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조작 재판' 국정원 직원들 희비 가른 서류 3건
국가정보원의 증거 조작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을 심리해온 법원은 1심부터 2심까지 줄곧 한목소리로 국정원 직원들을 질타했다.
"피고인의 범행은 국가의 형사사법 기능을 심각하게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국정원에 대한 국민의 기대와 신뢰를 훼손시키고, 국정원의 임무 수행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했다."
그런데 20일 '국정원 증거조작사건' 항소심 재판부는 이들을 단죄하면서, 1심과는 확연히 다른 형량을 정했다.
증거조작을 주도한 국정원 대공수사처 김보현 과장의 경우 1심에선 징역 2년 6개월에 처해졌지만, 이번에는 징역 4년으로 형이 더 무거워졌다.
반면 징역 1년 6개월 실형 선고를 받고도 법정구속을 면했던 이재윤 처장은 벌금 1000만 원에 처해졌다. 각각 징역 1년 6개월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씩 나왔던 권세영 과장과 이인철 주 중국 선양총영사관 영사는 모두 벌금 700만 원에 선고유예 판결을 받았다. 두 사람은 앞으로 2년간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면소된다.
'증거'인가 '진술서'인가... 1·2심 재판부의 엇갈린 판단
국정원 직원들의 단죄 정도가 크게 엇갈린 것은 항소심과 1심 재판부의 법 해석·적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두 재판부는 대부분의 공소사실을 두고는 비슷하게 봤지만, 세 개의 서류에 관해선 극명하게 다른 판단을 내렸다. 문제의 서류는 이인철 영사 이름의 ▲ 2013년 9월 27일자 확인서·사실확인서와 ▲ 2013년 12월 17일자 확인서, ▲ 중국 허룽시 공안국명의 회신공문이다.
2013년 8월 22일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피고인 유우성씨가 1심에서 간첩 혐의 무죄 판결을 받자, 국정원 대공수사처는 분주해졌다.
당시 국정원은 권세영 과장이 2012년 11월 입수한 유씨의 출입경기록을 법원에 제출, 그의 밀입북 사실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 출입경기록은 발급일자·기관 등이 없는 컴퓨터 화면 출력본이었다.
국정원은 이 문서를 써먹기 위해 이인철 영사에게 해당 출입경기록을 확인했다는 내용의 사실확인서와 확인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한다. 이때 만들어진 서류가 2013년 9월 27일자 확인서·사실확인서(①번 서류)다.
하지만 이 문서만으로는 부족한 상황이 되자, 김보현 과장은 중국 허룽시 공안국명의 출입경기록을 위조한다. 또 이 출입경기록이 허룽시 공안국에서 직접 발급했다는 내용의 회신공문마저 꾸며낸다.
권세영 과장과 이재윤 처장의 결재를 거친 전문으로 지시를 받은 이인철 영사는 2013년 11월 27일, '허룽시 공안국에 확인한 결과, 출입경기록을 발급한 사실이 있음'이란 전문과 해당 공문을 대검찰청으로 보냈다. 그런데 허룽시 공안국명의 회신공문(②번 서류)은 김보현 과장이 웹팩스로 보낸 가짜서류였다.
이후 유우성씨의 항소심 과정에서 증거조작 의혹이 불거지자 국정원은 다시 한 번 움직였다. 2013년 12월 15일, 김보현 과장은 이재윤 처장의 결재를 받아 이인철 영사에게 '유우성 출입경기록 정황설명에 관한 문서들을 보내니 참고하고, 이 문건들은 중국 싼허변방검사참에서 조사 중이라는 확인서를 만들어 보내라'고 지시한다.
이 영사는 김 과장의 지시대로 2013년 12월 17일자 확인서(③번 서류)를 작성해 이튿날 검찰에 보냈고, 해당 서류들은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됐다.
▲ 유우성 간첩혐의 '무죄' 국가정보원의 증거조작으로 간첩 혐의를 받았던 유우성씨가 지난해 4월 25일 항소심 무죄판결 뒤 기자들에게 소감을 밝히고 있다. | |
ⓒ 권우성 |
국정원 증거조작사건 항소심 재판부는 세 개의 서류가 모두 가짜이긴 하지만, 범죄의 종류에 따라 국정원 직원들의 유무죄가 다르다고 판단했다.
'주도자'로 꼽히는 김보현 과장의 경우 ①번 서류와는 무관하나 ②번과 ③번 서류를 두고 사문서 위조·행사, 허위공문서 작성·행사, 모해증거 위조·사용 혐의를 받아왔다.
재판부는 그가 ②번 서류를 가짜로 꾸며낸 일은 사문서 위조·행사와 모해증거 위조·사용은 모두 유죄이지만, ③번 서류의 경우 허위공문서 작성·행사죄만 성립한다고 봤다.
①번 서류를 두고 허위공문서 작성·행사와 모해증거 위조·사용죄 혐의를 받아온 이재윤 처장과 권세영 과장, 이인철 영사 역시 허위공문서 작성·행사죄만 유죄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또 네 명이 공범으로 엮인 ③번 문서도 모해증거 위조·사용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공소사실 가운데 세 서류의 모해증거 위조·사용죄는 김보현 과장의 ②번 서류 혐의에서만 인정된 것이었다.
날아간 '모해증거' 혐의에 웃은 국정원 직원들
재판부는 ②번과 ③번 서류는 일종의 진술서라고 판단했다. 이 경우 법원은 이 영사를 직접 불러 해당 문서가 믿을 만한지 확인해봐야 한다. 그런데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재판에선 이 과정이 없었다. 결국 "(두 서류는) 허위공문서는 되지만 문서의 성격상 (이인철 영사의) 생각이나 진술 내용을 기재한 것"이라며 "증거위조죄의 증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재판부의 결론이었다. 김상준 부장판사는 "이 서류는 영사가 법정에서도 허위진술을 하면 위증이 되는 것"이라는 설명을 더 했다.
세 서류들이 "수사기관 등이 증거 가치를 판단할 때 오도할 위험성을 현저히 증대시켰다"며 모해증거 위조·사용죄를 인정한 1심 재판부와 전혀 다른 법리 적용이었다.
이 혐의가 인정되지 않으면서 이재윤 영사와 권세영 과장, 이인철 영사의 형량은 크게 낮아졌다. 선고유예 판결을 받은 권 과장과 이 영사는 무죄가 나온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20일 항소심 선고 공판을 지켜본 유우성씨의 변호인단은 반발했다. 천낙붕 변호사는 "영사확인서가 법원에 미치는 영향은 일반 진술서와 달리 법관이 확인하는 순간 유죄의 심증을 확고하게 하는 문서"라며 "(항소심 재판부가) 그 증거가치를 이해하지 못했다, 대법원에서 분명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민 변호사도 "법원이 굉장히 형식적인 논리를 들이댔다"며, "결과적으로 그런 판단이 양형에까지 영향을 미쳐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선처를 했다"고 비판했다.
[ 박소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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