람의 지문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문 소유자가 총을 쏜 사람일 텐데 노리쇠에 감식할 만한 지문이 없다! 김 중위가 제 머리에 권총을 쏜 뒤 자살을 감추기 위해 제 손으로 지문을 닦아냈나?
아아, 삶은 돼지머리에 총을 쏜 건 ‘쑈’였다
그런데 특조단은 현장에서 갑자기 안전사고 위험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사람에 의한 권총 발사 시험을 취소했다. 창문 밖으로 쏘면 될 거 아니냐고 의견을 냈지만 들은 체도 안 했다. 그러곤 난데없이 삶은 돼지 대가리가 나왔다. 그걸 벙커 안에다 놓고는 옆에다 총을 거치한 뒤 밖에서 격발장치를 이용해 거기다 총을 뻥뻥 쏘아 대는 거였다. 총알이 어떻게 머리를 관통해서 어디로 날아가는지를 살펴야 한다나.
이거야말로 정말 “아아”였다. 아아, 삶은 돼지 대가리는 장사 잘되게 해 달라, 사고 없게 해 달라, 고사 지낼 때나 쓰는 줄 알았지… 기자들이 오고 사진을 찍고, 티브이 카메라가 돌아가고 법석댔지만 이건 ‘쑈’였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민간 자문위원들은 그 들러리들.
나는 즉시 판문점 241소초를 떠나 부리나케 용산 국방부로 가서 양 중장에게 항의를 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를 맥 빠지게 했다. “오늘 시험은 어떤 의학적, 법적 증거도 갖지 못하는 시험이었다.”
이런 상황은 다음날로 이어졌다. 다음날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특조단이 주관하는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그 구성부터가 문제였다. 자살을 주장하는 토론자는 국방부 측 국내 법의학자 등 7명, 타살 쪽은 미국 법의학자 노여수 박사 1명. 거기다 진행은 현직 검사가 맡았다. 어제 ‘돼지 대가리 상황’의 재현이었다. 천주교 인권위원회 실무자들은 토론회 구성과 진행이 부당하다며 항의했지만 역시 마이동풍이었다. 그중 고상만 간사는 아직도 이 사건을 놓지 않고 있다. 법의학이나 과학을 다수결로, 그것도 처음부터 다수결을 예정한 구성으로 결정하는 게 말이나 되냐며 나도 그 자리를 떠났다. 민간 자문위원 10명이 전원 사퇴했다.
국방부 쪽 법의학자들 일부는 김 중위 오른손에서 화약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은 건 오른손 검지가 아니라, 손등이 몸쪽으로 향하게 하고 엄지로 방아쇠를 당겼기 때문이라 주장했다. 이 역시 김 중위가 자신이 총을 쏜 걸 감추려고 일부러 엄지로 총을 쏘았다는 걸까.
왼손 바닥에서 화약흔이 나온 걸 노여수 박사는 타살의 중대한 단서로 보았다. 상대방이 가까이서 자신에게 총을 쏘려 할 때 저도 모르게 손으로 총을 가로막는 자세에서 화약성분이 묻게 되는, 피살자에게 흔히 발견되는 이른바 ‘방어흔’이라는 거였다. 국방부 측은 이를 총을 고정시키려 왼손으로 총구를 감아쥐었기 때문이라 했다.
총을 머리에 대고 쏘았는지도 쟁점이었다. 자살자들이 흔히 하는 대로 총구를 머리에 밀착시키고 쏘면 화약이나 매연이 모두 머릿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총구멍 주위 바깥 피부는 깨끗하다. 최초 부검을 한 군의관은 ‘사입구 주변의 체표에서 화약 감입이나 매연 침착이 없는 사실’에 비추어 머리에 대고 쏜 것이라 하였고, 이는 자살의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최초 검시를 한 미군 군의관이 사입구를 깨끗이 닦아 냈는데 이 사실을 모르고 부검 소견을 낸 거였다. 애초 김 중위의 오른쪽 관자놀이 총알이 들어간 구멍 부근 바깥 피부는 시커멓게 화약 연기가 묻어 있었다. 이건 총구가 머리에서 떨어진 채로 발사되었다는 증거다.
총구를 머리에 대고 쏘지 않았다는 건 타살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노여수 박사는 ‘근접 혹은 원거리 발사처럼 머리에 대고 쏘지 않은 상태의 총상에서 자해에 의한 것은 매우 예외적’이라는 미국 법의학 교과서를 근거로 들었다.
