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금성의 시크릿 파일 '공작'
- 김당 지음
제1권
제1장 : 청와대 VS 시사저널 '밀가루 전쟁'
* 대북 쌀 지원 선박(씨아펙스호)의 인공기 게양 사건과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으로, 김영삼 정부가 공식적으로는 대북지원 중단을 외치면서, 물밑으로 몰래 북한에 식량을 지원했다는 취지의 시사저널 기사.
'1996년 4월쯤 청와대는 월드컵 남북한 공동개최를 추진하기 위해, 현대그룹이 제공한 100만 달러로 구입한 밀가루 5,000t을 극비리에 북한에 제공했다'
- 시사저널이 해당 기사를 삭제하고 전량 재인쇄하고, 이미 발송한 부수를 수거하는 등 노력했으나, 청와대는 미 수거된 20부를 문제삼아 고소함. 황장엽 망명 후 고소 취하.
* 96년 총선 북풍 : 남측이 북측이 요구하는 식량과 비료를 비롯한 생필품을 중국을 통해서 지원하고, 북측은 그 대가로 총선 일주일 전부터 휴전선 전 지역에서 준전시 상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으로 거래가 있었으나, 북측이 남측의 요구대로 응하지 않고, 판문점에서 1개 중대 규모 병력이 무력시위를 하는 선에서 그침.
* 현대 외에 다른 대기업 세 곳이 225만 달러를 제공해,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수양딸 박명애 씨가 북한에 밀가루와 생필품을 지원.
- 1997년 2월 12일, 황장엽이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찾아가 망명을 요청.
* 광고기획사 '커뮤니케이션 아자'의 박기경 대표의 집과 마주한 집으로 박채서 이사.
제2장 : 언 땅에 '자본주의의 꽃'을 심다
* 국군 정보사 공작관 박채서 소령
- 육군3사관학교 14기로 임관, 국방대학원 석사과정, 육군대학 졸업 후 국군 정보사령부 공작단으로 발령.
- 대기 중 공작단장에 고가의 휴대폰 선물(당시 가격 350만원), 한미합동정보대 A-23팀장으로 보직.
- '검은 머리 미국인'은 한국내 각 분야 지도급 인사로 약 380명.
위키리스크 폭로 : 김현종(통상교섭본부장), 조태용(외교통상부 북미국장), 김승호(청와대 비서관),
이상득(국회의원, 이명박의 형)
- 리비아 공작 : 카다피의 비밀 방공호 건설공사(대우건설 시공) 정보 이용, 카다피 위협.
- 북한 핵개발 첩보 수집 위한 조선족 교수 김만효(휴대용 대공미사일 유도장치 전문가), 김상헌(핵물리학자) 포섭 공작, 북한의 핵개발이 공식 확인되었으나, 미국은 한국과 정보 공유를 하지 않음.
* 안기부 대북공작국이 주목한 '포대갈이' 사업 : 중국산 농산물을 북한에서 포장만 바꾸고, 북한 당국의 원산지 표시 증명만 받음.
- 안기부는 박채서(소령, 정보사 공작관)를 전역시키고, 안기부 공작원(서기관급)으로 스카우트.
* 흑금성 공작
- 암호명 '흑금성'
- 공작계선 : 박채서 공작원(서기관), 이강복 전문공작관(부이사관), 송봉선 공작2단장(이사관), 남영식 8국장(관리관, 이후 조직개편으로 이대성 '203실장'), 권영해 안기부장
- 조총련계 서재호와의 만남 : 농산물 세탁, 신덕샘물, 고철 사업(민스크호 등)
- 베이징 루푸트한자 센터의 캠핀스키 호텔 : 대우그룹이 독일 루푸트한자 그룹과 합잣해 만든 호텔. 박채서와 북한의 대선공작반이 치열한 첩보전을 펼친 거점이자 전쟁터.
- 북한에 포섭되기 위한 신분 세탁과 미끼 던지기 : 인사와 진급에 차별받고 불만에 뛰쳐나온 자로 위장. 금전 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불명예스럽게 전역한 장교. 북한 보위부 반탐과장(김영수) 상대.
- 장현철(장성택의친형인 장성우 인민군 상장의 아들)의 포대갈이 사업을 접촉.
장현철은 장성우, 장성택, 장성길 3형제의 자식 중에서 유일한 아들이며,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의 시댁인 장씨 집안의 대를 이을 장손임.
* 장성택의 장조카 장현철에 올라타기
- 정부는 그동안 일부 무역업자들이 중국산 농산물을 북한산으로 위장해 반입하는 정황을 감지했지만, 대북 교역 활성화 차원에서 눈감아 주고 있었음.
- 박채서는 정월 대보름에 대비해 북한산 호두와 잣 등을 평소 보다 3배가량 늘려, 수입가로 50만 달러어치를 넘게 구매한 후, 관세 당국에 미리 손을 써서 북한산 농산물을 검역한다는 구실로, 인천항 출입 기자을 대동하고 공개 확인토록 함. 이튿날 신문에 대서 특필됨.
- 신용장이 결제되면 중국인들에게 지불하기로 약정한 장현철은 곤란한 처지에 빠짐. 중국의 수출업자들이 중국 공안에 장 씨를 고소하고, 중국 당국은 짱씨를 출국할 수 없게 연금 조치.
- 최후통첩 10일을 앞두고 물품 대금 정리해줌.
* 리철의 등장과 노동당 조사부의 100만 달러 유혹
- 박채서와 1954년생 동갑내기 리철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수석 졸업자로, 북한의 대외경제위원회 심의처장 직위. 황장엽이 김일성대 총장으로있을 때 정치경제학과에서 자본주의 경제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근무했고, 1994년 한국으로 귀순한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과 김일성대 박사원에서 동문수학.
리철의 부친은 상장 계급의 군인. 장인은 양강도 당비서, 부인은 로동신문 기자.
- 리철은 리철운, 리호남 등의 가명을 사용했으며, 경제사업과 이권을 챙기는 능력이 탁월함.
- 노동당 조사부 리인의 100만 달러(대남 공작 활동을 권유) 제안을 거절.
* '짝퉁 롤렉스' 시계로 공작의 막힌 곳을 뚫다.
- '부총사장'(윤기철 북가안전보위부 부부장, 현역 중장, 안기부 차관급에 해당하는 직책, 김정일의 측근)과 함께 베이징의 3대 백화점으로 꼽히는 루푸트한자 센터의 엔사백화점 구경. 시가 7만 달러짜리 롤렉스 시계에 관심.
당시 북한 처녀 총각들이 가장 선호하는 결혼 예물이 시계였음.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짝퉁 롤렉스 시계(정상 가격이 700만원)를 200만원에 구입해서 부총사장에게 선물함.
이후 북한측과의 광고사업이 순행함.
- 정보사 박중윤 중령(박채서와 3사관학교 동기)이 당시 단둥에서 (주)쌍방울 단둥지사의 이사로 위장 근무중이었는데, 북한 측이 납치 의사를 보이기에, 그들에게 반대 의사를 피력하고, 안기부에 보고하여 박중령을 귀국 조치시킴. 정보사에서는 박채서가 북측에 박중령을 노출시켰다고 보고했지만, 안기부는 정보사의 보고를 믿지 않음.
* 실패한 정보사 공작
- 박중윤을 데려가는 데 실패한 북한 정보당국은 1998년 3월 같은 목적으로 중국에 나가 활동하던 정** 중령(3사 17기)을 납치했다. 정** 중령은 중국 단둥의 한국 고려인삼공사 지사장으로 위장 근무중 납치됨.
북한 당국은 납치한 정** 중령에게 이중스파이 임무를 주면서 6개월 만에 풀어줌.
천용택 국방장관은 보도를 통제하고, 정**를 군무원 2급으로 특채해 정보사에 계속 근무토록 하고, 사건을 종결시킴.
- 1997년 정보사공작단의 이** 중령(3사 13기)이 북한 군 당국의 초청으로 방북하는 타이완 첩보부대 방북단에 슬쩍 편승해 들어갔다가 현지에서 신원이 탄로 나 체포되자, 자살을 기도. 북한 당국은 치료 및 보호 시설의부족과 타이완 첩보부대와의 교류 및 우호 관계를 감안해 얼마 뒤에 이 중령을 석방함.
- 1995년 박** 대위(육사 39기)가 중국 선양에서 공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됨. 북측 정보요원들은 그의 전화를 상시적으로 도청함. 박대위는 신분이 노출되었음에도 계속 진급하고, 2000년대 초반에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육군 무관(대령)으로 근무함.
- 북한의 미인계에 걸린 정보사 공작단 장교 조** 소령(육사 37기)은 북한 정보당국의 농간에 걸려 6천만 원가량의 개인 채무를 지고도 대령까지 진급함.
-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육군 무관보좌관 이** 중령(육사 38기)은, 중국의대표적 폭력조직인 삼합회와 북한 당국간의 마약 거래선을 침범하여, 신변 위험으로 국내로 도피 송환시킴. 이** 중령은 대령 진급 후 베이징 주재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다시 나갔으며, 삼합회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삼합회의 보복 살해 위협을 모면했다.
* 북한 역공작에 말려든 금창리 핵시설 의혹
- 금창리 핵시설 확인은 정보사가 포섭한 조선족 공작원을 투입해 금창리 부근 토양을 채취해 분석한 결과 핵시설로 판명된 것이다. 미국 정부는 한국과의 정보 협조를 근거로 금창리 지하시설을 핵시설로 확신했다. 한국정부도 금창리 투양 채취 공작을 수행한 정보사와 국정원 관계자들에게 훈장도 주고 포상했다.
그런데 금창리 핵시설 의혹은 북한의 역공작에 말려든 것이었다. 나중에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가 북한에 침투해 파악한 바로는, 북한은 국정원-정보사의 조선족 활용 공작을 꿰뚫고 있었다. 북한은 한-미 대북공작에 혼선을 주기 위해 조선족을 포섭해 관련 자료와 핵물질이 든 토양까지 제공해 역용한 것이었다. 국정원-정보사는 그런 줄도 모르고 대어를 낚은 것 처럼 반기고 관계자들을 포상했던 것이다. 당시 공작단장은 이효명 준장(갑종 189기)이었고, 역공작에 말려든 그의 부하들이 금창리 핵시설 의혹을 확인한 대북공작을 수행한 공로로 훈포장을 받았다.
- 미국 정부는 1998년 정보사 첩보를 바탕으로 북한의 금창리 핵시설 의혹을 제기하고 사찰단까지 파견했으나, 금창리 지하시설이 핵시설이 아님이 공식적으로 밝혀져 망신을 샀다.
