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좌수영(이순신 수사) 휘하의 5관5포 장수들
@ 초기 해전(3차 출동까지)의 전과
구분 |
1차 출전 (옥포~적진포) |
2차 출전 (사천~율포) |
3차 출전 (한산도~안골포) |
합계 |
비고 |
순천부사 권준 (종3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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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1 |
대선1 |
2척 |
1차 미참전 |
보성군수 김득광 (정4품) |
대선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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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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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군수 신호 (정4품) |
대선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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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1 |
3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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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현감 어영담 (종6품) |
대선1, 중선2, 소선2 |
대선2 |
대선1 |
8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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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양현감 배흥립 (종6품) |
대선2 |
대선1 |
대선1 |
4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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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답첨사 이순신 (종3품) |
대선3 |
대선1 |
대선1 |
5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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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첨사 김완 (종3품) |
대선3 |
대선2 |
대선1 |
6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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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도만호 정운 (정4품) |
대선1, 중선2 |
대선2 |
대선2 |
7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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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만호 황정록 (정4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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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1 |
1척 |
1차 가장 나대용 |
여도권관 김인영 |
중선1 |
대선1 |
대선1 |
3척 |
1593년 만호 승진 |
@ 이순신(1545. 3. 8 ~ 1598. 11. 19)의 주요 행적 (# 날짜는 음력 기준)
1576년 32세에 식년 무과에 급제.
1589년 12월 : 정읍현감 임명
1591년 2월 : 전라좌수사 임명
1592. 4. 13 : 임진왜란 발발
1592. 5. 4 ~ 5. 9 : 1차 출동 : 옥포대첩-합포-적진포
1592. 5. 29 ~ 6. 9 : 2차 출동 : 사천-당포-당항포-율포
1592. 7. 6 ~ 7. 13 : 3차 출동 : 한산대첩-안골포
1592. 8. 24 ~ 9. 2 : 4차 출동 : 장림포-화준구미-다대포-서평포-절영도-초량목-부산포
1593. 2. 6 ~ 4. 3 : 5차 출동 : 웅천포
1593. 5. 7 ~ 1597. 3. 5 : 6차 출동 : 견내량 막아서기 작전
1594. 3. 4 : 2차 당항포해전
1594. 9. 29 : 장문포해전
1597. 1. 13 : 정유재란 발발
1597. 2. 26 : 이순신 파직. (원균 삼도수군통제사 임명)
1597. 7. 15 ~7. 16 : 칠천량해전(조선함대 궤멸적 패배)
1597. 8. 3 :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복귀
1597. 9. 16 : 명량대첩
1598. 7. 24 : 절이도해전
1598. 9. 15 ~ 10. 7 : 장도해전 및 순천 왜교성 전투
1598. 11. 19 : 노량해전(전사)
@ 5관5포 장수들의 행적
* 낙안군수 신호(1539~1597) : 1597년 8월(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
1567년(명종 22년) 무과에 급제해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에 임명되었다. 그 뒤 북방의 외직을 전전하며 북방에서 변경을 수비, 그 후 내직으로 복귀하여 도총부도사, 경력 등을 지냈다.
1592년 당시 낙안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도와 견내량과 안골포 등지에서 공을 세워 활약했다. 통정대부로 임명되었다.
1596년 조선에서 역병이 생기자, 한산도 기지에서 백성과 수군들이 8,000명에 가까운 병사자들이 속출되었다. 약재와 의료품도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순신은 조정에 바칠 세금과 군량미를 약재와 의료품으로 바꾸려고 했으나, 수군 장수들은 그것을 말렸기 때문에, 결국은 조정에 바칠 수밖에 없었다.
신호는 죽어가는 조선 수군과 한산도 백성들을 위해, 그 세금과 군량미를 단독으로 몰래 약제와 의료품을 구매했다. 조정에 보낼 세금과 군량미로 약제와 의료품을 구매하여, 한산도의 수군과 백성들을 죽게 놔둘 수 없기에, 그들을 살리기 위해 사용했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조선 수군과 한산도 백성과 이순신을 위해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사임을 하였고, 조선 육군으로 근무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에는 교룡산성 수어사(蛟龍山城守禦使)로 있다가, 교룡산성에서 고니시 군을 맞아 싸웠으며, 그해 8월 남원성의 포위를 풀기 위해 올라온 이복남의 5천 군사와 합류하여 남원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 신호-김준계-선의문(선의경)-임계형-방덕룡(노량해전에서 전사)
* 순천부사 권준(1547~?)