권총을 다루는 게 직업인 육사 출신 중위가 자살을 하는데, 왼손으로 총구를 움켜쥐고, 오른손은 검지도 아니고 엄지손가락으로 방아쇠에 걸고, 총구는 머리에서 뗀 채로 총을 쏘았다?
제이에스에이(JSA) 241소초 김훈 중위 사망 현장 안에서 파손된 상태로 발견된 클레이모어 스위치 박스 덮개. 이에 대해 1·2심 재판부는 김훈 중위의 깨진 시계와 함께 ‘타살의 증거가 될 수도 있는 격투 반항의 흔적’이라고 평가했다. 김척 제공 |
총을 쏜 손에는 화약흔이 없고
권총에는 지문이 없었다
게다가 총구를 머리에서 뗀 체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다고?
한국군은 사건발생 5시간 뒤에야
겨우 10분 현장을 확인했고
그사이 미군은 현장을 훼손했다
만약 김 중위가 타살됐다면?
JSA 관리 미군 책임 불거졌을 것
미군 장교가 죽어도 이렇게 증거 훼손했을까
법의학적 소견은 내가 보기에 타살을 가리키고 있었고, 현장 상황도 그랬다.
적과 대치하는 최전방에는 ‘클레이모어’(Claymore)라는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 “누르고 던지고 쏴라.” 전방에서 근무했던 이들은 이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을 거다. 적이 가까이 나타나면 클레이모어 스위치를 누른다. 그러면 전기가 흘러 클레이모어가 터지고 그 안에 있던 작은 쇠 구슬들이 수도 없이 날아가 정면에 있는 건 남아나질 않는다. 그다음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쏴라. 제이에스에이(JSA) 241소초에도 클레이모어가 6개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초 현장 사진을 보면 6개 중 2개의 스위치 덮개가 파손되어 떨어져 있거나 변형되어 있었다. 특조단장은 국회에서 당일 “많은 사람들이 수사를 하면서 거기에 왔다 갔다 하면서 경황 중에 그것이 하나 떨어지지 않았겠느냐”고 답변했다. 하지만 이 사진은 미군이 사건 직후에 찍은 것으로 그때는 수사관들이 오기도 전이었다. 국회의원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질책을 하자 국방부 장관은 다시 그건 관리 소홀 탓이고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241소초는 매일 아침 해 뜨기 직전과 저녁 해 진 직후 두차례 전원 투입근무를 하면서 그때마다 클레이모어 스위치를 점검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과였다. 더구나 사건 당일에는 미군 주요 인사가 방문하게 되어 있어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대기 상태였다. 다음날에는 다른 소대에 소초를 인계하게 되어 있었다. 국회 국방위 하경근 의원은 보고서에서 이 스위치 박스들이 파손, 변형된 것으로 보아 ‘파손된 지점에서 몸싸움이 있었던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망 당시 김 중위가 차고 있던 시계가 파손된 것도 문제였다. 시계 유리는 9시 부분이 6밀리×4밀리 크기로 울퉁불퉁한 물체에 의해 파손되어 있었다. 역시 몸싸움을 추정케 하는 정황이었다.
국방부 특조단은 이 수많은 반대 정황들을 뒤로한 채, 1999년 4월 김 중위가 자살한 거라며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해 12월, 김 중위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은 천주교 인권위 변호사들의 도움을 받아 군 수사기관의 수사 잘못을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재판 1, 2심은 클레이모어 스위치 박스 덮개가 깨어져 떨어지고, 시계가 파손된 정황들을 ‘격투 반항의 흔적으로서 타살의 증거가 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법원은 군 수사기관의 잘못을 여럿 지적했다.
우선 미군이 출입을 통제해서 한국군 헌병 수사관은 사건 발생 후 무려 5시간이 지나서야, 그것도 겨우 10분 정도 현장을 확인하는 데 그쳤다. 미군 측은 김 중위가 죽은 당일 저녁, 벙커 내 핏자국들을 모두 물로 지우고 다음날은 아예 내부 전체를 페인트로 다시 칠해 버렸다. 미군 장교가 죽었어도 이렇게 현장을 마구 훼손했을까. 그들은 수거해 간 권총, 탄피, 옷 등을 한국군 헌병대에 넘기는 것도 거부했다. 항소심 법원은 “이같은 제이에스에이 내에서의 사건, 사고 조사에 관하여 사전에 적절한 한·미 공조 수사체계를 구축하지 아니한 것은 잘못”이라고 판단했다. 3성 장군인 김 중위 아버지도 미군 앞에서는 극도의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썼다.