북한은 미국의 금창리 방문을 허용하고, 미국은 이에 대한 대가(핵시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경우 보상하기로 약속)로 북한에 50만톤의 식량을 지원하고, 씨감자 1천톤과 감자 증산 계획에 필요한 식량 10만톤과 전년도에 지원하기로 했던 식량 30만톤을 제공키로 함.
제3장 : '자본주의의 꽃'에 숨은 편승공작
* 대북 광고사업과 삼성, 묘향산 동굴 속의 골동품
- 국가안전보위부 반탐과장 김영수와 보위부 베이징 연락책 리철은 가끔 골동품을 한두 점씩 가지고 나와 처분을 부탁했다.
골동품계의 숨은 실력자 한광무 선생과 함께 방북하여, 묘향산 국제친선관람관 근처의 산속 동굴을 방문하여 감정한 결과, 한국돈으로 8천억~1조원 정도 어치의 골동품 확인.
- 묘향산의 국보급 골동품들은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대를 이어 수집해 놓은 개인 소장품이며, 이 골동품 기획을 주관한 사람은 김정일 총비서의 여동생이자 장성택의 부인인 김경희였다.
- 묘향산 골동품과 경수로 사업으로 삼성과 접촉. 삼성의 방북 직전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발발로 김영삼 대통령은 대북 교류 협력 전면 중단 선언함.
*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의 남북 협상 테이블
- 남북한 광고사업 협상팀이 캠핀스키 호텔에서 만나 협상. 남측은 아자팀과 삼성, 북측은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광명성경제연합회 명성회사
- 북한 각 명승지를 돌며 삼성 애니콜 광고 촬영
- 다 된 밥에 재 뿌린 황장엽 망명 작전.
- 황장엽이 망명을 요청한 지 3일 후,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이 아파트 입구에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경을 헤매다가 끝내 숨짐.
- 대형 악재 속에 나온 김정일의 O.K 사인 : 남북한이 처음으로 역사적인 광고제작 계약서를 체결.
* 보위부 제1부부장과 김정일을 만나다.
- 박채서의 등골 오싹케 한 적의 테스트
김영룡 부부장과 동석한 보위부 국장의 협박 : 박채서 가족들(딸들, 모친)의 근황 사진을 보여주고, 부여에 차명으로 사 놓은 땅까지 물어봄.
- 보위부장 "박선생, 6.25가 남침이요, 북침이요?"
김영룡 부부장은 충성 서약과 입당을 요구, 박채서가 거절하자 총구를 그의 이마에 갖다 대고 협박.
- 김정일과 면담, 김정일의 관심사
김정일이 표명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묘향산 골동품 처리와 그해 12월에 있을 한국 대통령 선거였다.
북측은 김대중 후보를 배척하고, 이회창 후보는 '친일분자의 후손'이라는 이유를 들어 싫어하여, 상대적으로 이인제 후보를 선호하였다.
- 김대중 후보 배척 이유 : 김대중은 아주 노련한 정치인으로서 북에서 다루기가 어렵고 까다로운 존재이며, 나이가 많아 연장자를 우대하는 풍토에서 김정일이 상대하기가 껄끄럽다.
* '김대중-이회창 죽이기'와 '이인제 띄우기'
- 강덕순 "이회창 잡안은 친일분자"
이회창의 부친 이홍규는 일제시대 황해도 서흥 등지에서 검찰 서기로 근무하면서 우국지사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다.
이회창 후보가 네댓 살 무렵에 황해도 서흥에서 아버지와 함께 유카타(기모노의 일종으로 목욕옷)를 입고 찍은 사진 보여줌.
"사진에 기록된 이 날짜는 일본제국주의가 황해도에서 처음 창씨개명을 한 날짜와 일치합니다. 이회창 집안은 황해도에서 맨 처음 창씨개명을 한 친일 조선인입니다."
- 김대중 낙선 공작
김대중 후보와 가까운 천도교 교령 오익제를 자진 월북시켜 김대중과 연계시킨다.
구체적으로는 김대중 후원회 활동을 오래 한 오익제가 김대중 후보에게 편지를 쓰게 해 활용하는 방안, 특정 인물을 내세워 기자회견을 하는 방안, 선거 직전에 부풀리거나 조작한 김대중-북한 연계 자료를 공개해 선거판을 흔드는 방안 등 다양하게 준비.
이인제 후보에 대해서는 그의 대북 정책과 선거 공약 등을 적극 지지하거나 호응해서 입지를 강화시켜 준다.
- 금수산 궁전의 '황금 거북이'와 '고난의 행군'
주석궁의 홀 입구에는 순금으로 만든 '황금 거북이'가 유리관 속에 진열돼 있음.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이 장군님께 바친 진상품입네다"
대우그룹이 북한측과 합영하여 남포 경공업 단지 개발사업을 할 때, 안기부가 공장 건설 초기에 베테랑 공작요원 2명을 대우 측 기술-관리 인력으로 위장해 침투시켰다가, 북한 보위부에 발각됨.
대우 측은 사죄의 의미로 몇 가지 고가품을 선물했는데, 그 중 하나가 50만 달러 상당의 '황금 거북이'임.
박채서가 활동할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중이었다. 식량 배급량이 절반 이하로 줄고, 적게는 수십만 명에서 많게는 수백만 명이 기아로 죽었다.
- 평양골프장에서 골프 친 공작원과 미인계
평양골프장은 조총련이 1987년 4월에 건설해 북한 정부에 기증했다고 함.
박채서가 평양에 오면, 보위부가 가장 크게 선심을 써서 준비한 접대는 평양골프장 라운딩.
박채서가 평양골프장에 들른 날은 골프장 직원들에게 잔칫날이 됨.
지배인에게 미리 500달러를 줌. 라운딩이 끝난 후 2층 식당에 전 직원이 모여 여흥즐길 상차림.
평양 외국어대를 졸업한 노영옥(당시 24세)을 안내원으로 붙여 유혹.
- 평양골프장에서 2만 달러 내기 골프
보위부 고위층 인사들이 '창광 가라오케 주인을 한 번 혼내주라'고 요청. 1만 달러씩 내고 내기 골프에 이겨, 1만 달러는 회수하고, 딴 1만 달러는 심판을 본 대가로 김영룡 부부장에게 줌.
김영룡은 창광 가라오케에서 박채서의 요청으로 수행원들의 가족까지 포함한 축하파티를 함.
- 최덕근 영사와 이한영 피살 미스터리
상부로부터 부여받은 미션 : "최덕근 영사와 이한영 피습 사건에 대한 북한측의 반응을 탐문해보라"
최덕근 영사는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한국영사관에서 근무하던 1996년 10월 1일, 퇴근하던 길에 자신의 아파트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됨.
최영사의 시신에서는 북한 공작원들이 독침에 사용하는 독극물 성분이 검출됨. 원통형 물체로 머리를 8차례 가격당해 심한 두개골 손상을 입음. 예리한 물체로 오른쪽 옆구리 부분을 찔림.
당시 최영사는 북한의 달러 위조와 마약 밀매를 추적 중이었음.
1997년 2월 15일 밤, 김정일의 전처인 성혜림의 조카 이한영이 성남시 분당 아파트의 대학 선배 집으로 들어가다가 괴한이 쏜 권총 2발을 머리와 가슴에 맞고 살해됨. 1997년 10월 27일 안기부가 부부간첩 최정남, 강연정(체포 후 음독 자살)을 체포하면서 북한 공작원의 소행으로 알려짐.
김영룡의 말 :
"최덕근은 우리 공화국의 무역거래(마약거래를 지칭함)에 너무 깊숙이 추적해 들어오길래 몇 번을 경고했는데 듣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경고의 의미로 몽둥이로 때려죽인 겁니다. 이한영은 안기부에 가서 물어보시라우."
"우리는 이한영이 같은 배신자를 죽이려면 고도로 훈련된 특수부대원을 시켜 보란 듯이 잔인하게 죽입니다. 그럴 경우 몽둥이와 도끼를 사용해 효과를 극대화합니다. 권총같은 무기는 사용하지 않습네다. 부득이하게 권총을 사용하더라도 잘 훈련된 명사수들인데 남조선이 발표한 것처럼 미숙하게 사격했을 턱이 있나요? 배신자 이한영이 같은 경우 더욱 잔인하게 죽이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방식입니다."
- 상부(안기부)에서 알려준 이한영에 대한 사실
1982년 스위스 어학연수 중 한국으로 망명 당시 회사(안기부)에서 차관급 대우를 약속했음.
망명 후 15년 동안 수차례 사업 실패와 무분별한 낭비벽으로 인해 과도하게 금전을 소비했음.
지속적인 사업지원 요구와 경호 문제의 어려움 때문에 회사가 애를 먹음.
최근 언론(월간조선)과의 접촉 등 통제 불능 상태로 골치를 썩였고, 장기간의 보호와 금전 지원으로 관계 부서에서 거의 포기 상태였으며,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어졌음.
특히 성혜림이 한국 망명 의사를 밝혀왔지만, 이한영에게 시달림을 당한 수뇌부의 미온적인 대응으로 성사되지 못했음.
- 박채서는 당시 상부로부터 임무 부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이한영의 죽음은 북한 측의 소행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졌다. 김영룡의 반응과 상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면 북한 측 소행이 아님이 분명.
북한이 아닌 다른 집단에 의한 범행은 당시 한보 스캔들로 터진 김영삼 정부의 비리에 대한 관심을 황장엽 망명과 이한영 씨 피살로 돌리려 했다는 음모론과 연관됨.
제4장 : 김대중 과녁을 향해 날아온 '3중살'
* 평양에서 받은 선물과 고민 보따리
- 공작원이 정권의 눈치를 보며 정보활동을 하면, 정권의 맛에 맞는 첩보만 수집하거나 정보를 왜곡 보고하게 되므로, 오로지 국익만을 생각해 있는 그대로의 첩보 수집활동을 해야 한다.
- 김대중 후보가 각종 여론조사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북측이 '김대중 죽이기' 공작을 전개하고, 남한의 특정 세력이 이에 연계되어 있음을 확신.
- 김대중에게는 우군이 없었다.
청와대(김영삼)와 북측(김정일)은 이인제를, 안기부(권영해)는 이회창을 밀고, 이들 3자 공동의 '김대중 죽이기'
- 박채서의 정동영 접촉과 '오익제 입북' 제보
박채서의 세 가지 신념
1. 북한이 대선에 개입해 한국의 대통령 선출을 좌우하는 상황만큼은 절대 막아야 한다.
2.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정책 실패가 다음 정권에서도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다.
3. 적(북한)이 낙선시키려 하는 국가 지도자라면 역으로 우리한테 가장 필요한 지도자가 이니겠느냐.
북한은 세 후보 중에서 이인제 후보를 가장 선호했고, 김대중 후보를 가장 기피했다.
