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측근) 비리

‘실록’의 탄생

道雨 2017. 11. 27. 15:44






‘실록’의 탄생

강기석 | 2017-11-27 10:06:57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올해의 민주언론상 본상은 “안종범 업무수첩 51권 전권 단독 입수 및 연속보도”를 한 시사인 특별취재팀에 돌아갔다.





“우리 팀은 ‘안종범 업무수첩’을 ‘실록’이라 불렀습니다. 그 정도로 안 수석은 자신의 업무를 꼼꼼하고 부지런히 수첩에 기록했습니다. ‘기록하는 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기자들까지 펼쳐볼 때마다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 덕분에 박근혜 정부의 적폐가 업무수첩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 방대한 자료에는 안 전 수석이 청와대에 입성한 2014년 6월부터 검찰의 압수수색 직전인 2016년까지 ‘박근혜 정부 국정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 <수상 소감 중에서>



그러면 안종범은 왜 이리 열심히 박근혜의 말씀을 기록했을까? 나중에 박근혜의 악행을 고발하기 위해서? 천만의 말씀이다. 시사인 특별취재팀을 이끈 주진우 기자는 시상식에서 그 뒷얘기를 대략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처음에는 안 전 수석도 다른 수석들처럼 받아 적는 척만 했다. 사실 박근혜의 말이라는 게 수미일관 횡설수설이어서 받아 적는 것 자체가 난감했다. 그런데 수석회의 다음날이면 박근혜가 ‘어제 지시한 이러이러한 것 어떻게 진행하고 있지요?’라고 꼭 확인하더라는 것이다. 그제서야 ‘아차 이것 안 되겠구나’ 말이 되든 안 되든 일단 열심히 받아 적고, 나중에 말이 될 만한 것을 따로 분류하는 습관이 생겼다는 것이다.”

결국 충신 노릇이 나중에 주군의 악행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결정적인 물증을 제공한 셈이다.


주 기자의 말을 듣다 보니 KBS 사장을 했던 김인규 현 경기대 총장의 경우가 떠올랐다. 2012년 대선 때 이명박 특보를 한 보상으로 KBS 사장을 차지한 이 사람은 사장 재직 시절 거의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른 ‘KBS의 제왕’으로 통했다.

전하는 말로만 알려졌던 그의 폭군 행태가 최근 언론 전문지 「미디어오늘」에서 아예 시리즈로 폭로됐다.

당시 그가 간부회의에서 거의 원맨쇼를 하다시피 광분해서 내쏟았던 발언들이 거의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기록됐던 것이다.

 

이 역시 박근혜의 경우처럼, 누군가 후일 “김인규의 비행을 만천하에 고발하겠다”는 일념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다.

사정을 잘 아는 이로부터 내가 들은 바로는 당시 김인규 사장의 최고 충신으로 꼽히던 이가 (사장에게 잘 보이려고) 회의 때마다 그의 발언을 낱낱이 기록했다가 책으로 엮어 그의 퇴임식 때 증정했다는 것이다.

딱 두 부만 만들어 한 부는 주인공에게 증정하고 한 부는 기록자가 보관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떤 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유출됐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잘 해 보겠다” “눈에 들어 보겠다”는 의도에서 시작한 충성질이 전혀 뜻하지 않게 주군의 등에 칼을 꽂는 결정적인 비수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실록’의 탄생이 충신의 칼로 바뀐 셈이다. 그래도 전직 언론인의 입장에서 볼 때 역시 기록은 소중한 것이다. 성군의 충신이 한 기록은 후대의 귀감이 되고, 폭군 혹은 암군의 충신이 한 기록은 (뜻하지 않게) 후대의 경종이 되어 나름의 역사적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결은 다르지만 이런 이야기도 있다.

말을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유명한 한 재벌 총수와 역시 말을 횡설수설하는 것으로 유명한 한 언론사 편집국장이 두 시간여 대화하는 것을, 배석한 두 명의 재벌 총수 비서가 낱낱이 기록했다. 나중에 재벌 사사(社史) 혹은 사보에 쓰거나, 아주 좋은 말이 나오면 홍보자료에 쓰기 위해서다. 다른 재벌들도 중요한 자리에서 총수가 한 말은 늘 그렇게 기록한다고 한다.

그런데 대담이 끝난 후 기록을 정리하는데, 놀랍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한 줄도 없더라는 것이다. 분명 두 사람이 “허허! 그렇군요” “이건 어떻습니까” 맞장구치며 재미있게 대화했는데도 막상 글로 옮겨 놓고 보니 전혀 의미가 통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옛 사관의 고충을 이해할 만한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말도 어렵고 기록은 더 어렵다.
아니면 반대로, 기록도 어렵지만 말은 더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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