조선 개국 공신 권근(權近)의 7대손이며 병조 참판을 지낸 권눌(權訥)의 아들이다. 첫 부인은 여산 송씨(礪山 宋氏) 부인(송달기의 딸)이며, 두 번째 부인은 창녕 조씨(昌寧 曺氏) 부인(조휘원의 딸)으로, 도원수 권율의 첫 번째 부인의 여동생이다. 권율과 권준은 계급상으로는 한참 거리가 있는 상하 관계에 있었지만, 사사롭게는 같은 문중의 친척(13촌)이며 동서지간이 되기도 하는 셈이다.
본래 문관(무과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이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종3품 순천 도호부사(현재의 순천시와 여수시를 모두 관할지로 함)로 재직하며, 이순신 휘하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전라좌수영의 5관 5포 중 가장 큰 고을인 순천 도호부의 부사였기 때문에, 실질적인 좌수영 내 2인자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증명하듯 가장 최상급자인 전라좌수사의 명을 직접 받아 전달하는 중위장의 역할을 권준이 맡았다.
이순신의 1차 출동 시에는 전라도 관찰사의 명령으로 전주에 있었기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2차 출전에서는 적군의 왜장을 화살로 쏘아 맞추고, 연이은 출전에서도 계속 공을 세워, 1595년 원균의 뒤를 이어 경상우도수군절도사(정3품)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종2품)에 임명되자 사직하였다.
그러나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자, 같이 충청도수군절도사(정3품)로 임명되어, 이순신의 막하에서 다시 재직하였으나, 경기도 지역 방어가 주 임무였던지라 해전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전란이 끝난 이후에는 경기도 방어사(종2품), 충청도 병마 절도사(종2품) 등을 지냈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책록되었으며, 안창군(安昌君)의 작호를 받았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부터 이순신과 함께 했던 사람으로, 사적으로도 매우 친밀했던 사이였다. 난중일기엔 권준이 잠깐 한산도를 비우는 시기와, 이순신의 파직 이후를 제외하면 권준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날을 찾기 힘들 정도. 같이 식사를 하며 여러 일을 논의하는가 하면, 술도 자주 마시고, 바둑을 두거나 활을 같이 쏘았다. 항상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을 찾아오지만, 가끔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직접 권준을 초청해 같이 식사를 하기도 했다. 또 권준의 생일에는 여러 장수들이 모여 같이 술과 음식을 먹으며 즐겼다는 기록도 있다.
추가로 남동생이 한 명 있는데,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권준과 함께 이순신은 그 남동생과도 자주 어울려 노는 모습이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둘이서 술 마시고 있는데, 동생이 사라져서 권준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동생의 경우에는 영상 매체에서 등장한 적이 없어 그 인지도가 매우 낮다.
1592년(선조 25) 순천도호부사(順天都護府使)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배속되어, 사천 해전, 한산 대첩, 부산포 해전 등에서 중위장(中衛將)으로서 활약하며, 조선 수군이 연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순신의 1차 출동 시에는 전라관찰사의 명령으로 전주에 갔음)
1594년(선조 27) 사간원(司諫院)의 청으로 끌려가 추문(推問)을 받았으며, 박진(朴晉)이 그의 후임으로 순천도호부사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충청도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를 거쳐, 1601년(선조 34)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가 되었으며, 1604년(선조 37) 왜란 때의 전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가 되었으나, 1607년(선조 40) 해랑도(海浪島)에 출몰한 수적(水賊)을 체포하지 못한 책임으로 과죄(科罪)되었다.
* 광양현감 어영담(1532~1596. 4. 9) : 전염병으로 병사.
어영담은 1564년 식년무과에 병과 3등(전체 11등)으로 합격했다. 어영담은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에 음직으로 만호(고흥군 점안면 여도)를 지냈음을 방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진해(鎭海) 여러 진(鎭)의 막하(幕下)가 되어, 해로의 험애(險隘: 험준하고 좁음)를 자세히 조사하여 선박의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다.
