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자료, 기사 사진

“김현희 ‘미군폭약 사용’ 안기부 발표는 거짓말”

道雨 2012. 7. 23. 14:56

 

 

 

  “김현희 ‘미군폭약 사용’ 안기부 발표는 거짓말”
[기획연재-4]  ‘KAL858기 공소장’은 전두환-노태우 황제에게 바쳐진 ‘월계관’
신성국 | 2012-07-20 18:57:31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로마제국의 네로 황제 시기에 수도 로마에서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1세기경 로마의 인구는 거의100만에 육박했으며 주거 형태는 보통 5층 정도의 높이로 된 주상복합형 건물들이었다. 목조 건물과 화덕, 좁은 골목과 부족한 물, 굴뚝 역할을 담당하는 중앙 계단, 다시 말해 로마는 화재에 지극히 취약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 64년에 일어난 9일간의 화재는 수도 로마에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14개 구역 중 10개 구역이 화염에 휩싸였으며 수십만의 이재민이 생겼다. 제국 정부는 이재민의 수용 시설을 대폭 늘리고 식료품을 공급했지만 인간적인 어떤 노력도, 황제의 어떤 하사품도, 어떤 속죄의 제사도 화재가 네로 황제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소문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타키투수, <연대기>15,44)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황제는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고, 곧 이어 적당한 자들을 선택하였다. 이 소문을 종식시키기 위해 네로는 반종교적인 성향으로 미움받던 이들을 기술적으로 고문하라고 명령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두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네로 황제는 로마 대화재의 원인과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고,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박해를 가하여 수천 명에 달하던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당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박해의 불길은 313년 밀라노 칙령이 내려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 전까지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박태식 저, <일세기 교회>, 생활성서사, pp64-69)

서기 1세기 로마제국, 네로 황제의 통치 수법은 시공을 초월하여 5공의 전두환 황제에게 그대로 계승되었다. 황제 전두환은 재임기간 중 수월한 통치 수단을 위해 희생양 사냥에 나섰고 수많은 희생양을 처형시켰다. 

1980
 5월의 광주 시민 대학살 사건, 서울이 온통 떠내려간다고 난리를 피웠던 금강산댐 대국민 사기’,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안기부에 의해 조작된 수지 김 사건’,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 등 모든 사기사건들은 네로 황제의 시기에 발생한 사건들에 버금갈 정도였다. 

5
공의 조작사건들은 모두 누가 한 짓이고, 또 어디서 조사했는가? 그때 언론은 뭘했는가? 

이런 맥락으로 KAL858기 사건의 경위와 배경(Context)을 이해하고 진실을 추적하면 옥석을 가릴 수가 있다.

KAL858기 사건의 검찰 공소장을 철저히 해부하는 작업도 진상규명을 위한 중요한 과정 중 하나이다.

당시 이상형 주임 검사팀이 언론에 공개한 김현희에 대한 공소장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공소장은 북한의 공작이라는 정부측의 주요근거로 활용되었다.

 

1) 김현희 아버지는 앙골라 주재 북한 대사관 외교관 수산대표 김원석 
2) 
김정일의 친필 지령에 의해 범행
3) 
남북조절위원회 참석 장기영 대표에게 꽃을 준 화동이 김현희
4) 콤퍼지션 4 시한 폭탄과 액체 폭약을 장치하여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폭파

 

그런데 이 내용들은 KAL858기 가족회 집행부가 25년간 공소장 내용에 대하여 사실을 확인한 결과 모두 거짓임이 밝혀졌다. 

▲ 1972년 11월 2일 남북조절위원회 2차 회담 때 김현희(화살표)가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주었다고 했으나 이 역시 거짓으로 밝혀졌다

 

 

첫째, 앙골라 주재 북한 대사관 수산 대표로 있었다는 김원석의 문제는, 1987 12월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이미 가짜로 확인되었다.

 

2001 12 8일 국정원 고위 간부와 KAL858기 집행부가 서울의 한 커피숍에서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날 면담에 참석했던 차옥정 가족회 회장은 국정원 간부의 말을 빌어 그런 사람이 없다고 진술을 받아냈다(출처 : 이승후 기자, 오마이뉴스 인터뷰, 2003.10.08)

2005 9월에 국정원도 김원석 경력에 대하여 당시 확인하지 못했음을 공개적으로 시인하였다.

 

둘째, 김정일 친필 지령 문제에 대하여,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 초기 주도적 멤버였던 현준희(감사원 전 직원)씨는 <인물과 사상 2002 2월호>에서, 당시 안기부 수사관은  친필지령은 없다고 기자회견에서 분명히 밝혔다”. 

김정일 친필 지령의 존재는 거짓으로 밝혀진 것이다.

 

또한 1988년 안기부는 김현희와 김승일이 KAL858기 폭파 공작 수행을 위하여 김정일에게 바친 충성 맹세문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2001 12 8일 국정원 간부는 KAL집행부와의 면담에서 충성 맹세문은 없다고 분명히 얘기 했다. (오마이뉴스 인터뷰. 이승후 기자의 차옥정 인터뷰 기사)

 

셋째, 1972 11 2, 남북조절위원회 2차 회담시 김현희가 장기영에게 꽃다발을 주었다는 내용도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그 이유는 안기부가 제시한 행사장 사진의 주인공은 김현희가 아니라 북한의 정희선으로 확인되었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여학생의 귀모양은 둥근 복귀를 가진 정희선의 귀와 같았고, 삼각형 칼귀를 가진 김현희와 귀와 다름이 밝혀졌다.

김현희는 2008년에 와서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였다. 장기영이 아닌 이동복(북한 민주화 포럼 상임 대표, 전 안기부 특별보좌관)에게 꽃다발을 주었다고 말을 바꾸었고, 이동복은 김현희와 맞장구를 치면서 자신이 받았다고 하였다. 

안기부 수사 발표 당시 제시된 김현희 화동 사진 및 일본 사진 잡지 <그라프 곤니치와>에 게재된 사진은 모두 김현희와 관계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넷째, 컴퍼지션 4(C-4)와 액체 폭약을 장치하여 항공기를 폭파한 문제는 실체가 입증되지 않은 폭발물로 밝혀졌다. 

 

김현희의 진술문과 수기에서 단 한번도 구체적인 폭약 이름을 진술한 적이 없다. 김현희의 폭약 진술은 한결같다.

라디오 폭탄과 약주병으로 위장한 액체 폭발물을 소지하고 항공기에 탑승했다”. 

김현희는 7 8개월간 간첩, 군사훈련, 사격술, 간첩 통신교육을 받고, 3 4개월간 폭파훈련, 언어교육 등 철두철미한 공작 교육을 받은 정예공작원으로 안기부는 발표하였다. 

궁금한 부분은 대남공작과 KAL858기 폭파 테러를 위해 특수 훈련을 받았다는 테러 공작원이 자신이 설치한 폭약이름도 몰라 라디오 폭탄, 약주병을 위장한 액체 폭발물이라는 군사용어도 아니고 폭약 용어도 아닌 애매모호한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니 신뢰를 줄 수가 없다.

 

1988 1 15일 안기부는KAL858기 폭파에 사용된 C-4 PLX 폭발물이 마치 김현희 진술에 의한 폭약 종류와 양인 것처럼 발표하면서 국민들을 감쪽같이 속였다.

안기부 수사 발표 당시, 임의 추정한 것임을 숨긴 채 마치 입증된 듯이 요란하게 발표함

 

 

= 안기부 수사결과 자료(1988년 1월 15일)

 

o. 콤퍼지션 C4
- 라디오의 기능을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여백에 폭약 350g 장약

 

o. P.L.X(Picatinny Liquid Explosive) 액체폭약
- 700cc를 술병에 술로 위장, 동시 장치

 

 

1988.1.15 수사 발표시 제시되었던 콤퍼지션 C4, 350g과 액체 폭약 PLX700cc’라는 폭약의 이름과 양은,폭탄을 라디오 약주병을 위장했다는 김현희의 진술을 근거로 당시 안기부가 임의로 추정한 것임을 확인하였음.