- 박채서는 정동영(국민회의 대변인)을 만나 북한의 대선개입 의도를 설명하며, 몇 가지 북풍 공작 징후와 북풍 주의보를 전함. 특히 천도교 교령 오익제의 입북이 성사되면 '김대중 죽이기'의 신호탄이 울린 것으로 보면 된다고 귀띔.
'오익제 입북설'이 현실로 나타나자, 정동영은 '기획 입북설'을 제기하고, 국민회의는 천용택 의원을 팀장으로 한 '북풍 대책팀'을 구성함.
국민회의는 이후 대선일이 다가올수록 '북풍 주의보'가 '북풍 경보'로 확대됨에 따라, 2단계(팀장 정대철 부총재)와 3단계(팀장 조세형 총재권한대행)로 북풍대책팀을 확대 개편함.
* 아자의 광고사업과 편승공작
- 박채서는 정보사 공작관 시절의 인맥을 활용해 정진호(정석모 자민련 부총재의 장남으로 대북사업 희망)를 소개받아, 박기영과 함께 (주) 아자를 설립. 회사 이름은 '커뮤니케이션 아자'에서 '아자 커뮤니케이션'으로 바꿈.
지분은 정진호가 70%, 박기영과 박채서가 각각 15% 갖기로 합의.
삼성전자 윤종용 부회장의 참여로, 삼성전자가 아자가 북한에서 제작한 광고를 독점하기로 합의.
- MBC의 병 주고 약 주기, 박채서의 약 주고 병 주기
아자는 북한에 500만 달러를 주기로 하고 대북 광고사업권을 따냄. MBC는 아자가 북한과 체결한 총금액의 절반을 부담하는 조건으로 TV 프로그램 촬영권리 양도받음.
김영삼 대통령과 반기문 외교안보수석의 지시로 MBC 유흥렬 전무의 방북 계획이 있었으나, 권영해 안기부장은 MBC 유흥렬 전무의 방북을 이인제 후보를 지원하기 위한 대북 밀사로 의심하고, 그의 방북을 무산시킴.
* 아자 답사팀의 방북과 겹친 오익제 입북 사건
박기영 대표와 박채서 전무, 박기영의 처남인 변승우 작가로 구성된 아자 사전답사팀의 방북은 1997년 8월 10일부터 21일까지 순조롭게 진행됨.
금강산은 인민군 헤리콥터를, 백두산은 고려항공 항공기를 이용해 방문함.
답사팀은 평양에서 김일성의 생가인 만경대를 방문해 뜻밖의 인물(천도교 교령을 지낸 오익제)을 만났으며, 대동강변의 냉면집 옥류관에서도 오익제씨와 마주침.
(박채서는 이미 두 달 전에 정동영 의원을 만나 오익제 월북 가능성을 경고한 바 있었음. 천도교 교령 오익제의 입북이 성사되면 '김대중 죽이기'의 신호탄이 울린 것으로 보면 된다).
박채서는 북측의 소개로 오익제와 인사를 나누고, 일부러 기념사진(상부 보고용)도 함께 찍었다.
1995년 국민회의 창당 때 고문으로 입당한 전 천도교 교령 오익제는 종교특위 위원장을 맡기도 함.
김대중 후보의 북풍대책팀은 '안기부의 기획 입북설'을 제기하며, 역공을 취함.
- 통일부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한 아자의 방북결과보고서
남북교류협력법 제정 이후 수많은 기업인들이 북한을 다녀와 방북결과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이렇게 군용 헬기와 전세기를 타고 북한 전역을 누비고 다닌 방북팀은 처음이었다. 전문 사진작가가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의 절경을 찍은 사진까지 첨부.
삼성전자는 300만 달러에 광고주로 가계약을 체결함.
* 금강산 가는 문을 열다.
- 금강산 문 열면 비자금 모을 수 있다.
금강산 관광을 관장하는 북측의 주무부서는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였다.
"현금 장사인 관광사업을 통해 비자금 조성이 가능하다."
북측의 통치자금을 김정일의 누이동생인 김경희가 관리하고 있음을 알게 됨.
'이대성 파일'의 공개로 흑금성 공작원의 신분이 노출됨에 따라, 삼성전자가 스폰서인 광고제작사업은 물거품이 되고, 삼성이 참여하는 금강산 관광 및 개발계획도 취소됨.
북측은 당시 토의된 관광 개발계획과 청사진을 토대로, 이후 현대 측과 협의해 골프장, 온천장, 식당 등 상가, 해금강 개발 등을 이뤄냈다.
- 추석 연휴 김우중 회장의 수상한 비밀방북
김대중 후보 진영에서는 오익제 월북 사건을 계기로 북풍 공작의 위험성을 실감하고, 본격적으로 '북풍 대책팀'을 가동함. 이후 2단계(정대철 팀장)를 거쳐 3단계로 조세형 총재권한대행(팀장), 이종찬 부총재, 천용택 의원 등으로 확대.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초대 국정원장(이종찬)과 두 번째 국정원장(천용택)을 맡음.
청와대의 내락을 얻은 김우중 회장의 비밀방북은 일종의 '청와대 특사'를 의미하는데, 박채서의 제보와 두 매체의 보도로 김우중 회장의 비밀방북 사실이 확인되자, 국민회의는 북풍대책팀을 정대철 부총재를 팀장으로 하여 확대 개편함.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 정재문 의원의 대북 비밀접촉 사실을 확인하면서, 조세형 총재권한대행을 팀장으로 3단계로 확대 개편함.
- 정동영-천용택 접촉과 흑금성의 위기일발
박채서와 야당과의 접촉을 의심한 안기부 감찰실에서 박채서를 미행, 감시하거나 도청 함.
박채서는 대선(대선 후보)과 관련한 내용들(이 중에는 허위정보도 있다)도 정보 보고 하였는데, 이 내용의 '일부'가 나중에 한겨레에공개된 '이대성 파일'의 일부인 '해외공작원 정보보고' 문건에담겨 있는 것들이며, 이 문건이 공개됨으로써 '흑금성'이라고 부르는 이중공작원의 신분이 드러난 것이다.
- 베이징 21세기호텔에 진을 친 북한의 대선공작반
북측의대남 대선공작반은 베이징의 21세기호텔에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활동.
남측은 청와대와 이회창 후보 진영, 안기부가 각자의 대북 라인을 가동해 대북접촉을 시도.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이회창에게 패한 이인제는 경선에 불복해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선 레이스에 참가.
북측은 이인제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해 창당 전 정강정책 등 관련자료를 입수했는데, 박채서가 파악한 바로는 북측에 자료를 제공한 주체는 안기부 라인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의 '김대중 비자금 의혹' 폭로를 묵인한 것도 이인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탓.
김영삼은 권영해 안기부장의 북풍공작을 '이인제 대통령 만들기'로 잘못 알고 있었음.
* 김대중을 향해 날아온 '3중살'
- 1997년 북풍의 서막, 부부간첩사건
10월 27일 남파 부부간첩 최정남-강연정이 안기부와 겅찰 보안수사대에 의해 체포되고, 곧이어 고영복 서울대 명예교수가 이들과 접선한 혐의로 체포됨.
최정남은 고첩 활동 사실을 털어놓았고, 강연정은 체포된 다음 날 숨겨둔 '독가스 앰플'을 깨물어 의식불명이 되고 3일 후 삼성의료원에서 사망.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위반(회합-통신) 혐의로 고씨와 그 가족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지만, 간첩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확정 선고했다.
- 부여 간첩 김동식 사건의 재판(再版)?
1970년대 이후 직파간첩이 체포된 적은 거의 없었는데, 김동식은 같이 남파되었다가 사살된 박광남과 함께 북에서 직접 보낸 '직파간첩'이었음.
김동식은 '이남화 교육'을 받고 1990년 1차 침투공작에 성공해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음.
최정남은 '주사파의 대부'인 김영환을 팔면 쉽게 포섭할 줄 알고, 재야단체 간부에 접근했다가 쉽게(?) 검거됨.
- 김동식의 '봉화 1호' 대동 입북 임무
봉화1호의 신원은 공개된 바 없다. 검거된 시기로 보아 1980년 봄에검거된 고위급 공작원 '도원1호(박병엽)'나 그와 함께 검거된 다른 익명의 공작원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도원1호'는 한홍구 교수가 "남북의 간첩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건"이라고 밝힌 '박병엽 사건'의 그 박병엽이다. 대만의 정보 당국이 대만에 잠입하려던 도원1호 등 두 명을 체포하여 남한 당국에 넘겨주었다. 체포 뒤에 전향한 '도원1호'는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로서 북한의 대남사업과 관련하여 엄청난 분량의 고급 정보를 제공했다.
- 봉화1호와 남해 미조리 간첩선 사건
안기부는 1980년 4월에 침투한 봉화1호를 체포한 뒤에, 그럴 포섭해 역공작에 활용함. 그에게 '나를 북으로 데려가 달라'는 무전을 치도록 해, 공작선이 내려오게 유인한 뒤, 해안으로 침투하는 간첩응 사살하고, 간첩선을 격침시킨 것이다.
- 부부 간첩 최정남을 활용한 공작선 유인 공작
최정남-강연정은 부부공작조이면서도 각자 독자적인 무전기와 대북통신망을 갖고 있었으며, 강연정이 남편보다 상부선이었다. 북측은 최정남이 보낸 무전 내용(복귀용 공작선 요청)을 의심하고 강연정이 보내도록 하였으나, 죽은 강연정을 대신해 무전을 보낼 수 없어서 안기부의 간첩선 유인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 안기부의 '북한 직파 부부간첩 및 연계 고첩망 수사결과'를 공식 발표한 11월 20일, 석 달 전에 밀입북한 오익제가 평양에서 쓴 편지가 서울로 날아들었고, 베이징에서는 이호ㅚ창 후보의 한 측근이 북한의 안병수 조평통 위원장(대리)을 비밀리에 만나 '모종의 거래'를 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김대중이라는 과녁을 향해 세 군데서 날아 온 화살(삼중살)이었다.
제5장 : 북풍의 분수령 오익제 편지 사건
* 평양에서 날아든 오익제 편지
- '평양시 중구역' 소인이 찍힌 오익제 편지
평양우체국 소인이 찍혀있는 북한 우표가 붙어있어 북한에서 발송된 우편물로 판단한 목동의 서울국제우체국에서 편지를 개봉해 확인한 결과, 발신자가 오익제인 것으로 밝혀짐.
- 김영삼 "공개하지 말라", 권영해 안기부장은 공개 방안 강구
권영해 부장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오익제 편지 사건을 보고했으나, 김영삼 대통령은 "편지를 공개할 경우 물의를 야기할 우려가 있으니 공개하지 말라" 고 지시했다.