어영담은 1580년 12월 ~ 1582년 2월까지 사천현감, 1584년 2월 ~ 1585년 3월까지 무장현감, 광양현감에는 1591년 3월에 부임했다.
임진왜란 당시 광양현감으로서 이순신 장군 휘하의 장수였는데, 물길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여 이순신(李舜臣)의 수로를 인도하였으며, 거제, 옥포, 당항포 해전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광양 현감으로서 옥포해전부터 시작해서 1594년 초 제2차 당항포해전까지 모두 참전해 큰 역할을 했다.
한 번은 이순신과 웅천해전에 출전했을 때, 임발영이 광양현 순찰을 하면서 창고에 쌓인 600석의 양곡을 문제 삼아 어영담을 파직시켰다.
그러자 김두 등 126명의 광양 지역민들이 연서를 통해 곧바로 어영담 구명운동에 나섰다. 결국 이충무공의 요청에 의해 광양현감 직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윤두수 등에 의해 다시 창고의 군량미의 장부 외 저장에 대한 건으로 파직된다. 이순신장군의 장계로 다시 수군조방장이 되었다.
옥포, 합포, 적진포 지역에서 해전을 치러 총 42척의 왜선을 격파하며 승리를 이끌었으며, 6월 당포와 당항포, 7월 한산도, 안골포, 9월 부산포 해전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해전을 이끈 장수(將帥)이다.
1596년 전염병으로 죽었다.
이충무공이 어영담 장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다음 난중일기 내용과 장계 한 편을 보면 알 수 있다. 96년 4월 초9일(정사) 맑다. 시험을 마치고 방을 내어 붙였다. 비가 쏟아졌다. 어 조방장(어영담)이 세상을 떠났다. 애통함을 어찌 다 말하랴.
* 흥양현감 배흥립(1546~1608)
1572년(선조 5)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결성(結城)·장흥(長興)·흥양(興陽)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흥양현감으로 있을 때,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명에 따라 전함을 많이 건조해 전란에 대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옥포(玉浦)·합포(合浦)·적진포(赤珍浦) 등의 해전에 전부장(前部將)으로 참전하였다. 사천(泗川) 해전에서는 원균(元均)의 후부장(後部將)으로 이순신(李純信)·김득광(金得光) 등과 함께 참전하였다.
이어서 한산도(閑山島)·부산포(釜山浦)·웅천(熊川) 해전에 참전했으며, 1596년 장흥부사(長興府使)가 되었다. 재임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漆川粱)·노량(露梁) 해전에 조방장(助防將)으로 참전해 공을 세우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진하였다.
당시 지휘관이던 이순신(李舜臣)의 장계(狀啓)에 권준(權浚)·이순신(李純信)·정운(鄭運)과 더불어 해전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 일컫고, 논공행상할 것을 조정에 품의한 바 있었다.
특히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도수군절도사 최호(崔湖)가 전사하고, 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마저 도망하자, 전선을 도맡아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1600년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듬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603년 공신도감에서 선무공신(宣武功臣)을 택정할 때 이순신(李舜臣)·원균과 함께 26인의 명단에 올랐으나, 그 뒤에 확정된 18인에는 들지 못하였다. 1604년에는 왜란 중에 세운 공로로 무인 출신으로는 드물게 공조참판이 되었다. 이어서 충청도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다시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07년 총관(摠管)으로 영흥대도호부에 부임했다가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였다.
* 녹도만호 정운(1543~1592. 9. 1) : 부산포해전에서 전사.
1570년 선조 3년에 28세로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훈련원봉사, 금갑도수군권관(金甲島水軍權管) 등을 거치고, 함경도 거산찰방(居山察訪)을 거쳐, 1583년 함경감사 정언신의 추천을 받아 승진하여,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591년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상우수사 원균이 구원을 요청하자, 전라수군절도사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과 함께 결사적으로 출전할 것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적을 토벌하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없다. 적의 예봉을 꺾어 놓아야 전라도도 보전할 수 있다.”