액체 폭약으로 사용됐다는 약주병 혹은 물약병의 반입에 대해서는 김현희 진술만 있을 뿐 이를 확인해 주는 문건은 없음. 

(국정원 종합 보고서, 2007)

 


그러나 KAL858기 가족회가 2007년에 입수한 안기부, 검찰수사 기록물을 조사, 분석한 결과, 폭약의 이름과 양은 모두 안기부가 만든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김현희가 폭약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니, 폭약 전문 경찰 김문호에게 자문을 구하여, 임의 추정한 폭발물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1987년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가 당선된 후 김현희(가운데)가 노 후보 특보실에서 함께 찍은 사진(1988. 2. 5). 김현희(가운데) 왼쪽은 강재섭(당시 담당검사), 오른쪽은 박철언 전 장관 (출처:박철언 회고록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 제1권)


 

특수 대남공작원 김현희의 체면이 완전히 구겨지는 대목이다. 

더구나 PLX 액체 폭약은 Picatinny Liquid Explosive의 약자로서 미국 뉴저지 육군성 산하 폭약연구소에서 생산되는 폭발물이다. 

이 액체 폭약은 미국이 엄격하게 관리하기 때문에 북한 유입은 불가능한 폭약이며, 특히 미국의 적성국 또는 테러 지원국가여서 미국제 폭발물이 반입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북한공작원들이 미국 군사용 폭약을 입수하여 KAL858기 폭파 테러용으로 사용했다는 안기부 발표는 황당함 그 자체이며, 대국민 사기임이 드러났다. 

국정원도 뭔가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20년 전의 안기부 발표를 번복하며 말을 바꾸었으니, 국민들의 불신만 당한 꼴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이상형 주임 검사팀의 공소장 4가지 주요내용은 모두 허위사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KAL858기의 안기부 수사팀과 검찰팀들의 주역들 즉 정형근, 박철언, 강재섭은 5, 6공의 충복들이었고, 박철언과 강재섭은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 월계수회의 핵심멤버였다. 

그들이 만든 KAL858기 공소장은 오직 전두환과 노태우 황제에게 바쳐진 최고의 월계관이었다.

 

25년의 숨겨진 거짓이 하나하나 드러나면서 판도라 상자는 서서히 열리고 있다.

 

 

*************************************************************************************************

 

 

    앞에선 북한규탄 데모, 뒤로는 비밀접촉
[기획연재-6] 박철언이 회고록에서 ‘KAL858기 폭파사건‘을 쏙 뺀 이유는?
신성국 | 2012-07-26 10:15:1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KAL858기 사건 진상규명의 중대한 분수령(Turning Point)이 된 시기는 2007 10월이다. 2002 3월에 KAL858기 가족회는 서울지방검찰청을 상대로 수사와 재판 기록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하였다. 2007 10, 6년간의 소송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하여 수사 기록 및 재판 기록 등의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은 정보 공개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 판결로 사건 발생 20년 만에 비로소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 등을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수사 기록을 수령한 뒤 가족회 조사 팀장을 비롯한 조사위원들은 2년여 동안 기록들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2010년에 <KAL858기 사건 종합 분석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나는 이 분석 보고서를 읽을 때마다 수사 기록으로 위장된 김현희 신화(myth)’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이 김현희라는 여신’을 창조했고 군부정권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했던 흔적을 엿보게 되고 수사기록보다는 김현희 신화를 작성했다는 감이 들었다. 검찰이 왜 수사기록 공개를 기피하고 시간을 끌며 항소를 했을까? 헤아릴 수 없는 거짓들, 대한민국 최고의 정보기관(안기부)과 수사기관(검찰)이 이토록 서툴고 허술하게 수사를 했나 할 정도의 부실한 내용과 오류들, 김현희의 번복되고 틀린 진술들이 부지기수다.

수사기록을 검토하며 검찰과 국정원이 정보공개의 완강한 거부와 두려움을 갖게 된 이유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안기부의 수사 발표문은 종교적 신조(Creed)처럼 국민들 머리 속에 깊숙이 세뇌시켜 놓았다. 그러나 이제는 거짓으로 쌓아올린 김현희의 바벨탑이 무너지게 되었다. KAL858기 가족회는 그 증거들을 하나하나 언론매체를 통해 공개하며 국민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릴 것이다.

수천년 전에는 그 유명한 그리스-로마 신화가 있었다면 21세기 한국에는 전두환과 노태우의 김현희 신화라는 작품이 있다. 고대 제국의 황제들은 강력한 통치 지배 수단으로 언제나 신화(myth)를 창조하고 활용하였다. 하느님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지만, 황제들은 신화를 통해 자기 메시지를 전하였다. 

성서 안에는 가나안 신화와 이집트 신화, 바빌론 신화를 소개하며 우상신들과 맞서 싸우는 예언자들을 이야기를 전해준다. 신화는 대부분 강력한 제국들 안에서 발견되며, 백성들에게 절대적 신조처럼 받들어진다. 신화는 지배자인 황제만이 신의 형상(Image)을 지니며 신의 아들(바알)로서 존엄할 뿐,모든 백성은 황제를 위해 절대적 순명과 굴종으로 살아가는 노예적 존재라고 가르친다.

신화의 제국은 계급사회를 지향하며, 억압체제를 구축하며, 이집트 파라오의 신은 노예제도를 축복하였다. 성서를 읽는 궁극 목적은 신화의 제국과 억압체제에 맞서 투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본받기 위함이며, 지금 여기서 그렇게 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다. 

우리나라에는 이승만과 박정희의 신화, 새누리당은 박근혜 신화를 꿈꾸고 있다. 5공 정권 말기에 전두환은 자신의 미래를 보장해줄 강력한 수호신이 필요했으며 수호신의 이야기를 담은 신화도 필요했다. KAL858기 수사기록이라는 명분하에 씌여진 김현희 이야기의 행간마다 전두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어져 있다. 

모든 신화는 인간들이 꾸며낸 신들의 이야기이다. 십계명 중 첫번째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계명으로, 인간이 만든 우상들과 신화를 거부하라 하느님의 절대적 명령이다. 우리는 이를 반드시 받들고 실행해야 한다. 김현희 신화의 허상을 깨는 작업이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의 진실한 하느님 예배이다.

김현희 신화를 만들어낸 인물들의 행적 안에서 숱한 허구로 가득차 있다. 'KAL858기 폭파사건' 수사 발표 이후 안기부가 보여준 갈지자 행보는 우리를 분노케 하고 있다. 이 사건의 수사와 김현희 관련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6공의 황태자 박철언(당시 안기부장 특보)을 꼽을 수 있다. 

▲ 정부는 북한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려 외교.경제제재를 도모했다. (경향신문, 1988. 1. 16)

전두환 정권은 사건 발생 후부터 북한 테러로 규정짓고 전국 시.군 지역의 공설운동장에 군중들을 동원하여 북괴 김정일 테러 만행 규탄대회를 개최하였다. 안기부는1988 1 15 김정일이 김현희에게 친필지령을 내려 KAL858기를 폭파했다고 수사발표하고 국민들에게 김정일의 천인공노할 범죄행위를 각인시켰다. 

북한의 테러 만행을 증언하도록 김현희에게 대통령 특별사면을 단행하여 살아남게 만들어주었다. 안기부 직원이며 반공강사인 김현희는 전국을 돌며 7년 동안 반공강연 활동에 매진하였다. 안기부의 여신 김현희의 메시지로 인해 전두환, 노태우 체제와 이념은 견고하게 자리잡았다.