안기부는 오익제 편지 적발 사실과 압수수색영장을 청구하고 언론 보도됨.
- 안기부 vs 김대중, 사생결단의 전면전
김종필이 기자회견으로 안기부에 직격탄.
* 평양발 '김대중 죽이기'에 올라탄 편승공작
- 안기부 '기본대응계획'대로 전국 각지에서 김대중 규탄대회
- '오익제 녹음테이프' 공작과 '오대산' 공작
안기부는 평양방송에 보도된 오익제 연설 내용 중 김대중 후보와 관련된 부분을 녹음테이프로 제작. 해외 언론에서 보도되도록 하고, 국내 언론이 이를 인용 보도하도록 함.
우리 교민들이 밀집해 있는 북경, 동경, 홍콩 등 5개 해외 거점장들에게 지시.
- '간발의 차이'로 사법처리 면한 이병기 차장
이병기 차장(해외담당 2차장)은 박일용 차장(국내 담당 1차장)으로부터 "국내 부서에서 언론과 협조가 되어 잘 처리되었다"는 연락을 받고, 해외 거점에 대한 활동 중지를 지시했다. 이 '간발의 차이' 덕분에 이병기 차장은 나중에 검찰의 북풍 사건 수사에서 사법 처리를 면했다.
박차장의 기대와 달리 KBS를 비롯한 방송사에서는, 안기부가 배포한 '오익제 녹음테이프'가 연설 전문이 아닌 짜깁기한 편집본이고, 시기적으로 늦었다는 이유로 방송을 하지 않았다.
안기부는 오익제 편지를 적발한 후에 '이적성 감별'을 완료했으며, 북한 대남 공작부서에서 15대 대선과 관련한 '대남 공작 책동의 일환'으로 판단하였다. 북한의 오익제 편지 발송이 '김대중 죽이기' 공작이라는 사실을 안기부 수뇌부가 뻔히 알면서도 '김대중 낙선공작'을 했으며, 이는 북한의 '김대중 죽이기' 공작에 올라탄 일종의 편승공작이었다.
결국 오익제 편지 사건은 대선 기간에 북한의 대남 공작부서가 의도적으로 보낸 오익제 편지가 적발된 것을 계기로, 안기부 수뇌부에서 색깔논쟁의 확산을 통해 김대중 후보의 낙선을 기도한 안기부의 조직적 정치·선거 개입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권영해 부장 등 안기부 간부들이 안기부법과 공직선거법을 위반한 혐의로 대거 사법 처리되었다.
- "도와 달라", 김대중의 간곡한 요청
김대중 후보는 박채서에게 "도와 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김우중 비밀 방북과 오익제 월북, 그리고 편지 공세 가능성을 사전에 경고해준 박채서에게 직접 도와달라는 메세지를 전달.
정동영-천용택에게 결별을 선언한 뒤 국민회의 측과 접촉을 끊었던 박채서는 김대중을 돕기로 결심.
북측 대선공작반은 '이인제 대통령 만들기'라는 목표를 상실해, '김대중 죽이기' 보다는 자신의 '잇속 챙기기'에 바빴다.
박채서는 강덕순 참사 등 북측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을 만난 후에, 호텔 방에서 가방의 돈다발을 꺼내 놓고 세는 것을 지켜보았다. 미화 100달러짜리 100장을 묶은 1만 달러 뭉치를 자기들 가방에 옮겨담는 것이었는데, 눈대중으로 셈을 해보니 360만 달러나 되는 거액이었다.
돈을 건넨 한국인들은 이회창 후보의 외교특보인 정재문 의원과 재미교포 사업가 김양일씨 등이었다. 이들이 선거 직전에 휴전선 일대에서 준전시 상태를 방불케하는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하면서 1천만 달러의사례를 약속했고, 선불금 조로 돈 가방을 건넸다고 한다.
박채서는 이런 사실을 상부에 긴급 보고했고, 동시에 김대중 후보 진영에도 귀띔해 주었다. 정재문 의원은 귀국 즉시 국정원 요원들에 의해 르네상스 호텔에서 두 차례 조사를 받음.
* 정재문 의원의 '북풍 뒷거래' 의혹
- 북한의 '편지 공세'와 '오익제 비디오테이프'
정재문이 안병수를 만나 북풍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거액(360만 달러)을 제공.
정재문 의원은 국회 통일외무위원장이자 정보위 소속으로, 이회창 후보의 대북, 외교 정책 분야 핵심 참모 노릇을 했다.
- 안병수 위원장 비서가 김양일에게 보낸 팩스
국민회의는 정재문-안병수 교섭의 근거로 안병수 조평통 위언장 비서인 리상대가 이 교섭을 주도한 재미교포 김양일씨에게 보낸 팩스 서신의 사본을 공개함.
김당 기자는 대선 이틀 전에 발매된 시사저널(제426호)에 정재문 의원이 북측에 거애ㅐㄱ의 달러를 제공하고 오익제 편지 공세 등 북풍을 요청했다는 내용을 담은 "한나라당, '북풍 만들기' 뒷거래 의혹"을 단독으로 보도했다.
- 김양일 "알선 대가로 500만 달러를 받기로 했다"
- 제2탄은 오익제 비디오테이프?
김당은 시사저널에 "제2탄은 오익제 비디오테이프?"라는 제목의 기사를 써서 끼워 넣었다.
12월 12일 오익제 연설이 평양방송에 보도되고, 안기부가 이 가운데서 김대중 후보아 관련된 부분을 짜깁기해 녹화테이프로 제작해 TV방송 등에 배포함으로써 김당의 기사는 결과적으로 특종이 되었다.
재미교포 윤홍준은 김대중 후보를 음해하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12월 11일 베이징에서 했는데, 언론에 보도되지 않자, 12월 13일 다시 도쿄에 가서 기자회견을 했다. 그리고 도쿄 회견도 보도되지 않자, 윤씨는 선거 이틀 전인 12월 16일 서울에 입국해 여의도 63빌딩에서 기자회견을 한 후 즉시 김포공항을 통해 도피했다.
대선 하루 전날인 12월 17일 국민회의는 윤홍준에 대한 고발장과 출국금지 신청서를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접수, 남부지청 김오수검사는 윤홍준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를 취함. 윤홍준은 자기가 출국 금지된 입국 통보대상자인 줄 모르고 다음 해 입국했다가 체포됨으로써, 권영해 안기부장의 친전 공작인 '아말렉 공작'은 허망하게 끝났다.
- 4.11 총선 당시 '북풍 뒷거래' 의혹
1996년 4.11 총선 당시 북풍(북한군의 판문점 무력시위)
4.11 총선을 앞두고 당시 여권(청와대, 신한국당)과 안기부 간부들은 대북 비선(밀사)을 통해, 북한의 체제 유지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지원해 주는 대신에, 총선 전에 '적정한 수준의무력 시위'를 해달라는 주문을 함.
'밀가루 북송 사건'은 남북한 간 뒷거래로 진행된 대북 지원사업의 빙산의 일각.
* 김현철 사단의 정권 재창출 프로젝트
- 북한 붕괴 대비한 김현철 사단의 '국정 운영 제언서'
한보 사태가 터져 정권 재창출을 위한 대북 프로젝트가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함.
- 김현철과 재벌2세 '황태자 그룹'
김현철의 대북 프로젝트 간련 의혹 : 한보의 대북 투자사업, 한보와 관련된 미국 곡물 메이저 카길사의 대북 곡물 판매, 황장엽 비서 망명, 남북정상회담 메세지 전달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이라는 돌발변수와 전문성 부족으로 상당 부분 실패.
- 한보 청문회에서 불거진 '김현철 사조직'과 황장엽 망명 개입
황장엽이 망명하기 전에 황씨나 황씨의 대리인인 김덕홍 씨를 접촉한 인물은 수십 명에 이르나, 두사람의 망명을 결정적으로 중개한 핵심 인물은 이연길 북한민주화촉진협의회 회장과 김숙향 천보산업 고문 두 사람이다. 이씨는 수십 차례나 중국, 러시아를 방문해 공작 활동을 펼쳐왔는데, 그중 하나가 황장엽, 김덕홍 망명 공작이었다.
황장엽은 자신의 김정일 제거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망이 없고, 신변 위험이 느껴지자,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황씨는 망명 이후의 신변을 보장받기 위해 남한 내 최고 권력자(김영삼 대통령)의 직접적인 담보를 요청했고, 김현철은 이의 확인을 위해 방중함.
- 황장엽 망명이 '실패한 공작'인 까닭
황장엽 문제로 안기부는 김현철씨를 포함한 사조직과 갈등을 빚었다. 안기부는 황장엽이 한국보다는 북한에 남아서 통일사업을 수행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한건주의에 사로잡힌 김현철 캠프가 안기부의 특급 정보(망명 의사)를 가로채 일부 조직을 동원해 접촉하고 개입함으로써, 황장엽은 망명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빠졌고, 오랫동안 공을 들여온 안기부는 공작 목표를 포섭에서 유인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씨의 망명은 결과적으로 김정일에게는 충격을 주었을지는 모르지만, 남북관계를 오히려 더 악화시켰다.
* '북풍 공작'에서 '총풍 공작'으로
- 박관용 비서실장의 대북 비선 '장석중-김진송 라인'
대선일이 다가와도 이회창의 지지율이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초조해진 이들은 '네거티브 카드' 쪽으로 대북 카드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1997년 11월 20일 신한국당이 한나라당으로 바뀔 무렵에 정재문 의원은 베이징 장성호텔에서 강덕순 아태평화위 참사와 안병수 조평통 부위원장을 두 차례 만나 대북지원을 대가로 '북풍 뒷거래'를 했다.
- 옥수수 박사 김순권 방북 중개한 '장백산' 장석중
중국 선양의 조선족 사업가인 김진송(민족경제개발공사 총경리)의 어머니는 김일성과 함께 항일 빨치산 할동을 한 서순옥이다. 김진송은 어머니 덕분에 북한을 마음대로 오가고 고위층도 만날 수 있었다. 장석중은 이러한 김씨를 후원하며 대북사업을 시작했다.
장석중은 '옥수수 박사'로 유명한 경북대 김순권 교수를 북한으로 데리고 가서 남북한 농업 협력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 김영삼에서 이회창으로 갈아탄 '나사본' 출신들
- 총풍 3인방의 '007 코스프레'와 총격 요청 '불장난'
이회창 후보가 아들 병역 문제로 불리한 상황에서, 4.11 총선 때처럼 판문점에서의 무력시위를 요청함.