그 후 거제 앞바다에서 원균을 만나 옥포(玉浦)에서 왜선 30척을 격파하고, 노량에서 적선 13척을 불살라 공을 세웠다. 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1592년 9월 부산포 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절영도에서 적의 대포를 맞아 전사하였다. 이때 안타깝게도 이 적의 대포는 바로 붙잡힌 조선 포로가 쏜 대포라고 한다. 정운의 사망으로 이순신은 오른팔을 잃은 셈이 되어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어떤 의도이건 간에 정운은 전승무패의 부담을 안고 있는 이순신에게 적극적인 전투를 주문한 것으로 보인다. 1594년 정곤수가 선조에게 "정운이 '장수가 만일 출전하지 않는다면, 필시 전라도는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겁박하여 출전하게 하였다."라는 대목(상기와 동일한 대목)이나, 1597년 선조 30년 김응남이 선조에게 "정운이 이순신이 나가 싸우려 하지 않는다 하여 참하려 했다"는, 당쟁의 비방이 엿보이는 과장적인 기록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이 정운의 영전에 올린 제문
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이야 정말로 아까울 게 없으나
유독 그대의 죽음에 대해서만 나의 가슴 아픈 까닭 무엇인가요.
국운이 불행하여 섬 오랑캐들 쳐들어오니
영남의 여러 성들 바람 앞에 무너지고
몰아치는 그들 앞에 막아서는 자 하나 없고
도성도 하루 저녁에 적의 소굴로 변했다오.
천리 먼 길 관서로 임금님의 수레 넘어가시니
북을 향해 바라보며 장탄식할 때 간담 찢어지듯 하였지만
아, 나는 노둔하여 적을 쳐서 섬멸할 계책이 없었는데
그대 더불어 의논하니 구름 걷히고 밝은 해 나타나듯 하였다오.
작전을 세운 후 칼 휘두르고 배를 잇달아 나갈 적에
죽음을 무릅쓰고 자리 박차고 일어나 앞장서서 쳐들어가니
왜놈들 수백 명이 한꺼번에 피 흘리며 쓰러졌고
검은 연기 하늘을 뒤덮었고 슬픈 구름 동쪽 하늘에 드리웠도다.
네 번이나 싸워 이겼으니 그 누구의 공이었는가
종묘사직 회복함도 몇 날 남지 않은 듯하였을 때
어찌 알았으랴,
하늘이 돕지 않아 적의 총알에 맞을 줄을
저 푸른 하늘이시여, 당신의 뜻은 참으로 알기 어렵나이다.
배를 돌려 다시 쳐들어가 맹세코 원수를 갚고 싶었지만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바람조차 불순하여
소원 이루지 못해 평생 원통함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오.
이 일을 말하고 나니 나의 살 에이듯이 아픕니다.
믿고 의지했던 것은 오직 그대였는데 앞으로는 어이하리
진중의 여러 장수들 원통해하기 그지없다오.
백발의 늙으신 부모님은 장차 그 누가 모실는지
황천까지 뻗친 원한 언제 가서야 눈을 감을는지.
아, 슬프도다. 아, 슬프도다.
그 재주 다 못 폈을 때 지위는 낮았으나 덕은 높았으니
나라의 불행이고 군사들과 백성들의 복 없음이로다.
그대 같은 충의야말로 고금에 드물었으니
나라 위해 던진 몸 죽었으나 오히려 살아 있음이어라.
아, 슬프다. 이 세상에 그 누가 내 마음 알아주랴.
슬픔 머금고 극진한 정성 담아 한잔 술 바치오니
아, 슬프도다.
# 정운-송여종
*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1553~1611) :
이순신(李純信)은 조선 중기의 왕족, 무장, 유학자이다. 임진왜란 때에 활동하던 장수로, 그의 상관이기도 했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의 구별을 위해, 무의공 이순신, 입부 이순신으로 불린다. 본관은 전주. 양녕대군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의 4대손이자,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9대 방조가 된다. 시호는 무의(武毅), 자는 입부(立夫)이다.
양녕대군의 후손으로 1578년(선조 11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의주의 판관, 혜산진 첨절제사로 근무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중위장·전부장으로 옥포·합포·적진포·당포·한산도·부산포 해전 등에서 활약하였고, 정유재란 후반에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하면서 일시적으로 그의 역할을 대행(代行)하기도 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전사한 이억기처럼 왕실종친이기도 하다.