KAL858기 폭파사건을 이용하여 대북 규탄에 여념이 없었던 그 시기에 안기부의 수뇌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들은 국민들 몰래 북한을 방문하며 밀사 활동을 하고 다녔다. 박철언은 무려 42회 정도 북한 인사들과 회동을 가졌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당시 이 사건 관련하여 안기부장 특보로 핵심 지위에 있었던 박철언에 대하여 한 논객이 남긴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KAL858기 사건 당시 안기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있었던 박철언은 2005년 여름에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2005.8.10. 랜덤하우스 중앙)을 출간했다. 박철언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만 20차례 방문한 밀사 중의 밀사였다. 그는 안기부 특보로 발령받은 뒤 1985 7월부터 시작하여 북한 수석 대표인 한시해와 첫 만남을 갖고, 이후 노태우 임기 후반까지 6년 동안 남북 수석대표로 북측과 42차례 회담을 했다.박철언은 회고록에서 한 시대의 한 쪽의 사초를 남기고자  진실된 기록을 위하여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20여권의 업무 다이어리와 120여권의 수첩을 기초로 반드시 기록해야 할 부분은 반드시 썼고, 일상적이고 군더더기 같은 이야기들은 확실하게 빼버렸다고 밝히고 있다. 

그의 회고록에는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의 출범부터 2003년 국민의 정부시절까지 격동의 현대사20여년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사실들이 많은 사진자료와 함께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그러나 그의 회고록에는 이상하게도 대선 직전에 발생한 KAL858기 사건에 대한 회고 내용이 쏙 빠져있다. 이해하기 어려운 난감한 사초이다. 의심스런 진실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권력의 심장부에서 그것도 무소불위의 안기부 특보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전략을 수립하여 권력을 보위했던 그가 김현희의 KAL8585기 사건에 대한 증언을 그냥 지나치다니 예사롭지가 않다
. 

▲ 박철언 씨 회고록
이 회고록에서 주목할 대목은 박철언의 KAL858기 사건 관련 내용이다.그에게 이 사건은 별 볼일 없고 대수롭지 않게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이다. 5, 6공 시절 가장 큰 항공기 테러사건이며 안기부의 주도하에 수사한 중대한 사건이었는데 이 사건이 박철언 회고록에서는 배제되었다니 기가막힐 노릇이다. 

또한 노태우 정권시기에 서동권 안기부장도 1990 10월에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를 접촉하였다. 서동권 안기부도 김정일과의 회동에서 이 사건에 대한 어떤 거론도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안기부 수뇌부는 KAL858기 사건 발생 시기인 1987 11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방북한 적이 있다. 1988 2월초, 1988 121, 1989 83, 1990 10월 등 북한 인사들과 회담을 가졌다. 

참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북한과 직접 관련되었다고 국민들에게 발표했던 안기부가 북측과의 회담에서 한 차례의 공식 논의를 하지 않았다니 놀랍기만 하다. 안기부는 양지에선 북한을 규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음지에선 방북 밀사가 되어 북한 고위급들과 은밀한 만남을 가지면서도KAL858기 사건에 대하여 언급조차 하지 않았음은 국민들을 기만하고 우롱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 자체로 안기부(국정원)는 국민들의 불신과 원성을 살 수 밖에 없다.

안기부는 1990 4 12일 김현희에 대한 대통령 특별사면 당시 피해자 가족들 대부분이 사면을 반대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강행하여 가족들 마음에 큰 상처를 안겨준 적이 있었다. 피해자 가족들이 안기부로부터 받은 배신과 상처는 아물 수가 없다. 사건 발생 후 안기부 수뇌부가 국민들의 신뢰를 받을 정도로 올바로 처신하고, 수차례의 방북 중에 이 시건을 말끔하게 매듭지었다면 더 이상 이 사건은 거론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 필자 신성국 신부
국가 테러와 안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으로서 피해자들과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최선의 역할을 다 했다면 이 사건은 오늘날 국민적 불신과 갈등의 대상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이런 노력들을 소홀히 했으며 이중적이고 무책임 행동으로 불신과 지탄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특히 북한을 상대로한 이중플레이로 인해 안기부 수사 발표는 의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만 것이다. 

국민들을 기만하고 우롱한 국정원(안기부)은 대국민 사죄를 해야 한다. 또한 김현희는 지난 715일까지 어머니들이 공개 토론회를 요청하였지만 끝내 거부하였다. 김현희는 무엇이 두려워 토론회를 거부하고 회피하는가? 전두환의 작품 '김현희 신화'는 바벨탑처럼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진실의 빛은 반드시 어둠을 이기고 마는 법이다.

 

 

***********************************************************************************************

 

 

안기부는 ‘폭파사고’, 교통부는 ‘추락’, 진실은?
[기획연재-8] KAL이 로이드 보험사에 여태 보험금 청구를 하지 않는 까닭은?
신성국 | 2012-07-31 14:16:54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세계 역사상 항공기사고 조사를 교통부가 아닌 외무부 주도로 하는 나라는 오직 1987년의 대한민국뿐이었다. 국제 항공 사고 역사상 사고 다음 날 사고 원인과 결과를 정부 관계자가 아닌 민간 항공사(대한항공) 회장과 사장이 언론에 발표하는 나라도 오직 1987년의 대한민국뿐이었다. 

1987 11 29 KAL858 사고가 발생한 그 다음날인 11 30일, 당시 대한항공 조중훈 회장은 폭탄 테러, 조중건 사장은 폭발 추정으로 사고 소식을 언론을 통해 발표했다. 이들이 발언한 시점은 정부 사고합동조사단이 사고 지역도 모르는 상황이었고, 정부 조사단은 사고 지역이 육지인지, 해상인지도 알지 못하여 태국의 밀림 지대를 수색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조사단은 12 9일까지 수색 열흘이 지나도록 여객기의 동체, 잔해와 시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아무 소득도 없이 철수하였다. 사고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검증, 블랙박스의 회수와 교신 기록 확인 등의 엄격한 절차와 분석 후에 사고 원인과 결과를 발표를 하는 것이 항공기 사고 조사의 일반 규범(Criterion)이고 원칙이다. 

▲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
그런데 대한항공 사장단은 아무런 물증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미얀마(버마) 랑군 공항에 도착한 뒤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폭탄 테러”, “폭발 추정로 발표하였다니 이런 몰상식이 어디 있는가? 자신들이 운영하는 항공사 소속의 승무원과 탑승객들에 대한 존중과 예우 차원에서라도 언행에 신중을 기해야 할 사장단들이 불행하고 비극적인 참사에 대하여 사실 확인과 증거도 없이 무책임한 언행을 일삼았으니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이 사고와 관련하여 대한항공은 법적으로 책임을 진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법적, 도덕적으로 무한책임을 져야할 사고 민항사(KAL) 대표들이 근거도 없는 말을 함부로 하고, 부적절한 처신을 하였으니 그들의 인격이 의심스럽기만 하다. 일례로 미국의 Pan-Am사와 비교해보더라도, 세계 최고의 항공사이자 미국의 상징으로 군림하였으나 1988 12 1일에 발생한 Pan -Am 103편 테러폭파 사건으로 이 회사는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전에도 종종 악재는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Pan-Am 폭파 사건으로 인해 1991년에 회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Pan -Am 103편 탑승객 가족들은 항공사를 상대로 보안문제의 책임을 물었고, 팬암사는 사고의 책임과 경영 악화로 인해 결국 파산하였다. 항공사가 항공 보안을 허술하게 하여 테러범들이 탑승을 했고, 그래서 수많은 탑승객의 인명이 희생되었다면 누가 그 항공사를 믿고 이용하겠는가? 