제6장 : 아마추어 '총풍 공작'과 프로의 '아말렉 공작'
* 총풍은 판문점 북풍 '학습효과'의 산물
- 유사시 '알리바이'와 장진호-이회성의 역할
-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 특실 1538호
- "1개 소대만 움직여 주면 됩니다"
"현재 지지율을 보면 이회창 후보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안을 만들려고 하는데, 그 대안은 TV화면이 잘 잡히는 판문점에서 무장군인 1개 소대가 왔다갔다 하면서 무력시이를 해서 긴장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TV 영향력은 대단합니다. 무력시위 장면이 9시 저녁 뉴스 시간에 딱 나가면 선거는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됩니다. 시기는 선거 3~4일 전에 12월 14일이나 15일이면 좋겠습니다. 요청을 들어준다면 김순권 박사를 12월 20일까지 북에 보내주고, 새정부 출범 전까지 수퍼옥수수 종자, 비료, 영농자재 등을 지원해 식량난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 불발로 끝난 총풍 사건의 수사 단서를 어떻게 포착했나
불발로 끝난 판문점 총격 요청 사건은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난 1998년 10월 '총풍 사건'으로 공개되었다.
당시 안기부와 서울지검 공안1부가 공식, 비공식으로 밝힌 사건의 개요는, 비선 3인조가 1997년 11월부터 이회창 후보 지원 방안을 모의해 '총격 요청'을 계획하는 한편, 대선정책 보보서를 작성해 이회창 후보에게 전달했고, 12월 10일 장석중, 한성기가 베이징 캠핀스키 호텔에서 북한측 인사를 만나 대선 3~4일 전에 총격전을 벌여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판문점 총격요청 사건'은 국가의안녕과 민주주의의 뿌리를 뒤흔드는 국기문란 사건이었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할 공무원인 청와대 행정관과 민간인들이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재벌의 자금지원으로 비선조직을 가동하고, 급기야 북측과 내통해 선거에서 기ㅣㄴ장을 조성할 목적으로 총격까지 요청했다.
* 총풍의 전개과정과 '북풍대책팀'의 활약
- "리참사가 한성기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한다"
흑금성 공작원은 '신한국당 이회창 총재 특보' 명함을 가진 한성기라는 인물이 북측 인사들을 만나 총격을 요청한 사실을 즉시 안기부에 보고했고, 아울러 그가 접촉해온 국민회의 정동영 의원 측에도 관련 정보를 귀띔해 주었다.
- 국민회의에 울린 '북풍 경보'와 북풍 막은 '일등공신'
흑금성은 리철 참사에게 한성기씨를 조회한 결과를 통보함과 동시에, 한 씨의신분이 불확실하니 제안에 응하지 말라고 충고했고, '북측 파트너'로부터 "총격 요청에 응하지 않겠다"는 '신뢰할 수 있는 답변'을 들었다. 흑금성은 북풍 공작을 막아 김대중 후보를 당선시킨 '일등공신'이었던 셈이다.
- 북한은 왜 총격 요청에 응하지 않았나?
북측의 목표는 이회창 당선이 아니라 돈을 챙기는 데 있었다. 또한 박채서와 리철은 오랜 접촉을 통해 인간적인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
리철운(리철)의 주 임무는 외자 유치 및 방첩활동으로, 특히 방북하려는 남한 인사들의 신원을 파악해 가부 판정을 내리는 거였다.
'아태위 참사 박충'은 강덕순의 가명이다. 1997년 베이징에서 '대선공작반'을 지휘할 당시 현역 장성 신분인 강덕순은 통일전선부의 부부장급 대남공작 실무 총책이었다. 강씨는 대선 전에 신한국당 이명박, 정재문 의원을 만났을 뿐만 아니라, 중앙일보, MBC, 스포츠 아트, 탤런트 김혜자 씨 등의 방북을 허가한 실력자였다.
당시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는 30일 동안 방북 조사하는 명목으로 아태평화위원회와 6만 달러에 계약했다고 통일부에 신고해 승인을 받았다. 중앙일보가 강덕순 참사에게 지불한 방북 비용은 50만 달러로 알려졌다.
김일성의 외가인 '칠골 가계'(강반석 집안) 출신인 강 씨는 2017년 2월 북한 정찰총국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김정남 피살 사건 당시의 강철 주 말레이시아 북한대사와 동일인물인 것으로 밝혀졌다.
장석중씨는 사업상 필요에 의해 리철을 접촉했고, 안기부 공작원 노릇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식 공작원이라기보다는 사업상 대북 접촉을 할 때마다 안기부에 정보를 제공하는 '비정규직 공작원'이었다.
- 흑금성의 특수첩보와 권영해의 특수직무유기
안기부는 흑금성 공작원의 특수첩보를 검증한 결과,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해, 김포공항으로 귀국하는 한 씨를 연행해 조사했다. 이대성 203실장은 한 씨를 조사한 결과, 첩보상의 당사자와 일치하고, 첩보 의 일시, 장소에서 북측 인사들과 접촉했다는 점, 이회창 후보 특보라는 명함, 후보 사진, 대선 전략 보고서 등, 이회창 후보의 대통령 선거운동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할 만한 물건을 소지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확인했다고 권영해 부장에게 보고함.
권부장이 별도의 지시를 하지 않아, 이대성 실장은 한성기를 석방함.
권영해 부장이 특수첩보와 수사의 단서를 대공수사국으로 이첩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국가보안법 사ㅏㅇ의 '적'을 이롭게 한 특수직무유기를 저지른 것은 총풍 사건을 묻어서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음성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어설픈 아마추어 공작원들이 베이징에서 북측에 총격을 요청하는 '007 코스프레'를 하고 있던 그 순간에, 권영해 부장 스스로가 김대중 후보를 낙선시키고 이회창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아말렉'이라는 비밀 공작을 실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걸리적거리는 걸림돌로 여겼던 것이다.
* 마지막 북풍, 아말렉 공작
- 북풍 공작의 온상이 된 캠핀스키 호텔
'진로그룹 고문'으로 활동한 한성기, 아마추어 공작원 윤홍준과 안기부 공작관 이대호(이재일), 흑금성 박채서 등이 머물던, 1997년 12월 베이징 루프트한자센터 캠핀스키 호텔은 북풍 공작의 온상.
미국 국적의 재미교포 사업가 윤홍준은 12월 11일 할러데이 인 호텔에서 기자회견(김대중 후보는 북한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받은 연북 인사가 분명하다고 주장)을 했지만, 회견장에 나온 기자는 베이징 한국기자단 간사인 김영근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MBC 기자 등 4명 뿐이었다.
기자회견이 끝나자, 김영근 간사는 다른 기자들과 함께 10쪽짜리 기자회견문과 사진 등 자료를 검토한 뒤에, 김대중 후보가 연북 인사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가 희박하고, 기관이 개입한 냄새가 난다는 결론을 내리고, 특파원들은 본사에 정보보고만 하고 보도하지 않기로 합의를 봄.
국내 언론에 보도되지 않자, 윤홍준은 12월 12일 도쿄 임페리얼 호텔에서 같은 방식으로 회견을 하고, 베이징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자회견문과 사진을 배포했다. 국내 언론은 이번에도 기자회견 소식을 보도하지 않았다.
안기부가 김대중 후보의 연북 혐의를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ㄱㅁ대중 후보에 불리한 여론을 조성하려고 기획한 '아말렉 공작'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문제는 아말렉 공작이 공작원의 첩보를 토대로 공작관이 기획한 '바텀업 공작'이 아니고, 부장 친전의 '탑다운 공작'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말렉 공작은 '국가공작'도, 정식으로 예산이 배ㅐ정된 '인가공작'도 아니었지만, 부장의 '관심 사업'이었다.
-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와 '위험한 재탕'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윤홍준 기자회견 공작이 베이징과 도쿄에서 예정대로 실행되자, 권영해 부장은 12월 13일 이대성 203실장을 불러 20만 달러를 윤홍준에게 주라며 건넸다. '공사' 전에 건넨 착수금 5만 달러를 합치면 25만 달러였다.
송봉선 203실 2단장은 윤홍준을 서울로 불러들여 기자회견을 하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원래 서울 기자회견은 처음 윤홍준 기자회견 공작을 기획할 때부터 권영해 부장이 요구했던 바였다. 하지만 이대성 203실장이 "국내에서 하면 위험핟"고 반대해, 해외 기자회견만 하는 쪽으로 정리가 된 것이다.
-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C급 공작'
베이징, 도쿄 기자회견과 달리, 서울 기자회견은 보수단체 회원들이 '박수부대'로 참석한 가운데 63빌딩 샤론홀에서 성대(?)하개 열렸으나, 방송은 물론, 조선,중앙, 동아일보조차도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이 허위사실로 가득찬 기자회견을 보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 '기울어진 운동장'을 탓할 만큼 두 사람은 언론에 대해 무지했다. 언론이 기자회견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황당하다고 느낄 만큼 내용이 허술했기 때문이다.
- 부장님 지시 말씀 "공작명은 '아말렉' ... 금일 착수할 것
* 아말렉 공작 전개 과정과 '자발적 협조자'
- 착수금 5만 달러와 '아말렉 추진계획'
권부장이 이대성 실장에게 건넨 행정봉투 속에는 100달러 지폐로 5만 달러가 들어있었다. 아말렉 공작의 착수금이었다. 이 실장은 이 가운데 2만 달러를 기자회견 비용으로 윤홍준에게 주도록 하고, 3만 달러는 원화로 환전해 두었다가 나중에 윤홍준-이재일이 구속되자, 변호사 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 이 과장, 주 상무, 김 전무 등 위장명칭과 위장 여권
- 안기부의 '자발적 협조자' 윤홍준
- '고인돌 사업'의 단초
제7장 : '아말렉 공작과 '007 코스프레'
* 아말렉 공작의 첫 단추는 '고인돌 공작'
- 아마추어 공작원 윤홍준의 '007 코스프레'
- 첫 단추부터 잘못 꿴 '고인돌 공작'
- '상황버섯' 메모가 상(上)은 北, 황(皇)은 김정일로 둔갑
- 고인돌, 이스턴, 상황사업 ... '문어발식 페이퍼공작'
고인돌(또는 상황) 사업은 유력한 대선 후보의 북한 연계 혐의와 곤련한 극도로 민감한 사안인 만큼, 안기부 '내부 보안'보다는 '외부 보안'을 위해 비인가공작으로 추진했을 가능성이 크다. 안기부 수뇌부가 처음부터 불법공작을 상정해 불법성을 은폐하기 위해 부장이 관리하는 특수공작 예비비를 사용하는 비인가공작으로 추진했을 가능성이 크다.
