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3일, 전국의 텔레비전 화면에는 황교안 국무총리의 얼굴이 떴다. 그리고 그는 마이크에 대고
다음과 같은 담화를 읽어 내려갔다.
“저는 역사교육 정상화를 위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습니다. 편향된 교과서로 역사교육을 받고 있는
지금의 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듭니다.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바로잡아야 학생들이 우리나라와 우리 역사에 대한 확실한 정체성과 올바른 역사관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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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총리가 PPT를 보며 담화를 발표하고 있다. © 총리실 자료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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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전인 1929년 11월 3일…
광주의 젊은 학생들은 일제의 강압통치에 봉기했다.
그날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상징인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치절(明治節)이었다.
그런데 우리 조선인들은 당시 음력을 상시적으로 사용했으며 그날은 음력으로 10월 3일이었다. 그리고 음력 10월
3일은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이었다. 조선인의 시조를 기념하는 그 개천절날, 특히 일요일임에도 등교하여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불러야 한다는데 학생들은 분노했다.
이에 조선인 학생들은 이 행사에 참석하여 노래를 부르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교사들이 이런 학생들을
체벌하겠다고 나섰다. 이는 학생들의 반일감정에 불을 지른 격이 되었다.
앞서 10월 30일 광주와 나주를 통학하는 기차에서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은 격투가
있었다. 그런데 이를 편파적으로 처리한 경찰과 언론의 편파보도를 소문으로 접한 조선인 학생들은 울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울분에 더해진 것이
일본 천황생일축하 침묵학생들에 대한 체벌소식이었다.
학생들에게서 반일감정이 폭발했다. 이 반일감정 폭발로 벌어진 시위가 광주학생운동의 시발이다. 이 저항운동은
전국으로 퍼졌으며, 무려 700여 명이 구속되는 전국적 반일 저항운동으로 비화했다. 이에 지금도 11월 3일을 광주학생운동의 날로 정해
기념한다.
지난 2014년 광주시 교육청은 고교 한국사 검정교과서 8종을 분석한 결과, 교학사 교과서의 광주학생항일운동 관련
서술 내용을 개정·보완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른 7종은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해 비교적 충실하게
기술했지만, 교학사 교과서는 역사적 비중과 의의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었다.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의 충돌 상황은 7종의 교과서가 기술하고 있으며, 항쟁의 전국적 확산 상황은 7종의 교과서가
통계 수치를 제시하거나 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으나, 교학사 교과서만 유일하게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역사적 비중과
의의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실한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다. 이에 광주시 교육청은 이의 시정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황교안 총리는 이런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은 것이 곧 ‘편향성’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014년,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20여 곳의 학교는 특정 집단의 인신공격, 협박 등 집요한 외압 앞에 결국
선택을 철회했습니다. 가장 교육적이어야 할 학교현장이 반민주적, 반사회적 행위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전국에 약 2,300여 개의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그 중 세 학교만 교학사 교과서를 선택했고 나머지 전체, 고등학교의 99.9%가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황교안 총리는 이런 역사적 의의가 있는 11월 3일, 전국민이 보는 앞에서 '편향된 교과서로 교육받는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천연덕스러운 말을 했다.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인양 왜곡하는 연설을 서슴없이 한 것이다. 편향에 대한 잣대가 편향적임에도
그것을 사실화 했다. 때문에 나는 텔레비젼에 나타난 황 총리의 얼굴에서 차지철이 보였다.
차지철… 3선 의원으로 국회 국방위원장까지 역임한 대통령 경호실장, 그러나 마지막 가는 길에 김재규로부터 “이런
버러지 같은 놈”이란 말을 들었다.
김재규는 박정희를 저격하기 전 치지철을 쏘면서 “각하, 이런 버러지 같은 놈과 정치를 하니까 정치가 잘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당시 총을 맞은 차지철은 “김 부장, 왜..왜..이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전두환 합수부장은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이 같은 내용을 수사결과 발표문에 담아 읽어 내려갔다. 차지철은 김재규에게 ‘버러지 같은 놈’이란 칭호를 들으며, 총을 맞고 있음에도
자신의 잘못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김 부장, 왜..왜..이래?”라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대학교 학생 4천여 명이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진출했다.
이어
동아대학교 학생들이 합류했으며, 퇴근하던 노동자들이 합류해 시위대는 5만~7만여 명에 달했다. 이 시위는 경찰서, 어용 언론사, 도청 등이 불에
타거나 파손되는 사태로 변했다.
정부는 신속하게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그러나 시위는 마산으로 번졌다. 마산의 항쟁도 부산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이 시작했고, 직장인이 항쟁의 주력이 됐다.
10월 20일 정부는 마산과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공수부대와 해병대가 투입되었다. 이들은 대검을 꽂은 채 잔인한 진압 작전을 폈다.
이들의 폭압적 진압에 부마항쟁은 일시 진압되었다. 하지만 항쟁을 보는 눈이 김재규와 차지철은 달랐다.
현장을 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본인이 확인한 바로 부마사태는 불순세력,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이나 사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일반 시민에 의한 민중봉기였다. 시민이 데모대원에게 음료수와 맥주를 날라주고
피신처를 제공하는 등 데모하는 사람과 시민이 완전히 의기투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체제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저항까지 겹친 민란이었다”라고 재판정에서 회고했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달랐다. 그는 궁정동 술자리에서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까지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했다고 김재규는 회고했다.
이에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 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하고 거들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두환 합수부장은 발표했다.
김재규는 재판정에서 박정희를 죽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4.19와 같은
사태가 오면 국민과 정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고, 그렇게 되면 얼마나 많은 국민이 희생될 것인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아니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4.19와 같은 사태는 눈앞에 다가왔고 아니 부산에서 이미 4.19와 같은 사태는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지철은 같은 사안을 놓고 “캄보디아에서는 3백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 2백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 1,2백만
명을 죽여도 된다는 인식. 정치가 국민을 받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국민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인식, 그러니 킬링필드가 부러웠던
것이다.
황교안 총리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의 전위대 역할을 유감없이 수행하고 있다. 법무부 장관으로서 박근혜에게 껄끄러운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을 끌어 낸 당사자 노릇을 충실하게 했다. 그리고 이번 교과서 정국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앞장서서
수행했다.
이런 가운데 그는 국민 70%가 반대하고, 역사학자 90%가 반대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면서, 학자들과
국민들을 가르치겠다는 웃지못할 자만심도 내 보였다.
그는 “(학교의)99.9%가 편향성 논란이 있는 교과서를 선택했다”며, 교학사 교과서를 뺀 7종 교과서를 모두
좌편향으로 매도했다. 앞서 광주학생운동 기술만으로도 편향성이 드러난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하지 않았다고, 학교 교사들까지 편향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학자도 아니고 법률가일 뿐인 그가 박근혜 대통령의 충실한 총받이를 자임한 것이다.
역사는 황교안을 어떻게 기록할까?
벌써 ‘역사왜곡 5적’으로 불리고 있음을 황교안 스스로는 어찌 판단할까?
김재규에게 저격을 당하는 순간까지 “김 부장 왜..왜..이래?”라고 당황한 차지철처럼, 왜 자신을 ‘역사왜곡 5적’으로 분류하는지도 모르고
당당할까?
그러나 오늘도 총리로서 활짝 웃는 모습으로 직을 수행하는 그를 보는 내 눈은 안쓰러음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