그러나 대한항공은 항공 보안에 대한 책임도 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영국 로이드 재보험사에 보험 청구조차 하지 않았다. KAL기 가족회는 2005년경에 대한항공 측에 질의서를 보내 보험청구에 대한 정보공개를 요청하였지만 7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런 회신이 없음을 볼 때 대한항공은 영국 로이드 재보험회사에 보험청구를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1983 9 1일에 소련 요격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한 KAL007편 사고의 피해자 가족들에게 대한항공은 보험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대한항공이 KAL858기 사건에 대해서는 보험금 청구를 하지 않았음은 KAL007편 사고와의 형평성과도 맞지 않는 태도였다. 지구상에서 사고를 당한 항공사가 사고 보험금을 청구하지 않는 항공사는 대한항공의 KAL858기 사고뿐이다. 

보험청구 회피 이유에 대하여 가족들과 보험 전문가들은 영국 국제로이드보험사는 한국 정부의 사고 조사와 달리 KAL기 사고에 대한 철저하고 객관적으로 실사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두환 정권의 사고 조사와 다른 결론이 나올 것으로 보고 보험 청구를 의도적으로 회피했다는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책임은 또 있다. 대한항공은 미얀마 랑군 공항으로부터 관제탑 교신기록을 인수받고 보관하다가 폐기해버렸다. 조중훈 회장측은 KAL858기 조종실과 랑군 관제탑과의 35분간의 Radio Contact녹음 테이프를 입수하였지만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가 유실, 폐기하였다. 

2007
년 국정원 종합보고서에 의하면, 대한항공은 교신기록 내용을 분석하였으나 특별한 내용이 없어 소홀하게 취급하였고, 현재 보관하고 있지 않은 것을 판단됨이라고 보고하였다. 지상 관제탑과의 교신기록은 매우 중요한 기록장치이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물증을 보존하지 않고 폐기하였다는 것은 어떤 변명을 해도 결국 무언가를 은폐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대한항공 사장단의 발언과 행보에 대하여 재차 묻고자 한다. 대테러와 대공분야 전담 기관인 안기부보다 먼저 테러로 확신한 근거는 무엇인가? 민간항공사가 항공사고 조사 국가기관인 교통부보다 먼저 폭발에 의한 사고라고 발표한 근거는 무엇인가? 물증도 없이 그토록 서둘러서 비정상적인 형태로 발표한 이유는 무엇인가? 

대형참사를 입은 민간항공사의 책임자라면 정부측에 사고조사를 철저히 해달라고 요구하고, 정부가 조사에 만전을 기하여 국민적 의혹을 해소시키는데 협조해야 함이 올바른 태도이다. 그런데 항공사 대표들이 이런 기본을 망각하고 정부측의 조사가 들어가기도 전에 유언비어식의 망발을 해대면서 국민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었다니 통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항공 사장단의 초기 발언들은 사전에 이미 짜여진 시나리오처럼 모종의 의도를 보여주며 다양한 방법에 의한 부풀리기의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다. 시간적 순서를 배열해보면 대한항공 사장들의 테러 발표(11 30) -> 청와대 전두환의 북한 소행”(122) -> 외무부, 문공부 장관들의 북한 범죄”(12 2) -> 다음으로 조선일보의 공중 폭발”, 경향신문의 북괴지령 폭탄 테러”(12 2) ->안기부 수사발표 북한에 의한 테러 폭발”(1988 1 15)로 이어졌다.

사고 발생 직후에 나온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의 발언을 시발점으로 대통령, 정부부처 장관, 언론사들,수사기관으로 이어지는 일정한 '흐름'은 갈수록 확대 재생산되면서 마침내 안기부의 수사발표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 사건 개요: 
지난해 11 29일 오후 2 5분쯤 버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공중 폭발하여 1 15명의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킨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은 수사 결과 북괴 김정일의 지령에 의해 자행된 가공할 만행임이 밝혀졌다
. (1988 1 15, 안기부)

KAL858기 사건의 '흐름'은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이며, 언론을 주무기로 삼아 과대 포장하며 국민들을 세뇌시키는 양상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25년이 지난 현재는 그들의 의도와 거짓이 들통났고 긴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그들은 전두환 정권 때처럼 수구언론들을 동원하여 사건 은폐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거짓의 둑은 이미 금이 간 상태로 무너져 내리고 있다. 

25
년전 안기부는 KAL858기가 '폭발물에 의한 공중폭파'라고 발표하고 국민들 뇌리 속에 굳혀 놓았다.그러나 이는 모두 거짓으로 밝혀졌다. 사고 발생 2 4개월 후인 1990 3 13일 안다마 해역에서 사고기 동체 파편 61점이 발견되어 안기부는 수거한 동체 잔해들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 의뢰하였다. 안기부가 국과수에 의뢰한 내용은 기체 잔해의 폭파 감정이었다. 

▲ KAL858기 잔해 발견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1987. 11. 30)

안기부는 언론을 통해 88올림픽 마크가 새겨진 대한항공 동체 잔해들 발견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수사의 정확성과 정당성을 입증하는 증거물처럼 요란을 떨었다. 국과수는 안기부가 의뢰한 잔해들을 한 달여에 걸쳐 감정하여 그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였다. 국과수의 감정결과보고서는 61점의 모든 잔해에서 폭파 흔적이 없음 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안기부의 '폭파에 의한 테러사건'이라는 절대적 명제는 2 5개월 후 국과수의 감정 결과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전두환 정권은 국민들을 철저하게 거짓으로 농락하고 기만하였다. 안기부는 국과수의 결과 보고서를 언론에 일체 공개하지 않았고, 이 사실이 알려지게 된 시기는 사건 발생 17년 후인 2004 524~25일 'KBS 스페셜'에 의해 처음 밝혀지게 되었다. 국민들에게는 언론을 통해 KAL858기는 북한 테러범에 의한 폭파사고라고 엄청난 선전을 해댔는데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에서 폭파 흔적 없음으로 나왔으니 국민들과 피해자 가족들의 안기부에 대한 불신과 비난, 진상규명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안기부가 국과수의 감정결과를 숨긴 일도 비난받을 일이지만, 또한 증거물인 기체 잔해들을 회수하지 않았은 것도 직무유기이다. 국과수가 자체 판단에 의해 고물상을 통해 폐기하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안기부가 그토록 자랑했던 기체 잔해들은 고물상의 폐기처분장으로 묻혀지고 말았다. 

더욱 기가막힌 사실 한 가지를 소개하겠다. 안기부는 공식 수사발표를 통해 폭파 사고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안기부 발표와 달리 당시 교통부장관은 추락 사고로 지시를 내렸다. 피해자 가족들의 호적등본 기재 내용을 보자 버마국 벵갈만 해역에서 대한항공 소속 KAL858편 여객기 추락사고로 사망(교통부 장관 보고)’ 희생자들의 호적등본은 사망 신고 전에는 모두 실종자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안기부가 수사발표를 한 뒤 1988 1월 중순에 교통부장관 명의로 '일괄 사망처리'를 단행한 것이다. 실종자에 대한 사망 처리의 행정절차는 실종 유예기간(항공, 선박 사고는 1년 이상)을 거친 후에 가족들의 결정에 따라 동사무소에서 사망신고를 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가족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사고 한 달 반만에 교통부에서 몰래 일괄적으로 다 처리해버렸다. 피해자들의 사정은 눈꼽만치도 배려하지 않은 잔인하고 반인륜 범죄정권이었다. 대테러 담당기관인 안기부는 폭파사고로 발표하고, 항공기 사고 주무 부서인 교통부는 추락 사고로 지침을 내렸으니, 전두환 안기부가 발표한 KAL858기 사건은 끝모를 거짓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 셈이 되었다.(전두환 정권 안기부 발표 1988 1 15, 노태우 대통령 취임식 1988 2 25)


 

******************************************************************************************************

 

 

      ‘김현희 꽃다발’ 주인공, 25년만에 왜 바뀌었나
[기획연재-11] 삼풍백화점 참사와 KAL858기 사고가 서로 닮은 꼴인 이유
신성국 | 2012-08-09 10:10:15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995 6 29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이 붕괴됐다.이 사고로 508명이 사망했고, 947명이 부상을 입어 총 1,44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단군 이래 최악의 참사로 꼽힌다. 사고 수습기간 내내 국민들은 TV를 지켜보며 간절한 심정으로 무너진 건물더미 속에 묻힌 실종자들의 생환을 학수고대한 경험이 있다. 사고 발생 후 사고원인을 조사한 결과 한 마디로 비리와 부패 종합판이었다. ‘인재(人災) 그 자체였다. 