권영해 부장이 상황사업을 종결 처리하면서 윤홍준의 협조에 대한 대가(실제로는 김대중 후보 비방 기자회견을 실행한 아말렉 공작의 대가)로 20만 달러의 거액을 부장이 관리하는 특수겅작 예비비에서 지급한 것도 그러한 가능성을 뒷받침 한다.
'고인돌 사업'으로 추진하다가 공작목표로 부터 '상황버섯' 메모가 튀어나오자, '상황사업'이라는 공작명을 붙인 것도 비인가된 여건 조성 단계에서 담당관이 관련 특수첩보를 근거로 자의적으로 사업명칭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작 성과를 과장하기 위한 '문어발식 페이퍼 공작'인 셈이다.
- 잇단 채증 실패에도 아말렉 공작을 실행한 까닭
* 15대 대선의 '마지막 뇌관'
- 북한의 마지막 '최후의 카드'
임동원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의 대북 접촉 여부와 김대중 후보의 일본 체류 당시 한민통과의 관계로서, 북측은 이와 관련된 사진과 육성 연설 녹음테이프를 공개할 의도를 품고 있었음.
박채서는 베이징에서 이철을 만나 김대중을 낙선시키기 위한 북한의 최후의 카드를 포기할 것을 설득함.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뒤흔들지 모를 '마지막 뇌관'을 제거한 박채서는 ,선거 전날인 12월 17일 서울로 돌아옴.
선거가 끝난 후 박채서는 대북 광고사업에 열중.
이후 삼성의 대북사업은 단순한 광고사업 스폰서(광고주)에서 투자자의 영역으로 확장됨.
- 판문점 육로 방문길을 열다
- 안성기에서 소 떼로 바뀐 판문점 이벤트 주인공
아자-삼성 광고사업 방문단(애니콜 대표 모델 안성기 포함)은 판문점을 통해 방북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는데, 1998년 3월 18일 한겨레 신문에 이른바 '이대성 파일'이 공개되면서 모든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다.
아자의 대북 광고사업은 물론, 거기에 편승한 안기부의 편승공작도 풍비박산이 났다. 대북사업을 김대중 정부와의 관계 개선의 디딤돌로 삼으려 했던 삼성의 의도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판문점 이벤트의 주인공도 안성기에서 소 떼 500마리로 바뀌었다.
* '흔적 지우기'도 실패한 C급 공작
- 김대중 당선되자마자 '흔적 지우기'
아말렉 공작은 실패로 끝났다. 선거 결과도 권영해 부장과 안기부 수뇌부가 당선을 저지했던 김대중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권 부장은 대선 다음 날인 12월 19일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제1, 2, 3차장과 비서실장 등이 참석한 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와 첩보 보고 등을 모두 파기하라고 지시했다.
공작계획서를 재정리하고 공작첩보를 짜깁기했다. 그럼에도 '흔적 지우기'에는 실패했다. 공작 서류는 은폐, 위조했지만, '살아있는 증거물'인 협조자를 관리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 엉뚱한 곳에서 터진 윤홍준이라는 '지뢰'
국민회의 측은 서울 기자회견 다음 날인 12월 17일 윤홍준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고발했고, 남부지청 김오수 검사는 윤 씨를 출입국 통보대상자로 걸어놓았다. 그런데 윤 씨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입국해 '내 집처럼 이용한' 리츠칼튼 호텔에 체류하다가 체포된 것이다.
이대성 실장은 신임 부장 보고용으로 북풍공작의 범행 흔적을 지우기 위해 원재료인 고인돌사업의 일부첩보를 '짜깁기' 하고, 작성 날짜를 소급한 허위보고서를 '끼워 넣기'해서 '이대성 파일'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3월 5일 취임한 이종찬 부장은 이대성 실장이 보고한 '이대성 파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검찰은 이재일, 주만종 팀장을 구속했고, 송봉선 단장과 김은상 처장은 감찰실에 소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대성은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으로 3월 8일 심야에 정대철 부총재를 타워호텔 1402호실에서 만나 대통령게 보고해 달라며 문제의 '이대성 파일'을 건넸다. 안기부 정보관리실에 30년 이상 보존되어야 할 1급비밀인 대북공작 파일이 안기부 1급 간부의 손에서 정치인에게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세게 첩보사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전대미문의 1급비밀 유출사건으로 이어진 불길한 접선이었다.
- 이대성 실장의 오판
이대성은 신임 부장이 취임한 이후 자신의 신변 문제와 관련해 극도의 불안한 행태를 보였다, 자신은 물론 권영해 전 부장까지 사법적 처벌을 받게 될 것을 우려하는 가운데, 이대성은 북풍공작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신임 부장의 손을 떠나 청와대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고 '오판'을 했다. 그래서 전 구거민회의 측의 대북접촉 사실을 근거로 청와대에 압력을 넣어 대통령을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대철 부총재와 만나 그동안 임의로 작성해 편철한 문제의 '이대성 파일'을 건넸다.
정대철 부총재의 집에 드나들던 내일신문의 홍장기 기자가 정 부총재로 부터 조금씩 들은 팩트를 모아서 내일신문에 이대성 파일 일부 내용을 2~3면에 걸쳐 크게 보도했다.
한겨레도 그 무렵 누군가로부터 이대성 파일을 입수했고, 단독 입수한 이대성 파일을 근거로 1주일 동안 연속 보도했다.
- 정대철 부총재의 고민
정대철 부총재는 대선 기간에 '김대중 후보 용공음해대책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안기부 비밀문건을 읽은 정 부총재는 '여권에 대한 협박용'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파일에 대북접촉 혐의가 적시되어 있는 정재문 의언과 이종찬 부장은 사돈 간이었다. 정 부총재는 이대성이 건넨 파일을 2부 복사해 한 부는 라종일 안기부 1차장에게 보내고, 한 부는 문희상 정무수석에게 "안기부 북풍 관련 문건이니 읽어보고 판단해 대통령께 보고하라"며 건넸다.
결과적으로 정 부총재가 이종찬 부장에게 먼저 알리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이종찬 부장이 이대성 파일을 먼저 봤더라면 문건의 유출을 막을 보안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대성 파일이 3월 18일 한겨레에 대서특필된 이후에야 문희상 수석으로부터 이대성 파일을 받아 직접 다 읽어봤다.
이대성 파일의 내용 자체도 터무니 없는 허위사실로 조작된 것이지만, 이미 언론에 공개된 뒤여서 '협박용'으로서의 효용도 사라진 뒤였다.
* 이대성 파일은 아말렉 공작의 배다른 기형아
- 이대성 파일의 유출자는 이대성, 이병기, 권영해 3인
'이대성 파일'은 안기부 공작파일을 협박용으로 짜깁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대성 파일은 아말렉 공작의 '배다른 기형아'인 셈이다.
- 김오수 검사와 이병우 감찰실 보안과장의 문답
- 누가 한겨레에 안기부 2급비밀을 제보했나
- 흑금성 "이왕이면 좀 근사한 이름을 붙여줄 것이지"
김당은 안기부 문건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거기에는 고인돌사업, 상황사업 등 북풍공작 관련 첩보뿐만 아니라, 자신의 취재원인 박채서 씨가 (주)아자의 대북 광고사업에 편승해 북한 보위부에침투한 '흑금성 공작원'이라고 신원이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뢰하는 취재원 중의 한 사람인 박채서 전무가 국민회의 정동영, 천용택 의원과 접촉해 그들의 동향을 보고한 내용이 담겨 있어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김당은 일단 백박서에게 "당신의 신원이 공개될지도 모른다"고 귀띔해 주었다. 박채서는 김당 기자로부터 귀띔을 받았지만 문건이 공개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박채서 본인도 자신의 공작 암호명이 '흑금성'임을 이때 처음 알았다. 흑금성 공작의 경우 이강복 전문공작관이 임의로 공작원 암호명을 작명해 공작 파일을 관리할 뿐, 공작원에게는 공작 암호명을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좀 근사한 이름을 붙여줄 것이지, 하필이면 흑금성이 뭐냐"
박기영 대표는 사무실에서 인터넷으로 한겨레 신문을 읽다가 '이대성 파일'에 관한 기사를 읽고는, 이 파일에 나오는 흑금성 공작원의 행적이 박채서 전무의행적과 똑같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한겨레가 입수한 '해외공작원 정보보고' 자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공작원 '흑금성'이라는 사업가는 남북한 당국이 모두 인정하는 '허가받은 이중간첩'으로 확인되고 있다"
한겨레 기사의 첫 번째 오류는 흑금성 공작원의 디브리핑 보고서가 근간인 안기부 비밀문건을 단독 입수한 성취감에 취해, 이 문건이 대선 뒤에 의도적으로 짜깁기된 사실을 몰랐던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로 인해 흑금성은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이 문건을 통해 괴기스런 이름과 함께 '이중간첩'이라는 오명을 썼다.
두 번째 오류는 정보와 공작의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박채서가 수행한 국가 공작은 북한의 의도를 파악해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야당을 겨냥했든, 여당을 겨냥했든, 북풍공작을 막은 것은 곧 국가를 위한 것이지 북한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한겨레는 그런 구분과 검증을 하지 못함으로써 이 문건을 작성한 이대성 실장과 권영해 부장이 애당초 여권 핵심부와 '거래' 또는 '협박'하기 위해 의도했던 노림수에 말려든 셈이다.
* 남북 오가며 '007 코스프레' 만끽한 윤홍준
- 윤홍준에 30만 달러 사기당한 SBS
윤홍준은 '아말렉 공작'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권영해로부터 착수금 2만 달러와 외교행낭으로 보내 전달한 20만 달러 등 22만 달러 가량을 챙겼다.
윤홍준은 1997년 8월 방북했을 때 김일성 동상에 해외교민 대표로 헌화해 그 모습이 북한 텔레비전 방송에 방영되기도 했다.
윤홍준은 SBS로부터 방북 취재 알선비로 추진비 30만 달러를 은행계좌로 송금받았으나, 이행하지 않았다.
- 김일성 배지 달고, 김정일 장군의 노래 부르던 윤홍준
남북한을 교차 방문하는 재중교포는 남북한의 정보기관 양쪽으로부터 의심을 받기 쉽다. 그래서 남북한을 자주 방문하는 조선족 교포들은 여권을 두 개 만들어 남한용과 북한용으로 따로 사용하는 것이 관행이다.
윤홍준은 베이징의 북한대사관 행사에 우리 돈 100만원 가량을 쓰고서 북한으로부터 애국자 대접을 받았고, 베이징에서 상당 기간 김일성 배지를 달고 다니며, 김일성과 감정일 장군의 노래를 자주 부르곤 했다. 일종의 '007 코스프레'를 즐긴 것이다.
