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이상희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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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1월 9일 <동아일보> 1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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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했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의 도발 행위로 조국의 현실이 백척간두에 있는데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유신체제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국가안전보장을 위해 긴급조치 제1호, 제2호를 선포한다"고 했다. 긴급조치 제1호, 제2호의 주된 내용은,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폐를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어기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을 할 수 있고, 군사법원에서 징역 15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와 백기완이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무고하게 영장도 없이 구속되었다.
1975년 5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다시 '남침이 가능하다고 북한이 오판을 할 염려가 급격히 증대된 상황'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은 국론통일과 총력안보태세를 갖추는 것이라고 하면서 긴급조치 제9호를 선포하였다. 긴급조치 9호도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폐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했고, 긴급조치 자체에 대한 비판도 금지했다.
이를 어기면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할 수 있고, 징역 10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당시 경향신문은 '북괴의 남침 위협이 제거되었다는 현저한 증거가 없는 한 앞으로 반영구적으로 존속될 운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다'고 평가했는데, 실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종신집권의 기반을 만든 박정희가 사망하고 나서야 폐지되었다.
대법원과 헌재가 긴급조치에 위헌·무효를 선언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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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공포됐던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다.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유신·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헌재 위헌 판결에 환영하는 박수를 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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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때문에 민주화를 요구하고 유신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구속되었고, 일상에서 대통령이나 정권과 관련하여 농담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이야기를 한 사람들이 영장도 없이 구속되었다.
선원을 꿈꾸던 20대 청년은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대통령은 도둑놈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여 1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선원의 꿈을 포기해야 했고, 국민의 보편적 참가가 보장된 총선거를 요구하는 창당선언문을 지인에게 전달한 40대 가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정신질환을 앓다가 사망했다.
유신정권은 긴급조치가 북한의 전쟁위기에 처한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나, 오히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유린되었고, 많은 청년들이 감옥에 끌려갔으며, 고문으로 몸과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는 2012년과 2013년에 앞다투어 긴급조치에 대해 위헌·무효를 선언하였다. 그 주된 이유 중 하나가 그 당시 긴급조치를 선포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은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종결된 이후 남북이 적대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상존하는 위기상황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어 긴급조치 사건을 통해 북한의 도발 위협이나 안보 이슈를 정쟁이나 기본권침해의 수단으로 남용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국가비상사태'를 악용해 법이 정한 절차도 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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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화 국회의장이 지난 23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서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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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며칠 전 국회의장은 지금 상황을 전시나 사변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보고 테러방지법을 직권상정했다. IS 등 국제적 테러 발생과 최근 북한의 도발적 행태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테러방지법이 무엇인가? 국정원이 광범위하게 출입국이나 금융거래, 통신이용 등의 정보와 개인정보 및 위치정보를 수집하고, 감청과 계좌추적을 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해킹이나 컴퓨터 바이러스도 사이버 테러로 규정하여 국정원이 사이버상에서 언제든 모든 영역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법이다. 국정원은 언제든지 집회와 시위에 대해 '테러위험'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주최자나 참여자의 위치나 계좌를 추적하고 감청을 할 수 있다.
정부는 2001년부터 테러방지법을 제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테러의 구체적인 위협에 직면하지도 않았고, 정부는 이미 존재하는 대테러대책기구의 존재도 알지 못했다(국가테러대책회의). 그러기에 대통령과 여당이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민중총궐기를 IS에 빗대어 이야기하거나 테러로 규정한 발언들을 보면, 이 법이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지 명확해진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반인권적인 법률을 만드는 과정에서, 정의화 국회의장이 헌법재판소의 경고도 무시하고 '국가비상사태'라는 말을 악용하여 법이 정한 절차도 무시했다는 점이다. 남북 대치상황은 정권의 편의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경고했듯이 '통상적인 권력작용의 방식으로는 결코 대처할 수 없는 국가위기상황이라는 점에 사회 전반적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 않은 한 쉽게 '전시나 사변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유신독재의 부활을 꿈꾸는가?
특히 긴급조치의 역사를 보더라도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에는 더욱 냉철하고 엄격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대북정책의 실패로 조성된 남북관계의 갈등을 오히려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기회로 삼으려는 정말 후안무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평화를 향한 소통이지, 인권침해적 요소를 가득 안고 있는 테러방지법이 아니다.
긴급조치로 인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고문에 의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들에게, 테러방지법은 2016년판 긴급조치일 뿐이다. 테러방지라는 허울 뒤에서 유신 독재의 영구 부활을 꿈꾸는 자들은, 유신독재에 맞서 싸운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비로소 일군 이 땅의 민주주의를 더 이상 모욕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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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앞뒤 다르다" 새누리당 공세, 오히려 현 정부 '불통' 강조한 꼴
"야당의 주장처럼 테러방지법이 필요없는 법안이라면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왜 테러방지법을 제출했는지 이 부분에 대한 설명부터 해야 할 것이다."
원유철 새누리당 대표가 26일 원내대책회의에서 한 말이다. 그는 이날 이 같이 말하며 "테러방지법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공히 그 필요성을 절감하고 입법을 위해 노력해 온 법안"이라고 주장했다. 또 "심지어 새누리당이 (최근) 발의한 테러방지법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법안보다 국가정보원에 대한 통제장치가 더 많이 들어가 있다"라고도 주장했다.