주거용 부지를 뇌물을 받고 용도변경하여 상업용 부지로 변경해 건축을 하였고, 본래 대단지 종합상가로 설계된 것을 대형백화점으로 설계 변경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야말로 부실시공’, ‘졸속 건축’, ‘안전을 무시한 공사강행으로 이미 예견된 사고였다. 사고 1년 전인 1994년부터 건물에서 균열이 생기고 위험신호가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참사 2달 전부터 건물에는 붕괴조짐이 될 만한 균열들이 속속들이 발견되었다. 

 
사고 1달 전부터는 5층 바닥이 내려앉기 시작하고 건물 균열이 엄청나게 증가하여 심각한 위험 징후들이 나타났다. 6 29일 사고 당일 오전에는 5층에 있던 식당의 천장이 뒤틀리며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4~5층에서는 건물 붕괴의 요란한 진동과 굉음 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런 위급한 상황임에도 삼풍백화점 이준 회장은 사고 당일 경영진 임원들과의 긴급 대책 회의에서 큰 위험은 없으니 영업을 계속하면서 보수공사를 하자는 최종 결정을 내렸다. 

▲ 부실공사 졸속공사에서 비롯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현장의 처참함 모습(1995. 6. 29)

그리고 바로 그날 오후 5 57, 바닥의 가장 약한 기둥 2개가 무너지고, 그 기둥이 옥상까지 끌어당기면서 마침내 건물 붕괴가 시작되었다.  20초 만에 건물은 지하 4층까지 완전히 매몰되었으며, 안에 있던 1,500명의 사람들은 잔해 속에 묻히게 되었다. 붕괴된 직후의 참상은 너무도 참혹하여 국민 전체가 트라우마(정신적 쇼크) 상태로 빠질 정도로 심각하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이준 회장이 삼풍백화점을 짓기 시작한 시점은 1987년이었다. KAL 858기 사건 발생과 같은 해였다. 붕괴사고 이후 1980~9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에 대한 공포와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들에 대한 안전평가를 실시했고, 그 결과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였고, 나머지 14%의 대형 건축물은 개축의 필요와 80% 이상은 수리해야할 상태라는 평가 보고서가 나왔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 군사작전 하듯이 졸속으로 지은 대형 건축물 중98%가 부실한 건축물로 드러났다.

KAL858기 참사는 삼풍백화점 참사와 여러모로 매우 흡사하다. 우선 '용도변경'이 심했다. 안기부는테러 폭파사고로 발표하였지만 항공기 사고 조사 전담기관인 교통부는 실종자들의 호적등본에 추락사고로 명기하도록 지시를 내렸으니 사고 원인이 변경 되었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도대체 어느 기관의 말을 믿어야 하나? 안기부와 교통부는 왜 말이 다른가? 

안기부는 
폭파사고로 발표했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기체 잔해 감정을 통해 폭파 흔적 없음으로 결론을 내렸다. 안기부의 폭파사고 주장은 과학적 입증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이제 안기부 발표는 용도 폐기가 정답이다. ‘테러에 의한 폭파사고라고 안기부는 발표했지만 25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떤 폭발물인지 폭약의 이름조차 확실하지도 않다. 수사 발표에서는 '김승일과 김현희가 C-4 350g PLX 700cc KAL858기를 폭파시켰다'고 공식으로 발표하였다. 

그들이 설치한 이 폭발물의 위력은 여객기를 완전히 공중분해시킬 수 있다고 장황하게 발표했다. 그러나 안기부가 발표한 폭발물은 김현희가 진술한 것이 아니라 안기부가 임의 추정한 폭약이었다고 실토하였다. 더군다나 PLX폭약은 미 육군성에서 개발하고 미군사용 제품이기에 북한 테러범들의 손에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폭발물로서 안기부의 PLX 발표는 신뢰를 잃었다. 

안기부는 수사 발표 시 PLX에 대해 “PLX로 추정되는 액체 폭약은 안정성이 높고, 취급이 용이함, 담황색 술병에 술로 위장이 용이함, 테러용으로 통상 사용됨이라는 보충설명까지 덧붙였다. KAL기 사고를 테러 폭파사고로 발표한 안기부가 테러범들이 사용한 폭발물의 실제 이름조차 모르고 임의추정한 상황에서 폭파사고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군다나 범행을 자행했다는 테러범 김현희가 죽지 않고 버젓이 살아서 안기부와 검찰에서 1년 이상 조사를 받았는데도 어떻게 아직도 폭발물 이름을 대지 못하고 있는가? 7 8개월간 특수공작 테러훈련을 받고 KAL858기 사건에 투입되었다는 북한 정예 공작원 김현희, 자신이 직접 임무를 수행하여 테러(폭파)를 성공했음에도 어떤 폭발물인지 이름도 모르고 있다니 과연 이 여자가 북한 최고의 엘리트 출신 정예공작원이 맞는가?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결국 KAL858기를 폭파 사고로 발표한 안기부는 과학적 분석과 객관적 사실에 근거하여 '신뢰 제로(0)'판정을 받게 된 것이다.

 

정부 부서

근 거

결 과

안기부

C-4 PLX

(PLX는 미군 제품으로

북한 테러범의 사용 불가)

폭파 사고 (수사 발표)

교통부

실종자 호적등본 기록

추락 사고

(교통부 장관 보고)

국립과학 수사연구소

안기부가 제공한

기체 잔해 61

폭약 성분 감정 조사

61점 잔해

폭약 흔적 없음

김현희 진술

일본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에 시한 폭탄 장치.

액체 폭약은 약주병에 담았다.

폭약 이름 모른다.

나는 김승일의 보조원이었다.

 

 

KAL858기 사건이 폭파에 의한 사고라는 안기부 발표는 삼풍백화점처럼 순식간에 붕괴되어 버렸다. ‘부실시공 졸속공사 그리고 삼풍백화점 임원진의 비리와 안전 불감증, 이윤 추구만 일삼은 탐욕자들의 생명경시가 무려 1,500명의 엄청난 사상자를 발생하게 만든 원인이었듯 KAL858기 사건의 조사도 부실 그 자체였다. 

김현희의 말바꾸기, 무수하게 틀린 진술들, 단 하나의 물증도 없이 수사종결, 증거 잔해물 폐기는 삼풍 참사처럼 진실이 모두 무너진 수사였다. 전두환 정권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철저한 사고조사와 객관적 증거에 의한 물증 제시의 조사결과를 발표했다면 국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위 도표와 같이 정부 부처들간에도 엇갈린 조사결과가 나오고, 25년 동안 계속적으로 말을 바꾸는 안기부(국정원)를 어떻게 신뢰를 할 수 있겠는가? 