김대중 비방 기자회견 대가로 20만 달러를 챙긴 윤홍준은, 서울지검 남부지청에서 출입국시 통보대상으로 걸어놓은지도 모르고 이듬해 2월 8일 다시 입국했다가, 입국 통보를 받은 검찰에 의해 그가 '내 집처럼 이용한 리츠 칼튼'에서 체포됐다.
안기부 협조자 윤홍준을 수사한 검찰은 김은상 처장, 송봉선 단장, 이대성 실장, 권영해 부장까지 줄줄이 구속한다.
6급 직원부터 부장까지 구속된 것은 중앙정보부 창설 이후 처음 벌어진 참담한 치욕이었다.
- 검찰은 어떻게 안기부 공작의 꼬리를 포착했나?
윤홍준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기자회견문 가운데 'DJ와 직접 통화를 한 사실, 등 본인이 직접 체험했다고 주장한 내용이 모두 허위임을 자백했다. 자신이 북한 공작원으로 규정한 허동웅으로부터 들었다는 내용도 전반적으로 과장되고 왜곡되었다는 점을 시인했다.
결국 윤 씨는 김대중 후보에게 불리한 허위사실 및 비방을 목적으로 기자회견을 해 선거법을 위반한 혐의로 2월 15일 구속되었다.
검찰은 안기부 간부 수사과정에서 ,권영해 부장이 1997년 12월 7일 이대성 실장에게 '아말렉'이라는 공작 명칭과 함께 공작금 5만 달러를 지급하면서 기자회견을 추진하도록 지시한 사실을 밝혀냈고, 권부장으로부터 구약성서의 '출애굽기'에서 따온 '아말렉'으로 이름 붙인 윤홍준 기자회견을 지시하고, 기자회견 대가 등으로 25만 달러를 교부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 아말렉 공작은 권영해 장로의 '성전(聖戰)'
아말렉은 구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사막의 골짜기에 사는 족속'을 뜻하는 아말렉족을 지칭했다. 아말렉족은 이집트를 탈출하는 히브리족을 공격한 족속으로, 교회장로였던 권영해에게 아말렉은 무찔러야 할 적의 상징이었고, 친북-좌익세력의 비유였다.
권영해는 안기부법 및 선거법 위반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권영해는 이후 자신이 부장 시절에 후원했던 보수우익단체인 '대한민국 건국회'의 회장이 되어 반(反) 김대중-노무현 운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 소추되자, 이른바 '탄기국(대통령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의 공동대표를 맡아 '태극기집회'를 선도하고, 헌법재판소 앞에서 '탄핵 기각 및 각하'를 위한 '구국 금식 기도'를 했다.
윤 씨를 검거한 김오수 검사는 북풍 수사를 계속해 권영해 부장과 박일용 차장, 임광수, 임경묵, 고성진, 이대성 실장 등을 구속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김당 시사저널 기자는 '흑금성과 신뢰관계 16개월 취재일기' 기사를 씀.
시사저널(1998년 3월 25일 발매호) : "목숨 걸고 북풍 막은 박채서의 특수공작 비화"라는 제목의 커버스토리 기사 보도
제8장 : 추락하는 공작의 부러진 날개
* '정치화된 정보'가 빚은 참사
- 허동웅은 북한 공작원인가?
윤홍준 기자회견 내용은 기자회견자 본인과 배후 조종자인 안기부 이재일 담당관 등 관련자들이 허위 조작했다고 자백함에 따라 허위사실로 판명되었다.
허동웅의 북한 연계 혐위는 드러나지 않았고, 북한 공작원이라는 증거도 없었다.
박채서는 검찰 조사에서 "허동웅이 보위부의 협조자라고 보고했을 뿐, 국민회의와 연계되어 있다는 내용은 보고한 바 없다"고 진술했다.
- '정보의 정치화'가 초래한 예정된 실패
아말렉공작 등 일련의 북풍 공작 사건의 본질은, 국가 안전 보장의 중추적 임무를 부여받은 국가안전기획부의 수장이 그 본연의 임무 수행을 뒷전으로 한 채 자신의 정치적 이해득실만을 추구해,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를 음해하는 흑색선전 내용의 기자회견을 하도록 지시하고, 그 부하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해 정치와 선거에 개입한 것이다.
국가 안보를 책임진 정보기관의 수장과 그 직원들이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하고, 그 지위를 이용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임함으로써 다시 한 번 정보기관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긴 것이다.
국정원 직원은 정당이나 정치단체에 가입하거나 정치 활동에 관여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고, 이를 어길 경우 '정치 관여죄'로 7년 이하의 징역과 7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권영해 부장과 부하 직원들은 흑색선전의 방법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인 선거의 공정성을 침해하고 헌법 질서를 문란케 하였다.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이를 악의적으로 왜곡한 허위내용을 추가함으로써, 제3자로 하여금 허위사실까지 진실인 것처럼 오인하도록 유도하면서,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 자료를 근거로 제시하는 전형적인 흑색선전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고인돌사업과 상황사업, 아말렉공작은 '정보의 정치화' 또는 '정치화된 정보'가 초래한 정보활동의 예정된 실패이자 참사였다.
- '이대성 파일'은 다른 A급 공작까지 망친 물귀신
문제는 아말렉공작 같은 C급 공작은 혼자만 망한 것이 아니라 다른 A급 공작까지 망쳤다는 데 있다.
아말렉 공작의 배다른 형제 기형아로 태어난 '이대성 파일'은 김정일이라는 권력 핵심까지 접근한 A급 국가공작까지 망친 물귀신이었다.
이대성 파일 중 상황사업과 고인돌 사업과 관련한 3건의 보고서는, 윤홍준 기자회견에 안기부가 개입한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윤홍준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판단에 의해 기자회견을 한 것처럼 편지를 작성하게 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날짜를 소급해 작성한 허위보고서였다.
이대성 파일에는 정치적 의도에 따라 사실을 과장 또는 조작한 허위 내용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어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문건이었다. 전체적으로 김대중 후보와 국민회의 측의 대북 연계 의혹을 증폭시켜 곤경에 몰아 넣으려는 음해 목적으로 만들어진 문건이었다.
대선 기간에 한나라당, 국민회의, 국민신당 등 3당 모두 북한의 지원을 받기 위해 대북 접촉을 한 것처럼 부각시키는 한편, 김대중 후보 및 국민회의가 오래전부터 북한과 밀사를 주고받으면서 자금을 수수하고, 연방제 통일방안에 합의하는 등 북한과 긴밀히 연계되어있음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편집되어 있었다.
- 성공적인 공작은 99%의 팩트와 1%의 결정적 거짓의 조합
신빙성 없는 일부 첩보에 대해, 윤홍준은 나중에 검찰 조사에서, 일시, 장소, 관련인물 등 제보 내용 전체가 허위 조작된 것이라고 실토했다.
이강복 전문공작관은 흑금성의 디브리핑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하고서도, 이대성 실장의 지시에 따라 흑금성 제보 내용을 보고서로 작성해 보고했다. 흑금성 공작원은 이에 대해 검찰 조사에서 "정동영 의원을 접촉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허위 보고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가장 성공적인, 상대에게는 가장 치명적인 기만 공작은 99%의 팩트에 1%의 결정적 거짓을 숨겨,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이다.
허위보고서와 디브리핑이 섞여 있는 '이대성 파일'이 팩트 체크라는 검증이나 안전장치가 없이 날 것 그대로 한겨레에 공개되었고, 정치권은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 '최초 공개 안기부 조직표'와 안기부 개혁
- "'병든 권부', 도려낼 곳과 살릴 곳"
안기부조직표도 2급비밀이다. 김당은 안기부의 '5대 사조직' 인맥과 북풍공작에 개입한 간부 40여 명을 적시하면서, 안기부 조직과 예산 규모를 중앙정보부 창립 이후 최초로 공개했다.
- 안기부, 법원에 시사저널 판매금지 가처분 소송
서울지법 민사51부(부장판사 김능환)는 안기부가 시사저널사를 상대로 제기한 판매금지가처분 신청에 대해 명예훼손 부분은 "이유 없다"고 기각하고, 국가기밀침해 부분은 일부 인정해 신청을 받아들였다.
- 김당, 이종찬과 천용택 사이의 '길목'을 지켜 특종보도
안기부는 그 뒤에 조직의 개편 과정을 거치며 국정원으로 개칭했다.
- 김당, 국정원 신입 직원 보안 교육에서 '요주의 인물'로 올라
김당은 대선 기간의 안기부 북풍공작 추적 보도 및 안기부 조직표 공개로 1998년 한국기자상(취재 보도 분야, 한국기자협회-한국언론재단)을 수상하였다. 북풍공작 추적보도는 상당 부분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가 귀띔해 준 정보 덕분이었다.
- 북한 방송도 보도한 '안기부 조직표 공개' 기사
당시 국내 언론은 북한 방송을 직접 인용하지 못하고 내외통신이 배포하는 보도자료만 가지고 보도하게 돼 있었다. 내외통신이 보도하지 않으면 국내 언론은 보도할 수 없었다.
세계가 다 아는 북한 소식을 정작 우리나라 국민들만 모르는 셈이었다.
* 흑금성은 이중간첩인가
- 한겨레 첫 기사 "이중첩자 '흑금성' 김대중 · 이인제 쪽 침투"
언론 보도로 인한 사회적 파장에서는 첫 보도의 영향력이 가장 크다.
이대성 파일은 자신들이 낙선 공작을 펼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자, 위기위식을 느낀 안기부 수뇌부가 김대중 후보와 국민회의 측의 대북 연계 의혹을 증폭시켜 곤경에 몰아넣으려는 음해 목적으로 짜깁기한 문건이었다.
검찰은 북풍 사건 수사 발표에서 사실상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했다. 그가 처음에 국민회의 쪽에 '북풍'을 막기 위한 양심적 제보자로서 접근했는데, 나중에 정동영-천용택 의원과의 접촉 사실이 안기부에 포착되자, 국민회의와 접촉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국민회의와 북측 간에 연계가 있는 양 안기부에 허위로 보고했다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검찰은 안기부 수뇌부가 과장된 정보보고를 왜곡, 변조해 북풍 사건 수사를 차단하고 자신들을 보호할 무기로 삼았다고 판단했다.
가장 치명적인 기만 공작은 99%의 팩트에 1%의 결정적 거짓을 숨겨,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믿게 하는 것이다.
-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처럼 몰려든 기자들
한겨레가 이대성 파일을 공개하면서 1면에 실은 "이중첩자 '흑금성' 김대중, 이인제 쪽 침투"라는 기사와 함께 4면에 실은 '흑금성은 누구인가'라는 기사는 박채서의 정체성을 '이중간첩'으로 각인시켰다.
국가정보기관의 1급비밀 공작파일이 공개되어 A급 국가공작이 붕괴되었고, 언론에 의해 이중간첩이라는 굴레를 쓴 박채서는 보호받지 못했다.