학봉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1577년(선조 10) 9월 알성별시(謁聖別試) 무과 을과에 급제하였으며, 활쏘기 대회에서 장원한 상으로 북방 방위에 차출되는 것을 면제받았다. 1580년(선조 13)에 탄핵을 받고 선전관에서 파직되었으나, 그 해 겨울 다시 복관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582년(선조 15)에 비국랑(備局郞)을 겸임하고, 이듬해 4월에 강진현감에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강진의 지역 호족(豪族)들과 마찰을 빚어 1585년(선조 18)에 파직당하였다.
그 뒤 특별 별명(別命)을 받아 선전관에 복직되어 어전을 호위하다, 옛 스승인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1586년(선조 19) 함경도 온성부 판관이 되었다.
1588년(선조 21)에 아버지상을 탈상하고,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발탁되어 명나라 사신 수행업무를 맡게 되었다. 이때 사절단의 행차 시 뇌물을 요구하는 것을, 노자만 주고 모르는 체하자, 명나라 사절단이 귀국길에 문책하려 함에, 군무를 잠시 떠났다가 탄핵당하여 파직됐다. 1589년(선조 22)에 함경도 혜산진첨사(惠山鎭僉使)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침략을 막으러 나갔으나, 부임 도중 발병하여 적군이 관하(管下)의 운총벽(雲寵壁)을 네 차례나 침입함을 막지 못하여 함경도 조방장 한극성(韓克誠)의 문책을 받았으나 선조가 특별히 은전을 베풀어 감율(減律)을 명했다. 그러나 전 상사와의 불화로 부하관과 함께 삼수(三水)로 가게 되자, 선조는 그를 파직하여 귀양보냈다.
2년 후에 일본통신사 일행이 왜구의 변을 고하자 재등용되었으며, 1591년(선조 24) 방답진첨사(防踏鎭僉使)로 부임되어, 무신끼리의 사보연통(私報緣通)으로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전선(戰船) 제작에도 참여하여 자문하였고, 관내의 성지(城池), 기계(機械), 축성과 제작에 전력함으로써, 망루(望樓), 주로(舟櫓), 군기영기(軍旗令旗)들이 일제히 정비 되었다.
임진왜란
전란 초기 활동
충무공 이순신의 수하로 수군 장수로 복무하였으며, 공로로 선무공신(3등)이 되었다. 임진왜란 직전인 임진년 정월에 방답진 첨사로 이순신 장군의 휘하에서 수군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 동안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했다. 1592년(선조 25) 4월 왜적이 침입해 오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으로부터 관하 전선 24척을 총동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5월 2일부터 수군 중위장, 수군 전부장으로 수군 병력을 이끌고, 옥포(玉浦) 해전에서 적선 50여 척, 합포(合浦) 해전에서 적선 5척, 고성(固城) 해전에서 적선 13척, 노량(露梁) 해전에서 적선 1척, 사천(泗川) 해전에서 적선 12척을 격파하여 이순신의 신임을 받았다.
6월에는 당포(唐浦)까지 나가 적선 20여 척을 불사르고, 경남 거제도(巨濟島)의 적 근거지로부터 적선 10여 척이 지원오는 것을 격파하였으며, 당항포(唐項浦)로부터 엄호하는 적선 26척과 포구에 있는 적선 5척을 격파하였다. 또한 사살한 적이 수백 명에 이르고 비단군복에 대검을 짚고 있던 적장도 1명 생포하였으며, 노획품 가운데는 적의 부장들의 결사혈진시킨 지련(祗聯)이 6권이나 되었다.
7월에는 가덕도, 거제도에 적선을 추격하다 견내량(見乃梁)의 적선 73척을 발견하고, 하루 종일 한산(閑山) 앞바다로 유인하는 일을 전담하여 끝내 적을 몰살시켰다. 연이은 승전으로 가덕도에 주둔하던 왜군은 한산도 패전에 겁을 먹고 사기가 떨어졌으므로 공이 먼저 나가 육박하여 적선을 격침하였다. 9월, 적들이 위축되어 부산 앞바다에 잠복하고 있는 것을 공이 선봉장이 되어 화존포(和尊浦)에서 적선 5척을 유인하여 격파하고, 서대포(西大浦)에서 8척을, 서평포(西平浦)에서 9척을 격파하고, 절영도(絶影島)에서도 적선 2척을 섬멸하였다. 9월에 들면서 부산 앞바다의 왜적 근거지를 섬멸하기 위한 초계(哨戒)와 탐보(探報)를 수없이 수행한 끝에, 적선 5백여 척이 세 곳으로 분진(分陣)하고 있는 것을 포위 전멸시키는 등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적의 사기를 기습공격으로 좌절시켰으나, 계속되는 기습공격으로 공의 부하들은 적의 수급을 모을 기회를 놓침으로써, 공의 공적이 조정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아,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고심하였다고 <난중일기(亂中日記)>에 적고 있다.