▲ 남측 대표단이 북한 여학생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있다. 첫번째는 이후락, 가운데가 장기영 대표

 

 

안기부와 김현희의 말바꾸기의 압권은 장기영과 이동복의 '꽃다발' 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안기부 수사 발표문에는 '김현희는 1972 11 2일 평양시 근교 헬리콥터장에서 제 2차 남북 조절위원회에 참석하러 온 한국측 대표단의 장기영씨에게 꽃다발을 전달하였다'고 나온다. 김현희가 중학교 1학년 시절 남측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헌화했다는 안기부의 수사발표가 25년 세월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자. 한 마디로 '황당'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출 처

김현희에게 꽃다발을 받은 남측 인물

비 고

안기부 수사기록

검찰 수사기록

장기영

남북 조절위 남측 대표

위키 백과 사전

이동복

남북 조절위 남측 대변인,

안기부 특보 출신,

현재 북한 민주화 포럼

상임대표

Naver 지식 사전

장기영

 

월간조선 1989 5월호

(조갑제 기자)

1989 6월호

장기영

 

월간조선 2008 2월호

(조갑제 기자)

2009 6월호

이동복

전 중앙정보부 특별 보좌관,

전 안기부 특별 보좌관,

북한 민주화 포럼 상임대표

김현희

장기영

1988년 진술

(수사기록 3,489)

김현희

이동복

2008, 2011

이동복에게 보낸 편지

이동복

이동복

1994 5 5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200811 25

조선닷컴 블로그

국정원

2003

이동복

주간동아 413호 기사

이정훈 기자

2003 12 11

 

 

25년전 안기부는 장기영이 김현희에게서 꽃다발을 받았다고 발표해놓고 지금와서는 이동복이라고 바꾸었다. 어처구니가 없다. 안기부, 조갑제, 김현희는 십수년간 장기영이라고 확신하며 주장하다가 어느 시점부터 슬그머니 이동복으로 변경하였다. 여기에 이동복과 국정원까지 합세하여 이동복이 맞다고 동조하고 나섰다차마 보기에 민망할 지경이다김현희와 조갑제, 이동복, 안기부는 마치 자신들의 말바꾸기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 하다.  

새누리당은 김현희를 믿지 않는 국민들을 종북주의자로 매도하고 질타할 게 아니라 김현희가 얼마나 많은 말바꾸기를 했는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또 '남한에 종북주의자가 많아 걱정'이라는 김현희는 먼저 자신을 되돌아 보기 바란다. '말바꾸기의 달인' 김현희는 불신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김현희와 안기부의 거짓 기록들은 마치 삼풍 참사처럼 이제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붕괴되고 있다.


 

 

 

******************************************************************************************************

 

 

‘혼수상태’라던 김현희, 어떻게 걸어서 입국했나?
[기획연재-12] ‘자살 시도’ 김현희는 과연 독약을 섭취했을까?

(진실의길 / 신성국 / 2012-08-12)


김현희 일행이 음독했다는 독약 앰플의 수법의 원조는 이후락이었다. 이후락과 독약 앰플 관계를 통해 KAL858기 사건의 진실을 엿볼 수가 있다. 1987 12 1일 김승일과 김현희는 바레인 공항에서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때 두 김은 독약 앰플을 꺼내 자살을 시도하다 김승일은 즉사하고 김현희는 바레인 살마니아 병원에서 살아났다고 안기부는 발표하였다안기부는 이들이 보여준 독약 앰플에 의한 자살 수법은 북한공작원들의 유일한 수법이라며 북한 간첩으로 단정지었다. 안기부 수사의 구체적인 발표내용은 다음과 같다. 

[
범인 김현희와 김승일이 담배 필터에 은닉한 독극물 음독자살을 기도한 행위는 1980년대 이후 북괴 남파 간첩이 피검시 자살 수법과 같다. 최근에 남파된 북괴 간첩의 독약 소지 및 자살기도 사례를 다음과 같다.

- 1983 4월 대구 시내에서 검거된 북괴 남파 간첩 정해찬(복역중 사망) 체포시 허리춤에서 독약 앰플을 꺼내 음독 자살.

- 1984년 대구에서 음식점 종업원 2명을 살해한 무장간첩은 옷깃에 은닉했던 독약 앰플을 꺼내 음독 자살.

- 1985 2월 일본인으로 위장하여 국내에 잠입했다가 검거돼 사형수로 복역중인 간첩 신광수는 자살로 독약 앰플을 옷깃에 은닉해두다 적발됐다.]

김현희 일행이 바레인에서 경찰에 체포될 당시 독약 앰플로 자살 기도를 한 형태는 바로 북한 공작원이 사용하는 수법이기에 고로 김현희는 북한 공작원이라는 것이다. 전 감사원 직원인 현준희는 안기부의 이같은 주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독약 앰플로 자살하는 경우는 북한에서만 전매특허 낸 것도 아니고 1972년 평양에 밀파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도 이 수법을 사용하였다.” 

현준희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신문보도가 있다. 2012 4 3일자 <한국일보>의 이후락과 김일성 평양 극비회담 기사를 보자. 

"1972
 5 4일 새벽 1시 평양 모란봉 초대소, 이틀 전 판문점을 통해 방북한 이후락 중정부장은 잠을 자던 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부장 동지! 급히 가셔야 할 데가 있습네다.” 북한의 대남 실무를 맡고 있던 유장식이었다. 노동당 조직부장 김영주와 이미 두 차례 회담을 마쳤던 터라 남은 건 김일성 주석과의 면담뿐이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당황스러웠지만 이후락 부장은 황급히 양복을 갈아입으며 주머니 속에 넣어온 청산가리(독약)를 확인했다. 비상 상황이 닥치면 입에 털어 넣으려 서울에서 올라올 때 챙겨왔던 것이다(중략) 청산가리를 손에 쥐고 있던 이후락은 주춤했다. (청산가리)캡슐이 녹아 손에 달라 붙었던 것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캡슐을 떼고 나서야 이부장은 김주석의 악수에 화답했다."

이후락의 방북 밀사 이야기를 통해 청산가리에 의한 독약 자살 수법은 북한만의 유일한 수법이 아님이 밝혀졌다. 이후락은 김현희 보다 15년 먼저 독약 자살 수법을 익히 알고 있었다니 남한이 더 원조가 아닌가. 독약 자살을 준비했던 이후락도 북한 공작원이란 말인가?

▲ 안기부가 발표한 김현희와 김승일이 소지했던 독약

안기부의 기록에 따르면, 김승일과 김현희가 바레인 공항에서 바레인 경찰들에게 체포될 당시 음독 자살을 시도했다고 하며 두 김이 사용한 독극물은 앰플 독약을 액화 충전한 형태의 청산가스(HCN)”이라고 발표한다.(수사결과 자료 21-22) 이를 증명할 근거로 김현희가 음독한 청산가스의 종류가 검거 간첩 최광수가 사용한 것과 같다고 발표하였다(안기부 수사결과 자료 24, 수사기록 278)

안기부는 그들이 청산가스(HCN)로 자살을 시도했다고 발표했지만 바레인 경찰 보고서는 청산가리(KCN, 청산칼륨)로 기록하였다. 

- ‘12
 1일 오전 9 30분경 신이치와 마유미(김현희)가 청산가리(KCN)를 먹고 쓰러진 것은 분명함’(바레인 보고서 42)

- ‘분홍색 분말이 담긴 유리 앰플이 필터 끝에 나와 있었음. 그는 마유미의 아랫 입술에서 이 분말의 흔적을 보았음. 신이치의 사망원인은 청산가리(HCN) 중독으로 인한 심장 및 호흡 정지로 밝혀졌음’(바레인 보고서 47)

당시 미국 백악관 대변인도 기자회견을 통해 청산가리로 발표한 적이 있다. 안기부는 '청산가스'로 발표하지만 다른 기관들은 '청산가리'로 주장한다.

* 청산가스(Hydrocyanic acid. HCN) - 시안화 수소(기체), 청산가스
* 청산가리(Potassium cyanide. KCN) - 시안화 칼륨(고체), 청산칼리, 청산가리.

청산가스와 청산가리 혼돈은 25년 동안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혼란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김현희다. 본인이 자살을 시도한 그 독약 이름조차 모르고 있었다니 말도 안된다. 김현희 진술서에는 독약 이름은 없고 독약 앰플’, ‘앰플’, ‘필터라고만 기록돼 있다. ‘청산가스인지, ‘청산가리인지 구분을 못하였다. 생물학을 전공하려고 김일성 종합대학교에 입학했다는 엘리트 출신이 자신의 공작 임무수행을 위해 사용한 독약 종류도 몰라 독약 앰플만 반복하고 있으니 '칠푼이 공작원'인 셈이다.

