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신임 국정원장은, “조직에 충성하지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윤석열 서울지검장의 어투를 빌리자면 “국가에 충성하지 정권에 충성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군인 출신의 국정원장들처럼 국내정치에 몰두한 권위주의적인 인물도 아니고, 법률가 출신들처럼 무능하지도 않으며, 원세훈처럼 민주주의 자체를 공격하지도 않을 것이다.
온화하고(그러나 필요할 땐 단호하고), 사려깊은 잰틀맨이면서도 무엇보다 국정원의 과거에 정통하고 국정원의 미래에 확고한 비전을 가진 인물이다.
서 국정원장의 임기 중에 국정원이 정치를 기웃거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가 원장이 바뀌거나 정권이 바뀌어도 국정원이 다시는 정치에 개입하거나 민간부분을 사찰하는 일이 없도록 국정원을 확실하게 개혁할 수 있을까.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망정 굉장히 어려운 작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어려운 작업을 시작하는 첫걸음은 국정원이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저지른 것으로 의심을 사는 모든 의혹사건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철저한 조사다.
아니나 다를까. 서훈 국정원은 국정원 댓글 사건 등 민주당이 야당일 당시 ‘정치적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던 7가지 사건을 ‘국정원 7대 정치 개입 사건’으로 규정하고 ‘적폐 청산 TF’를 만들어 재조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 TF가 재조사할 사건은 ①2012년 대선 댓글 사건, ②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 관련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③국정원의 보수단체 지원 의혹, ④국정원의 박원순 서울시장 사찰 의혹, ⑤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의혹, ⑥국정원의 불법 해킹 의혹, ⑦최순실 사건 비호 의혹 등이다.
이 사건들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물론 중요하지만 나는 여기에 3개의 의혹을 덧붙이고 싶다.
첫째는 2012년 대선 때 원세훈 일당이 단순히 댓글로 대선에 개입했을 뿐 아니라 개표부정까지 저질렀다는 의혹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둘째, 2015년 7월 국정원 직원 임 아무개씨의 석연치 않은 자살이 국정원의 불법 해킹과 민간인 사찰, 심지어 개표 부정의혹 등 IT를 이용한 국정원의 온갖 불법행위에 연관이 있다는 의혹이다.
셋째, 이건 조사나 수사를 할 것도 없이 실태 파악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인데, 국정원이 직간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모든 사업이다. 이는 세월호참사와도 연관이 있으나, 도대체 국가기관 국정원이 무슨 이유로 선박업, 골프업 등 돈 버는 장사에 관여하고 있는가.
국정원은 비밀공작을 업으로 하고 은폐를 장기로 삼는 조직이다. 지금 돌출돼 있는 의혹들이 이명박근혜 국정원이 저지른 적폐의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서훈 국정원은 빙산의 밑뿌리까지 철저히 밝혀내야 할 것이다. 밝혀서 관련자들을 엄히 처벌할 뿐 아니라 진상을 만천하에 공개해야 한다.
그것이 국정원 개혁의 진심을 보이는 길이며, 그런 진심이 없다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언제 또 일개 비밀정보기관에게 침탈당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