지난 23일부터 시작돼 현재(26일 오후 4시 15분) 69시간째 진행되고 있는 야당의 '필리버스터가 "앞뒤 다른 행동"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오마이뉴스> 확인 결과,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지금과 유사한 테러방지법이 발의됐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박근혜 정부의 '불통'을 확인할 수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테러방지법은 모두 당시 야당(한나라당, 새누리당의 전신)만 아니라 주로 여당으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심지어 법무부나 국가인권위원회 등 다른 관계기관도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즉, 정상적인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고 그에 따라 폐기된 법안들인 셈이다. 오히려 원 원내대표의 발언은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는 대통령의 '하명'에 직권상정까지 불사하며 이를 밀어붙이고 있는 현 정부·여당의 태도를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국무회의서 결정했어도 국가인권위원회가 반대했다
김대중 정부는 2001년 11월 테러방지법안을 발의했다. 당시 발생했던 미국의 9.11 테러의 영향이었다. 당시 정부는 9.11 테러 직후인 9월 25일 국무회의에서 "기존의 국가대테러활동지침으로는 새로운 형태의 테러리즘에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 범정부적 대응체제 구축 차원에서 테러방지법을 입법하기로 결정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발의된 법안의 골자는 현재 발의된 테러방지법과 거의 유사하다. 구체적으론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국가대테러대책위원회를 대통령 소속 하에 설치하도록 했다. 또 국가정보원에 관계기관의 공무원으로 구성되는 대테러센터를 설치하여 국가의 대테러활동을 기획·조정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법은 바로 처리되지 않았다.
우선, 국가인권위원회가 같은 해 12월 7일 토론회를 열었다. 당시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은 이 자리에서 "테러방지라는 대목적에 우리 국민 모두가 동의한다 하더라도 이런 목적에 대한 동의가 곧바로 특정 정보부처에게 우월적 지위를 부여하고 우리 법체계를 초월한 초법적 권한의 행사까지 모두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반대 입장을 폈다. 그는 또 "법률의 입안은 국민적 여론수렴과 사회적 합의를 전제로 한 민주적 절차성 보장이 기본"이라고도 꼬집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같은 '절차'를 밟은 뒤 2002년 2월 테러방지법 제정 반대 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즉, 정부가 발의한 법안을 또 다른 국가기관이 앞장서 반대한 셈이다. 결국, 김대중 정부의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테러방지법은 발의되지 못했다.
테러방지법 제정 시도는 노무현 정부 들어서서 다시 시작됐다. 소관 상임위인 국회 정보위원회는 2003년 10월 4인 협의회를 구성한 후 그 해 11월 3일 공청회를 거쳐서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 일부 내용을 수정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로 회부했다.
그러나 법사위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현행 제도만으로도 테러대응이 가능하지 않느냐"는 지금과 같은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당시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은 "대테러센터가 과연 현 단계에서의 테러에 대한 대응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가, 현행 제도를 가지고 대처할 수 없는 것들은 과연 어떤 것들이 과연 어떤 것이 있는지 이런 문제가 근본적으로 제기된다"라고 지적했다.
조순형 당시 민주당 의원도 "통합방위법을 검토하셨는지 의문이 있다"라고 꼬집었다.
야당만이 아니었다. 당시 갓 창당한 열린우리당의 천정배 의원도 "정보기관이 그 어떤 행정권의 집행에 해당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라며 "고도의 기밀을 다루는 정보기관으로서 인권침해나 권력남용의 위험이 있다고 본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2001년 발의됐던 테러방지법은 16대 국회의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 관계기관의 토론회 및 제언, 여야 협상, 소관 상임위의 공청회, 국회에서의 법안심사 등 충분한 공론 절차를 거친 결과였다.
대통령 의지에도 소신 지킨 여당, 누가 공당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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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05년 8월 8일 오전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춘추관에서 국정원 불법도청 관련 기자간담회를 하는 도중 물컵 뚜껑을 열고 있다. |
ⓒ 연합뉴스 김동진 | 관련사진보기 |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 당시 조성태 열린우리당 의원 대표 발의로 발의됐던 테러방지법도 마찬가지다. 이 법은 당시 한나라당 공성진·정형근 의원이 발의한 테러방지법을 통합한 정보위원회 대안으로 다뤄졌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은 2006년 8월 "테러 대응체제에 관한 제도를 지금 확보할 필요가 있고, 국정원이나 중심기관을 두고 그 기관의 제도적 권한을 뒷받침해야 한다"라면서 테러방지법 입법에 대한 의지도 밝혔다. 그러나 대통령의 의지 표명에도 여당은 'YES'만 외치지 않았다. 대통령의 말을 무작정 쫓는 것이 아니라 헌법기관으로서 당당히 의견을 표출한 것이다.
당장 소관 상임위인 국회 정보위원장이었던 신기남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 'NO'를 외쳤다. 2007년 2월 정형근 한나라당 최고위원은 "노무현 대통령도 지원하겠다고 밝혔는데, 열린우리당의 신기남 정보위원장이 막무가내 반대로 법안심의조차 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라고 불만을 토할 정도였다.
2005년 12월 열렸던 정보위의 '테러방지법안 심사를 위한 공청회' 속기록을 살펴봐도 당시 여권의 분위기를 짐작 가능하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최재천 의원은 이 자리에서 "(테러방지법은) 국정원 개혁을 전제로 해야 한다"라면서 "법이 없어서 우리가 테러방지업무를 못한다, 이것은 거짓말"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위원장 직무대리를 맡았던 같은 당 임종인 의원은 '법무부 수장도 이 법을 반대하지 않았느냐'라고 꼬집기도 했다. 임 의원은 공청회에 법무부 대표로 나온 김창희 검찰연구관에게 "천정배 법무장관이 국회 계실 때는 선봉에 서서 (테러방지법을) 반대했는데, 법무부 장관과 얘기하고 나온 건가"라고 꼬집었다. 이에 김 연구관은 "아직 말씀 못 드리고 나왔다"라고 답했다.
결국, 이 법안도 17대 국회의 회기 만료로 폐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