“12 1일 아침 7시쯤 일어나 바삐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때 김승일 선생이 독약 앰플이 든 담배갑 1개를 나의 가방에 넣어 주었다(중략). (바레인 공항)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김선생이 말하기를 이제 모든 것이 끝장이다. 일본에 보내도 우리는 이래저래 고생하다 죽겠는데 여기서 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중략) 한 경찰이 나의 손가방을 몰수하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담배(앰플이 들어있는 담배)갑만을 꺼내들고 가방을 넘겨 주었다.” (1987 12 28일 진술인 김현희)

안기부는 김현희가 김일성 종합대학 생물학과 출신이며, 북한에서 7 8개월간 특수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았는지 의문이 든다.

기 관

독약 종류

근거 

안기부

청산 가스 (HCN)

수사 자료 21-22

바레인 경찰 보고서

청산 가리 (KCN)

보고서 42, 47

미 백악관

청산 가리 (KCN)

대변인 기자회견

김현희

독약 앰플, .

(진술서)

1989년 신앙간증기에서

처음으로 청산가리 사용.

김현희 진술서

1987 12 28

김현희 뿐만 아니었다. UN 안보리에서 KAL858기 문제를 발표했던 한국의 외무부장관 최광수도 톡톡히 망신을 당하였다. 

“While being held at the airport for questioning they attempted to commit suicide by taking cyanide poison"
(
조사를 받기 위해 공항에 잡혀있는 동안 그들은 청산독약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최 장관이 사용한 용어는 혼란을 가져왔다. 공식적인 화학용어에 ‘Cyanide poison'은 없다. 화학용어로 'Cyanide'는 시안화물이며 Cyanide와 결합하여 독(, 독물, 독약)을 뜻하는 영어'Poison'을 합성어로 쓰는 화학용어는 없다. 비록 비공식석상에서 독약(毒藥)을 강조하기 위해 쓰일 수는 있지만, 항공 테러 폭파 사고를 다루는 공식발표에서 ‘Cyanide poison’ 같은 비공식적이고 부정확한 화학용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정말 망신스런 일을 저질렀다. 

한국정부 대표는 UN안보리에서 KAL기 사건 발표에서 단 하나 물증도 제시하지 못하고참가국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결국 UN 안보리 대다수 참가국들은 한국정부에 동의하지 못하고 대북 규탄결의안 통과는 참담하게 부결되고 말았다. 국제사회는 KAL858기 사건에 대한 한국정부의 발표에 비판적이며 냉소적이었다.

김현희는 과연 독약을 섭취했는가? 김현희의 음독을 부정하는 근거들이 상당하다. 김현희가 음독 직후 후송된 병원은 바레인 국립 살마니야 병원이었다(바레인 보고서 41,42) 김현희를 담당했던 병원 응급부장 야코비안 박사는 12 3일 언론 브리핑을 통해 하치야 마유미에게서 일체의 음독(飮毒)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발표하였다(동아일보, 1987 12 4일자 1, 조선일보 12 5일자 3) 담당의사는 그녀의 음독은 없었다고 확인해주었다. 

김현희의 출국을 저지했던 일본 3등이사관 스나가와 쇼준은 바레인 경비관들이 김현희의 양쪽 겨드랑이를 부축해서 공항 내 의무실까지 약 48m를 걸어가게 했다라고 증언했다(KBS 일요 스페셜, 아사히 TV, 스나가와 쇼준의 긴급지령) 그러나 안기부와 김현희는 음독 직후 혼수상태에 빠져 2 3일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다고 했다.

김현희는 음독 직후 정신을 잃었으며, 인공호흡, 입안의 물 세척, 응급 산소공급 등의 응급조치로 2 3일간 혼수상태를 거친 뒤, 극적으로 소생함 (수사기록 887, 592, 김현희 진술서) 

▲ 입에 자살방지용 재갈이 물린 김현희가 부축을 받으며 걸어서 입국하고 있다.(1987.12.15)


혼수상태로 빠졌다는 안기부의 발표와 달리 김현희는 부축을 받으며 자기 발로 걸어갔다는 일본 대사관 스나가와 이사관의 목격담이 있었다. 또한 야코비안 박사는 언론 브리핑을 통해 "마유미 위() 세척시 독극물(毒劇物) 검출이 안되었으며 마유미의 혈압과 체온 및 안색이 모두 정상인 점으로 보아 담배 필터에 숨겼던 청산가리를 뱉어버렸거나 또는 삼킨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정기 바레인 대리대사는 김현희의 음독을 연극이라고 진술하였다. 

바레인 병원 담당 의사는 마유미가 의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 불명인 체 하고 있다면서 면담을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바레인 육군병원 12월1일, 김정기 서기관 자필 진술서) 

당시 현장에 있던 의사와 책임자들은 김현희의 음독 사실을 모두 부인하였다. 2 3일간 혼수상태로 의식이 없었다는 김현희와 안기부는 결국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바레인에서 음독 쇼를 멋지게 연출했던 김현희는 훗날 한국에 와서 박세직 안기부장의 인도로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반공강사이며 신앙 간증자로 수많은 예배당을 돌아다녔다. 김현희의 신앙 간증기에는 약방의 감초처럼 바레인 독약 음독사건이 빠짐없이 들어갔다. 

나는 그 순간 독약 앰플을 깨물었다. 입으로 한쪽만 깨뜨려도 즉사하는 완벽한 공작 장비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3일 만에 바레인 병원에서 되살아났다. 결국 하나님께서 바레인 여경을 통해 나를 죽지 못하게 하신 것이다.(중략) 나의 주 하나님께서 극악한 범죄행위를 입증시키기 위해 결코 나를 편히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살려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나를 한국으로 보내는데 있었다.” (1989년도 ,국민일보>에 실리 김현희의 신앙 간증기)

자신을 기적적으로 살려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김현희의 신앙 간증은 극단적 이기주의자, 광신도의 간증일 뿐이다. 자기만 살아남으면 되는가? 열사의 땅에서 일을 마치고 그리운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KAL858기에 탑승했던 승무원들과 탑승객들은 죽어도 되는가? 김현희가 믿는 하나님은 자기만 죽을 운명에서 살려주고 115명의 사람들은 영문도 모르는 채 죽임을 당해도 된단 말인가? 

김현희는 평생 죄값을 치루며 속죄와 자숙을 하며 살아도 부족할 진대 어찌 대한민국 사방팔방을 다니며 하나님이 자기를 살려주어 감사하다는 사이비 신앙 간증이나 하고 다녔단 말인가? 기가찰 노릇이다. 심지어 조갑제는 김현희의 하나님이라는 책까지 써주며 김현희를 축복해주고 구해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니 도무지 정상인으로 봐줄 수가 없다. 가짜는 곧 붕괴한다. 사기꾼들은 일시적으로 해먹을 수 있어도 오랜동안 지탱할 수가 없다는 진리가 있다.


 

 

*******************************************************************************************************

 

 

 

액체폭탄을 술병으로 위장해 비행기에 탔다?
[기획연재-16] 라디오 배터리 몰수사건 및 시한폭탄 세팅 시간-장소도 불명확
신성국 | 2012-08-24 10:16:10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고체 폭탄과 액체 폭탄 두 개를 쇼핑빽에 넣고 공항 X-Ray 투시기 검색대를 통과할 수 있을까? 폭탄을 든 김현희 일행은 두 번 모두 공항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하여 여객기를 탑승했다고 한다. 한번은 유고 베오그라드 수르친 공항에서 폭탄을 들고 이라크 바드다드 공항으로 가는 여객기에 탑승했고, 1129일에는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대한항공 858기를 탑승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김현희 진술에 따른 폭발물 공항통과 문제를 일반상식에 입각하여 검증해 본 결과 숱한 거짓들이 꼬리를 물었다.