1593년(선조 26) 적군이 화의를 내세워 접전이 뜸한 동안에, 충무공 이순신은 보고서에 “이순신(李純信)은 호남 영남 개전 이래 10회에 걸쳐 1회는 중군(中軍)을, 9회는 선봉을 맡아서 오직 적의 기세를 꺾는 데 전념하느라고 적의 수급을 모아 공적을 자랑할 겨를이 없기에 특별히 앞세워 상계(上啓)했건만, 논공(論功)이 홀로 순신(純信)에게 미치지 못하와 유전지공(有戰之功) 무전지상(無戰之賞)이라는 군심(軍心)의 원망이 있습니다.”고 보고하였다.
이순신의 보고를 받은 선조로부터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제수, 특진되었으며,1594년(선조 27) 충청도수사(忠淸道水使)에 보직되었다. 충청수사 재직 중 형률을 엄히 적용했는데, 왕명을 받고 파견된 왕명특사(王命特使)는 군율을 엄격하게 한다며 형벌과중(刑罰過重)으로 보고하고, 보령(保寧) 토호 김태국(金泰國)이 사노(私奴) 한손(漢孫)을 시켜서 낸 고변도 조정에 보고되어 구금 조사받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에 다시 풀려나 고령진첨사(高嶺鎭僉使)로 강등되어 임명되었다.
1596년(선조 29)에 발병하여 첨사직에서 사임하였다가 충청수사로 복귀했다.
정유재란
1598년 왜적의 재침이 전해지자, 비변사에 의하여 그는 유부수군장(留部水軍將)으로 임명되었다.
전라도 고령도(高嶺島)에 군사를 머물게 하고, 전비를 가다듬어 흥양(興陽)에서 적선 30여 척을 괴멸시켜 일승을 올리자 선조대왕은 특별히 가선대부에 승차시켰다. 이후 이순신의 막하에서 중위장으로 노량해전에 참전하였다. 적의 우두머리 행장(行長)이 전남 순천(順天)에 성을 쌓고 지킴으로, 명나라 장군 유정(劉綎)과 진린(陳璘)이 해구(海口)를 수비하다 행장(行長)이 드디어 거제 · 해남 · 고성의 패잔병을 총동원하여 야습을 감행해 왔다. 충무공 이순신 이하 전군은 총공격을 준비하고, 예비복병인 공은 적의 귀로를 추격하여 남해 노량의 여울목에서 쳐들어오는 적과 대접전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전사하게 된다.
전란 종결 이후
임진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제독 진린에 의해 충무공 이순신의 뒤를 이을 통제사로 천거 받았다. 1599년(선조 32) 1월에 수사직을 물러나서 포도대장 겸 도총사 총관에 임명되었으며, 1600년(선조 33)에 충청수사 · 수원부사 · 경상부사를 역임하였다. 1601년 황해도병마절도사가 되었으나 재물을 탐한 죄로 다시 파직되었고, 1602년(선조 34년) 창원부사로 부임했다가 도임한지 얼마 뒤인 그해 3월 체임되었다. 1604년 첨지부사가 되었고,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1604년부터 전라방어사·수원부사·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 등을 역임했다. 1607년 완천군(完川君)에 봉직되었으며 이후에는 전라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포도대장, 훈련대장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냈다. 1609년 (광해군 1)익사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611년(광해군 3년) 9월 2일에 59세로 별세하여, 현재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현 광명시 일직동)에 장사되었다. 인조 때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追贈)되었다.1679년(숙종 6년)에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제수 받았다.
《무의공 이순신 묘》는 경기도 광명시 일직동에 있다. 1987년 9월 10일 광명시의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되었다.
