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식’ 보도에 대한 제언
독일의 소도시에서 유학한 동료 교수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지난해에 인종우월주의자들의 집회가 있었다고 한다. 그 도시의 주민들은 그들의 집회 장소에 나가 조용히 이들을 에워쌌다. 그리고 모두 등을 돌리고 돌아서서 집회가 끝날 때까지 그 집회를 완벽하게 무시했다.
이들을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있음에도 출동한 경찰은 두 그룹 사이의 충돌만을 대비했다.
독일 언론은 보통 혐오시위를 보도할 때, 이에 대한 반대시위를 다룬다. 결국 주민, 언론, 경찰이 인종우월주의자들의 집회를 막는 대신 ‘무시의 장막’으로 대응해 인종우월주의자들의 집회 목적, 즉 메시지를 널리 알리겠다는 의도를 무산시켰다.
2014년 우리나라에서는 일베나 수컷닷컴 이용자들이 서울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해 혐오표현을 쏟아내고 있고, 진보 성향의 언론들이 사진기사 등으로 자세히 보도해주고 있다. 짜장면을 먹으면 짜장면 먹는 사진을 띄워주고, 치킨을 먹으면 그 사진을 띄워주고, 초코바를 뿌리면 그 사진을 띄워주고 있다.
이들을 홍보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자. 친절하게 얼굴에 모자이크 처리까지 해주니 개인적인 ‘희생’도 없고 정치적인 메시지만 말끔히 전달해주고 있지 않는가.
혐오표현 보도로 의도하지 않은 해악이 나타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테리 존스라는 미국의 목사가 코란 소각 시위를 하자 전세계 언론이 보도를 했다. 이 소식이 중동 지역까지 전해지면서 격렬한 반대시위가 이어졌고,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이 목사가 유명인사가 되자 이를 모방하는 교회들이 나타났다.
사태가 진정된 뒤 욕을 먹은 것은 사태를 키운 제도권 언론이었다.
한 언론인이 회상했다.
“숲에서 나무가 테리 존스 목사 위로 쓰러졌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그의 성도 50명 말고는 누가 신경을 썼을까? 언론 보도가 있기 전까지 우리는 그 목사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또다른 예로 1995년 이스라엘 강경파 시위에서, 당시 온건파 라빈 총리에게 나치 복장을 입힌 포스터가 등장했다.
그 나라에서 누군가를 나치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죽이자는 선동과 다름없었고, 이 포스터 등장 사실은 물론 보도는 되었다.
하지만 2개의 주요 일간지 중 하나는 사진을 실었고 다른 하나는 싣지 않았다. 후자는 ‘공개적 살인선동’을 돕고 싶지 않아 사진을 게재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해 11월 라빈 총리는 실제로 살해당했다.
언론에 자기검열을 하라는 것이 아니다. 위의 독일 소도시 시민들이 자기검열을 한 것인가?
표현의 자유는 표현하지 않을 자유도 포함하고 있다.
이 소도시 시민들은 단호한 침묵을 통해 훨씬 더 큰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혐오표현은 그 자체로 공분의 대상이며, 공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보도돼야 한다.
광화문 폭식을 보도하는 언론들도 같이 분노하자는 취지로 보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도의 방법과 수위에 있어 혐오표현자를 돕는 효과와 이를 고발하는 효과 사이에 저울질을 할 필요가 있다.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
혹시 인종차별 문제와는 다르다고 생각할 사람을 위해 부연하자면, 혐오표현은 특정 그룹에 대한 혐오를 표명하여, 그 그룹에 대한 차별을 선동하는 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월호 유가족은 차별받고 있는가?
단지 특정 선박회사와 수학여행 계약을 한 안산지역 고교에 자녀를 입학시켰다는 이유만으로, 자녀를 변변한 구조도 못 받고 잃게 된 것만큼 자의적이고 서러운 차별은 없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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