김현희는 1987 11 28일 베오그라드 공항에서 이라크 항공기 탑승시 승무원들에게 라디오 배터리를 몰수 당한 후, 바드다드 공항(사담 후세인 공항) 도착 후 돌려받았다고 진술했다(수사기록879, 자필 진술서)

김현희 일행은 라디오 배터리가 문제가 되어 승무원에게 압수당하고 도착 후에 돌려받았다고 한다.배터리가 항공기 내에 금지물품이라 빼앗겼다는 김현희의 진술은 거짓이었다. 왜냐하면 김현희 일행이 항공기 내로 가지고 간 가방 속에는 라디오용 배터리 뿐만 아니라 전자계산기 배터리, 전기 면도기 배터리, 카메라 배터리도 있었다. 다른 배터리들은 왜 문제가 되지 않았을까. 라디오 배터리만 문제 삼았다는 김현희의 진술은 신뢰를 잃었다. 

 일본인으로 위장한 김현희와 김승일의 비행기 좌석 위치도(경향신문, 1987. 12. 2)

당시 배터리는 어느 항공사에도 금지물품이 아니었다. 김현희는 여객기 탑승시 승무원이 배터리를 몰수했다고 진술하였다. 해외여행 실습을 세 차례나 했다는 김현희의 공항 이용에 대한 무지와 몰상식은 도가 넘었다. 비행중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출국하는 여행객의 가방과 소지품을 검색하는 사람들은 승무원들이 아니라공항 보안검색원」들이다. 여행객들이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고 나면 별도의 물품 검색은 없다. 

그런데 김현희는 항공기 탑승시 항공기 
승무원들이 가방을 검사하고 배터리를 빼앗았다고 하니 상식적으로 말도 안된다. 김현희가 소지한 배터리가 문제가 되었다면 승무원들보다 먼저 공항 보안 검색원에게 압수를 당해야 맞다. X-Ray 투시기와 첨단장비를 가지고 검색하는 공항 보안검색원들이 먼저 체크를 하고 조치를 취해야 한다. 폭발물을 들고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였다는 김현희의 진술은 공항 보안의 일반상식과 동떨어진 소설일 뿐이다.

폭발물을 기내로 가지고 들어갔다는 안기부 수사 발표에 대하여 베오그라드 공항 경비국은 즉각 반박성명을 냈다.

공항에서는 최신예 장비로 폭발물을 체크하고 승객의 몸과 짐을 엄중하게 검사하고 있다. 따라서 폭발물을 비행기로 가져가는 것은 무리다. 김현희 일행이 폭발물을 소지한 채 1987 11 28, 베오그라드 수르친 국제공항 출발 바드다드 행 이라크 항공 226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며 한국의 수사발표를 반박하였다. 

안기부는 베오그라드 공항 경비국의 발표에 대하여 어떤 해명도 하지 못했다.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또 다시 배터리 사건이 벌어진다.

김현희는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 검열관이 김현희 소지품에서 라디오 내장 배터리를 압수하여 쓰레기 통에 버렸는데, 김현희가 검색대를 빠져나온 뒤 쓰레기 통에서 배터리를 찾아 라디오에 재장전하여 김승일에게 넘겨주고, 김승일이 라디오를 켜 보이며 항의하자 공항 보안원이 미안한지 그대로 통과시켰다고 진술한다.(수사기록 3029, 자필 진술서)

 RF-082 라디오와 350g의 컴포지션4 폭약

김현희의 배터리 항의 소동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몇 가지로 검토해보자.

= 세계 모든(국제, 국내) 공항에서 여객기내 반입금지 물품을 탑승자가 항의한다고 다시 돌려주는 경우는 일체 없다. 공항 보안검색원들은 여객기내의 금지 물품은 수화물칸에 넣도록 별도로 안내해준다. 금지된 물품을 항의한다고 보안 규정을 어겨가며 허락해주는 공항은 없다. 보안원에게 압수된 배터리를 다시 돌려받았다는 김현희 진술은 스스로 지어낸 거짓일 뿐이다.

= 김현희 일행이 바그다드 공항을 이용한 1987 11월은 이라크와 이란의 전쟁(1980-1988) 중이었다. 전쟁 중인 국가들은 위험성이 극도로 고조된 상태이기 때문에 공항보안 검색은 평상시에 비해 더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 이런 전시 상태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폭탄을 들고 이라크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였다는 김현희 진술을 누가 믿을 수 있나?

= 김현희는 보안 검열관이 배터리를 빼앗아 쓰레기 통에 버렸고 자신이 쓰레기통에서 배터리를 주어서 다시 라디오에 재장전시켜서 라디오의 정상작동을 확인시켜주었다고 한다. 라디오를 켜 보이며 항의하자 공항 보안원이 미안한지 그대로 통과시켜주었다고 진술한다.

= 공항 보안 규정상 검색대 통과 중에 압수된 금지 물품은 쓰레기 통에 버리지를 않는다. 위탁 수화물 칸에 넣도록 하든지, 아니면 보안 검색원들의 압수품 수거함에 넣어 탑승객에게 반환하지 않는 것이 공항 보안규정이다. 보안원들이 압수품을 주변 쓰레기통에 함부로 버리거나 소홀히 취급하는 경우는 없다. 버려진 배터리를 쓰레기 통에서 꺼내 라디오에 장전하고 켜 보이며 항의하였더니 반입 허락을 해주었다는 김현희 진술은 현실이 아닌 상상 속의 소설에 불과하다
.

바그다드의 사담 후세인 공항은 1980년대 당시 세계 최우수 공항으로 선정된 바 있다. 전쟁 상황에서 항공 보안상 외국인에 대한 검문검색이 철저했고, 안전문제의 평가 항목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았음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바그다드 공항의 검색은 탑승자들을 대상으로 X-Ray 검사, 세관 개파 검사, Metal 탐지기를 통한 신체 촉수검사 등을 의무적으로 실행하였다. 바그다드 공항 당국자들도 김현희 일행의 항공기 내 폭발물 반입은 불가능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특히 액체는 공항 여객기내 반입 금지물품이다. 

술병으로 위장한 액체 폭약을 소지한 채 여객기 안으로 들고 갔다는 김현희 진술은 지구 밖의 이야기다. 물병조차 금지 물품인데 더구나 술이 담긴 술병은 말할 것도 없이 검색 통과를 못한다. 그런데 김현희는 라디오 배터리만 문제가 되고, 마치 액체 폭약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진술하였지만 실은 액체물이 공항에서는 더 민감한 금지물품이다. 

김현희의 시한폭탄 장치 시간도 오락가락하고 있다. 자필 진술서에는 바그다드 공항 탑승 20분전에 시한 폭탄이 9시간 후에 폭발하도록 장치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검찰 신문 조서에는 항공기 출발20분전으로 진술하였다. 여객기 탑승 20분전과 여객기 출발 20분전은 엄청난 시간차이가 있다. 여객기는 출발 약 40-50분전부터 승객들을 먼저 탑승시킨다. 탑승이 완료된 후 약 15 - 20분 정도 출발을 위한 최종 준비를 한 후에 이륙을 시도한다. 

시한폭탄의 세팅시간을 탑승 20분전으로 했다가 다시 출발 20분전으로 말을 바꾼 김현희의 진술은 엄청난 시차를 보이기 때문에 분명히 오류이다. 또한 시한폭탄을 세팅한 장소도 오락가락이다. 처음에는 김승일이 공항 대기실 의자에서 세팅을 했다고 진술하다가 나중에는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팅하였다고 말을 바꾼다. 

시한폭탄 세팅한 시간도 오락가락, 세팅한 장소도 오락가락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본인도 헷갈리고 있으니 신뢰는 모두 사라졌다. 김현희 진술을 중심으로 수사했다는 안기부 수사기록도 오락가락이다. 김현희가 왜 피해자 어머니들의 공개 토론회를 완강하게 거부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된다. 결국 자신이 했던 거짓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