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희한한 사건이 발생했다.
고물상 관리인의 신고로 드러난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영등포 당산에 소재한 고물상의 관리인은 이날 오후, 남성 두 명과 여성 한 명으로부터 폐지 660kg을 받았다.
관리인은 폐지려니 생각했던 상자 안의 종이를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 주석의 얼굴이 새겨진 5000원권 북한 화폐가 A4용지 크기의 종이 앞뒤로 4장씩 인쇄돼 있었기 때문이다. 660kg 중 북한 위조지폐 종이 뭉치는 150kg에 달했다.
관리인 신고를 받은 경찰은 위조지폐를 고물상에 넘긴 세 명을 추적해 조사했고, 이들이 탈북자인 것을 확인했다. 위조지폐는 최초 또다른 탈북자 A씨가 탈북자 단체에 맡겼다가, 세 명의 탈북자가 고물상에 넘긴 것으로 파악됐다.
언론은 서울 한복판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북한 위조지폐를 ‘황당한’ 사건 사고 소식으로 전했다. 하지만 위조지폐를 누가 제작하고 어떤 목적으로 유통시키려고 했는지는 드러나지 않아 미스터리로 남았다.
수사기관은 위조지폐의 제작 및 유통과 관련해 함구하고 있다. 위조지폐 사건은 영등포 경찰서 지능팀이 맡았다가 보안계로 넘어갔다. 영등포 경찰서 보안계 관계자는 "사건은 군 기무사 쪽으로 넘어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보통 대공 용의점이 발견될 때 기무사가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단순한 위조지폐 사건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수사당국이 입을 닫으면서 위조지폐 사건은 미궁 속에 빠진 듯 보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외교부 발표에 위조지폐 사건 관련자가 등장하면서다.
외교부는 17일 북중 접경 지역에서 탈북자 출신으로 우리나라 국적을 가진 2명이 실종 상태라고 밝혔다. 실종자 두 명 중 한 명은 중국 지린성 엔벤 조선족 자치주 허릉시에서 활동한 김아무개 목사로 소개했다.
미디어오늘 취재 결과, 김 목사는 위조지폐 사건의 관련자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됐다. B씨는 김○○의 이름을 언급하며, 수년 전부터 집에 위조지폐를 보관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봤고, 북한의 선교활동을 위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김○○의 가족이 외교부에 실종신고를 한 시점(3월 28일)과, 외교부가 밝힌 김 목사의 실종신고 접수 시점도 일치한다. 미디어오늘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실제로 김○○와 김 목사의 이름은 같다.
경찰은 위조지폐 사건 관련자의 신원을 밝힐 수 없다고 했지만, 위조지폐를 보관했다는 탈북자 A씨가 중국에 있는 것을 확인했다고 전했다.
외교부는 김 목사의 실종과 위조지폐 사건과의 관련성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외교부 재외국민보호과는 "우리 과는 해외에서 우리 국민의 안전이나 위협을 받은 사안을 관장하고 있지만, 국내의 사건 관련성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지 않다"고 전했다.
김 목사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고 그는 왜 북한 위조지폐를 보관하고 있었을까. 탈북자들은 위조지폐를 왜 버리려고 했을까.
탈북자를 돕는 NGO 단체 관계자는, 김 목사의 실종이 위조지폐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면서, 북한 지하교회 지원 활동이 문제가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 목사는 한국계 미국인이 담임목사로 있는 ㅅ 교회 소속으로, 북의 지하교회 활성화를 위한 지원 활동을 해왔다. 지하교회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북측 정보원을 통해 정기적으로 동향보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ㅅ 교회 측은 "언론에 김 목사로 나오는데, 김○○은 집사를 맡고 있고, 외교부 실종자 명단에 있는 건 맞지만, 위조지폐 사건 관련성은 모른다"고 말했다.
중국 지린성 장백교회 한충렬 목사가 살해 당한 사건도 김 목사 실종과 관련이 깊다는 증언도 나왔다. 한 목사는 지난달 30일 피살됐다. 그의 시신은 창바이현 변두리 야산에서 승용차와 함께 발견됐다. 한 목사는 김 목사와 마찬가지로 북한의 지하교회를 지원했던 인물이다. 북에서 지하교회 지원 활동은 선교를 빙자한 스파이 행위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난 3일 노컷뉴스는 정통한 대북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장백교회 한충렬 목사가 북한 지하교회에 지원을 하는 국내 한 선교단체에 선교 현황을 보고하기 위해, 지난달 말에 중국 단둥에서 관계자 3명과 면담하는 일정이 잡혀 있었다"며, "한 목사가 지난 30일 북한에서 나온 지하교회 관계자에게 자료를 전달받기 위해 미리 약속한 장소로 가다가, 이를 사전에 파악한 북한 보위부 측에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시간순으로 보면 지난 3월 28일 김 목사가 사라졌고, 한 목사는 한달이 조금 지나 4월 30일 피살됐다. 그리고 5월 2일 위조지폐 사건이 터졌다.
NGO단체 관계자는 "일련의 사건이 모두 북한의 지하교회 지원활동과 연관돼 있다. 김 목사라는 탈북자가 위조지폐로 북한의 지하교회 지원활동 및 정보보고 활동을 해오다가 실종된 것"이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이 김 목사가 실종되고, 한 목사가 피살되는 것을 보고, 북한 지하교회 지원과 연관된 위조지폐를 고물상에 버려 ‘처리’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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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5월 4일 MBC 뉴스투데이가 북한 위조지폐 사건을 보도한 화면 |
위조지폐는 그럼 누가 제작한 것일까.
경찰 조사에 따르면, 위조 지폐는 맨눈으로 진본과 대조해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질이 높은 것으로 나왔다. 지폐마다 일련번호가 모두 다르고, 진본과 유사한 음영까지 새겨넣은 상태였다.
위조지폐는 모두 8만장, 북한 원화 기준으로 6억원 상당에 이른다. 위조지폐의 질과 규모로 봤을 때, '개인의 작품'으로 보기 힘들다.
NGO 단체 관계자는 "지하교회 지원은 선교활동을 한다는 명분이 있다. 동시에 북의 급변사태에 대비해 네트워크로 활용할 수 있는 북의 유일한 사조직으로, 지하교회를 이용해 북의 정보를 얻으려는 조직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진다"면서, "수사 당국이 이번에 발견된 위조지폐를 탈북자가 개인적으로 제작해 유통시키려 했다고 하고 있지만, 북의 정보를 얻기 위해 국내 조직이 지원해 만들어 유통시킨 정황이 크다"고 말했다.
수거한 위조지폐를 처리한 과정도 석연치 않다.
영등포경찰서 보안계는 "위조 지폐는 모두 소각 처리했다"고 밝혔다.
위조지폐가 어떤 방식으로 제작이 됐는지, 제작 경위는 어떻게 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사건의 중요한 물증을 없애버린 셈이다.
[ 이재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