‘대한민국 국방부는 단 한번의 항의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미군에 대한 자주국가 한국 국방부의 현주소였습니다…아버지인 내가 현장 검증에 가는 것을 거부하는 미군들의 점령군 식 태도는 잘못된 것이니 시정해 달라고 수십번 요청해도 못 들은 체하고 넘어가는 행태를 보면서 도대체 김훈 중위는 무엇을 위해 충성했으며 그의 조국은 어디였는지 묻고 싶었습니다…국가의 주권과 군사주권은 무엇인가.’
둘째로, 법원이 수사상 잘못이라고 지적한 부분. 소대원들에 대한 알리바이를 조사하면서 서로 의논해서 시간대가 대략적으로 일치하게 되도록 하였다. 개별신문은 사건 7개월 뒤 육군본부 검찰관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선임하사와 소대원들에 대한 뇌관화약 반응 검사도 전혀 실시하지 않았다.
고 김훈 중위. 화장되었으나 14년째 그의 유골은 군 보급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
상황일지는 왜 유독 그날치만 사라졌나
셋째로, 소대 선임하사는 알리바이로 자신이 사건 시각 무렵 업무보고 문서를 작성하려고 컴퓨터 작업 중이었다는 건데, 그 컴퓨터는 사건 6개월 뒤 용산에서 그가 하드디스크를 포맷하여 작업 내용 확인이 불가능해진 이후에야 비로소 압수를 했다.
넷째로, 진상 파악에 제일 기초가 되는 소대 상황일지가 사라졌다. 대대 상황일지도 유독 2월24일 당일 치만 사라졌다. 수사당국은 이걸 무어라 해명할 건가.
법원은 군 수사기관이 수사를 소홀히 하였음을 하나하나 밝히면서도 정작 김훈 중위의 자·타살 여부에 대해서는, 이런 수사기관의 잘못으로 ‘사건의 실체를 불분명하게 만들었다’고 결론지었다. 그렇겠지. 법원은 누가 어떻게 죽였는지를 명확히 입증하지 못하는 한 타살이라 판결할 수는 없는 처지다. ‘누가 어떻게’를 밝히는 게 어려워지긴 했지만 최소한 자살이 아니라는 건 분명해 보이니 순직 처리가 마땅하다. 그게 이제 와 무슨 소용이겠는가마는….
돌이켜 생각해보면, 김훈 중위 사건이 미궁에 빠진 건 바로 제이에스에이에서 일어났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공동경비구역에서 선임하사가 인민군 장교와 돼지볶음에 인삼주를 마셨다. 소대장 중위가 죽었다. 제이에스에이 관리 미군 책임이 크다. 사건 수시간 만에 이미 자살 보도가 나갔다. 김 중위가 자살한 거라면 책임이 덜해진다. 한국군은 초동수사에서 배제되어 손을 놓았다. 미 군의관은 총알구멍 주위 매연을 닦아냈다. 미군 감정서에는 권총에 제대로 된 지문이 없단다. 정말 그랬을까….
스물다섯살 김훈 중위는 화장되었다. 그리고 14년째 땅에 묻히지 못한 채, 지금도 군 보급대 창고에 물건처럼 보관되어 있다. 그 창고엔 유족들이 내 아들, 동생이 왜 죽었는지를 납득할 수 없는 60여 젊은 죽음들도 같이 있다.
오늘 그 창고 앞에 영문도 모르는 병사 하나가 앉아 김훈 중위가 읽었다는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있을런가?
[ 김형태 변호사 비망록 ]
'뉴스자료, 기사 사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훈처,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국립묘지 안장거부 (0) | 2012.06.13 |
---|---|
내겐 잔인했던 검찰, '내곡동'엔 자상도 하지 (0) | 2012.06.12 |
'BBK 가짜편지' 수사, 은진수에서 꼬리 자르나 (0) | 2012.06.08 |
무너지는 캘리포니아 드림 (0) | 2012.06.08 |
기차는 6월에 떠나네 (0) | 2012.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