* 사도첨사 김완(1546~1607)
1546년 영천에서 태어났고, 1577년 무과 병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올랐다. 1591년 전라좌수영 소속 사도 첨절제사(蛇渡僉事)로 제수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옥포 해전과 당포 해전에서 우척후장(右斥候將), 한산도 대첩과 부산포 해전에서는 척후장으로 활약하였다. 후일 대병장(代兵將)으로도 활약하며, 이순신이 참전한 주요 해전에 참가해 전공을 세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이순신이 원균의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자, 권준과 같은 장수들이 사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균을 보좌하였다.
칠천량 해전에서 조방장이 되어 전투 중, 일본 수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일본으로 압송됐지만, 탈출해 귀국하였다. 선조로부터 해동소무(海東蘇武)라는 어필을 하사받고, 함안군수에 임명되었으며, 1607년 고향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 발포만호 황정록( ?~? )
발포만호 황정록(黃廷祿)의 본관은 장수이며, 동래도호부사 황박(黃博)의 아들이다.
문음을 통해 정계에 진출하여, 1581년(선조 14) 기장현감에 제수되었지만, 수령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황정록은 3년간 발포만호로 근무했다. 한산해전 때 그는 발포함대를 이끌고 나아가, 한산해전에서 일본전함 1척을 불태우고 적군 수십 명을 사살했다. 그 후 안골포해전과 부산포해전에서도 공을 세웠다.
1597년 바다를 다시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이순신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원균이 조선수군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그해 7월 발포함대를 이끌고 일본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한 조선함대는,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함대의 기습을 받았다. 조선수군함대는 이때 거의 궤멸되었고, 그 과정에서 황정록도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1)
발포만호성과 사당 충무사가 있는 도화면 발포리 바닷가에 건립된 발포역사전시체험관은, 왜란 당시 지역의 수군과 의병들이 국난 극복을 위해 일본군을 물리친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 전시체험관 뒤의 언덕 위에는 황정록의 부인 송씨 동상이 세워져 있다. 부군의 전사 통지를 받아 든 송씨 부인은 비통한 마음에, 갓난아이를 업고, 큰아이는 양팔에 껴안고, 마을 동쪽에 있는 우암바위에서 바다에 투신, 순절했다.
(황정록이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남아, 변방에서 외직을 역임했다는 설도 있다)
* 여도권관 김인영(1543~?)
본관은 선산이며, 전남 보성 출신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여도권관(呂島權管)으로서(여도만호는 공석이었음), 이순신(李舜臣)의 지휘 아래 좌척후장(左斥候將)이 되어, 옥포에서 최초로 적선을 발견하고 신호용 화살을 쏘아 올려 본대(이순신 함대)에 알렸다.
옥포해전(玉浦海戰)에 참전하여 왜선 1척을 쳐부수고, 이어 당포해전(唐浦海戰) 때는 우별도장(右別都將)으로 크게 활약하고, 제3차 한산해전(閑山海戰)과 1594년 3월의 당항포해전(唐項浦海戰) 때는 우척후장(右斥候將)으로 참전하는 등, 항시 앞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엔 여도권관이었으나, 1593년에 여도만호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문벌이 낮고(무과에 급제한 기록이 없다), 중앙에 밀어주는 세력이 없어서, 벼슬이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에 올랐을 뿐이었다. 이에 이순신이 조정에 계문(啓文: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서 왕에게 올리는 글)을 올려 포상을 청하기도 하였다.
1597년(선조 30)에는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다시 수군통제사가 되자, 명량해전(鳴梁海戰)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뒤에 현감에 제수되었다.
* 보성군수 김득광(153* ~ ?)
본관이 원주김씨로 서울 출신이다. 출생 연도 미상.
[김득광의 둘째 동생인 김득휘가 1542년생이며 1572년(선조5년)에 무과 별시에 병과로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진왜란 초기에 이순신의 휘하 장수로서, 1차 출동(옥포~적진포)시 우부장으로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원균이 말하는 이순신의 다섯 아들에 포함된다.
1592년 6월(또는 7월)에 의병장(초토사) 고경명과 전라도 방어사 곽영에게 배속되어, 금산성 탈환 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1593년 6월에 보성군수에서 교체된 후에는 육전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는 설이 있다.
왜란이 끝난 후 훈련원 검정(訓練院僉正)(1601), 삭주부사(朔州府使)(1604)를 역임했다는 기록이 있다.
# 김득광-김의검-안홍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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