북풍대책팀장을 지낸 천용택 의원은 대선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북풍을 효과적으로 막았기에 선거에서 이겼고, 그 북풍을 막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고 했으나, 이대성 파일이 공개된 뒤에에는 '결정적인 도움을 준 사람'을 외면했다.
- 박채서, 수사팀 교체 요구해 15명 교체
박채서는 북풍수사팀 중 적잖은 인사들이 수십 년간 이른바 'DJ 때려잡기'에 앞장서온 인물들이라며 수사팀의 교체를 요구했고, 며칠 뒤 15명의 수사팀이 전격 교체되었다.
박채서는 이대성 파일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북측의 복수를 염려해 가족의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정부 당국도 처음에는 안기부 수사국 요원과 경찰을 파견해 박 씨의 두 딸이 등하교할 때 경호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철수해 버렸다.
수사팀장이 "북측으로부터의 보복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안심을 시켰다. 안기부에서 평양과 일본 조총련 간의 통화 내용을 잡았는데, 김정일로부터 "통 크게 봐주라"는 지시가 있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고 했다.
이대성 파일을 1면에 연속 보도한 한겨레는 사흘째인 3월 20일 자에 비로소 "공작 문건 일부 변조"라는 제목으로 "지난 2월 안기부 고위 간부가 재편집했다"고 보도했다.
'나는 오직 조직(안기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북한에 잠시 위장 포섭됐을 뿐'이라며, '나는 결코 간첩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수 년 동안 공들여 쌓아온 북쪽과의 핫라인이 이번 사건의 파장으로 활용하기 어렵게 된 점이 가장 아쉽다'고 말했다.
한겨레는 박 씨를 조사한 안기부 고위층으로부터 박 씨의 주장을 취재해, 마치 박채서를 인터뷰한 것처럼 기사화 하였고, 박채서는 나중에 한겨레를 상대로 출판물에 의한 허위보도 및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제기해 1심에서 4천만 원 손해배상 판결을 받았다.
- 흑금성 "언론들, 소설 쓰고 있다"
박채서는 김당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하였으며, 김당 기자는 '흑금성 독점 인터뷰'를 시사저널에 "언론들, 소설 쓰고 있다"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 해고와 77억원 손해배상 소송
- 3억원의 위자료와 해고된 공작원의 남겨진 과제
박채서는 신분 노출과 이대성 파일 사건의 파장으로 인해 더 이상의 임무 수행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박채서는 1998년 8월 15일부로 안기부의 국가공작원(정보서기관)에서 정식 해고되었다.
안기부는 그에게 퇴직금 명목으로 3억원의 위자료를 지급했다.
스파이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보호 프로그램이 없었기에, 박채서는 스스로 잣ㄴ과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고 확인해야 했다.
출국금지 처분의 해제를 요구하는 가처분 행정소송을 제기해 출금을 해제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안기부 수사팀장이 자신에게 통보해준 김정일의 지시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간 박채서는 리철을 만났다.
"박상, 장군님께서 '그 사람도 자기가 속한 국가와 조직을 위해 충성을 다 한 것 뿐이니 통 크게 봐줘라'고 지시하셨습네다"
- 아자, 정부 상대로 77억원 손배소송
아자는 정부가 기밀관리에 실패해 박채서 전무의 실체를 공개하는 바람에 대북사업이 무산되었다며, 정부를 상대로 77억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 법정 증언대에 선 국가 비밀공작원
박채서도 해고될 때 위자료 3억원을 받고 보안서약서를 쓰고 나왔다. 그러나 증인 출석을 요구하자 기꺼이 받아들였다.
"국가공작원으로서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가 저나 박기영 씨에게 하는 태도를 보면 정말 섭섭합니다. 국가가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면 내가 증인을 서겠습니다"
국가 비밀공작의 최종 승인권자는 대개 국가정보기관장(국가정보원장)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이 인가한다. 그러나 비밀공작은 대부분 국내법과 국제법상 불법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에 비밀공작이나 흑색공작원의 실체를 인정하는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그래서 흑색공작원을 자국의 법정에 세우는 일 또한 거의 없는 것이다.
국정원은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일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고, 비공개 재판정에서 흑금성 공작원이 증인으로 섰다.
"국가가 비겁한 겁니다. 그래서 나와서는 안 될 제가 나온 겁니다"
아자는 국가를 상대로 한 기나긴 법정 소송 끝에 "안기부 파일 공개로 직원으로 위장 취업한 안기부 공작원 '흑금성'의 신분이 공개돼 대북사업에 손해를 봤다"며 서울고법에서 6억 5천만원의 승소판결을 받았고, 대법원에서 원심을 확정했다.
- 미국 정보 당국, 박채서에 망명 제의
* 국가공작원의 외도(外道)
- 이대성 파일이라는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
박채서는 정식 해고와 함께 대북사업에 손을 떼면서 A4 용지 두 장 분량의 건의서를 작성해 국정원에 전했다. 핵심 요지는 두 가지였다.
첫째, 대북정책을 추진하면서 기업, 특히 대기업은 활용하되 의존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기업은 태생적으로 기업주인 오너와 기업의 이익이 최선이고 국가와 민족의 이익은 후순위이다.
둘째, 대북정책을 추진, 시행하는 과정에서 접촉하게 되는 관료 등 북한 사람들과 돈으로 거래하지 말라는 것이다. 북한처럼 경직된 사회에서 잘못된 선례를 만들면, 제2, 제3의기업들은 그 예에 준해서 대가를 지불해야 하므로 그것은 적폐를 쌓는 것이다.
그러나 박채서의 건의는 무시되거나 오히려 그 반대로 시행되었다.
정주영 회장과 현대에 대북사업의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고, 정주영 회장에게 남북한의 메신저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정부의 대북정책 입안자들이 정 회장에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사업가인 정회장은 그런 상황을 자신과 현대의 이익을 위해 최대한 활용했다.
예를 들어 금강산 관광은 기대와 달리 한동안 배를 이용한 관광만 제한적으로 실시되었다.
정주영 회장과 현대는 1998년 6월 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고, 4개월 뒤인 그해 11월 다시 601마리 소떼몰이 방북 이벤트를 성사시켜 세계적인 뉴스거리를 제공했다.
두 차례의 소떼몰이 방북 이벤트에 소요된 경비는 소값과 사료값, 그리고 차량 등을 합쳐 44억 7천만원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나중에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이 박채서에게 직접 들려준 바에 따르면, 소 떼와 함께 미화 1억 7천 200만 달러가 실려왔다고 한다.
현대그룹의 돈질은 급기야 남북정상회담을 고리로 북측에 10억 달러를 베팅하는 무리수를 두는 데에 이르렀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아들 정몽헌 회장이 '김정일에게 10억 달러를 주고 대북 7대 사업의 독점적 사업권을 따왔다'고 보고하자, 아들을 대견스러워하며 가까운 기업인에게 자랑했다.
이후 현대그룹은 유동성 위기에 몰리게 된다.
- 공작원의 외도, 이산가족 상봉 길을 트다
장례업자 한명훈 씨의 부탁으로 베이징에서 리철을 만나 개별상봉 가능 여부 의사 타진.
- 한명훈 씨, 내국인으로 첫 이산가족 개별상봉
박채서는 리철을 만나 한명훈 씨의 개별상봉을 정상회담의 사전 분위기 조성용으로 만들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한명훈 씨는 일주일 동안 평양 고려호텔에서 두 아들과 같이 머물면서, 식사는 물론, 시내 관광과 쇼핑을 했다. 민간인의 이산가족 상봉 목적의 개별 방북과 상봉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에이스 침대 안유수 회장은 꾸준히 고향인 황해북도 사리원을 지원해왔다. 2009년에 사리원에 대규모 농장 조성을 지원한 데 이어, 2014년 9월 30일 영농물자를 실은 대형 화물차 20대를 이끌고 방북해, 정주영 회장의 소 떼 방북 이우 16년 만에 민간기업에 의한 육로 물자수송을 재현했다. 안회장은 당시 직접 수송단을 이끌고 고향인 사리원까지 들어갔다. 남측 화물차가 개성을 넘어 현지까지 갔다오는건 분단 이후 처음이었다.
박채서는 이후 가수 현미와 남보원 씨의 가족 상봉을 위한 방북을 주선했다. 남보원은 평양에서 누나를 만났지만, 현미는 과거 동북3성의 모처에서 가족을 몰래 만난 사실이 방송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그 외에도 몇 사람이 박채서의 주선으로 방북해 가족과 상봉하거나 가족의 생사를 확인했다.
에필로그
선진국은 첩보기관과 방첩기관을 분리해 운용한다.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와 연방수사국(FBI), 영국의 비밀정보부(SIS,MI6)와 보안정보국(SS, MI5), 그리고 러시아의 해외정보부(SVR)와 연방보안국(FSB) 등.
북한도 엄격히 구분하면 분리형이다. 인민무력부 산하의 정찰총국이 대남, 해외 공작업무를 총괄 지휘하고 있다. 한국의 국정원에 해당하는 국가보위부, 기무사와 유사한 보위사, 경찰청에 해당하는 인민보안성은 북한의 대표적 방첩 정보기관이다.
한국은 국가정보원(NIS)이라는 첩보 기능과 방첩 기능이 통합된 강력한 정보기관을 운영한다. 방첩기관은 국가정보원, 경찰청, 해양경찰청, 국군기무사 등이다.
비밀공작을 수행하는 첩보기관의 업무 자체가 대부분 '불법'이다. 한국에서는 비밀공작을 정의한 법 규정 자체가 없다.
한국 정보기관이 펼치는 대북공작 유형은 다양하다. 그중의 하나가 대북사업을 하려는 사람에게 접근해, 그 사업을 도와주는 방법으로 위장 침투하는 '편승공작'이다. 편승공작은 그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 정보기관으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수명이 길다는 장점이 있다.
- 안기부, 정보사 공작을 '턴키 베이스'로 인수
국정원은 국내 모든 정보기관에 예산을 지원하면서 관련 업무를 통제한다.
안기부는 국군정보사 공작단 박채서 공작관을 1993년 4월 육군 소령으로 전역과 동시에 공작원으로 스카우트했다.
- 여건 조성 단계
비밀공작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이 확인된 경우에만 수행해야 한다. 비밀공작은 성공의 과실이 크지만, 실패할 경우 인력 손실은 물론, 경제적 손실과 국가 이미지 훼손 등 국가가 입게 될 손실 또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이다.
박채서가 정보사 공작관일 때는 협조자나 공작원을 포섭하는 것이 주 업무였으나, 안기부 공작원이 된 지금은 북한 정보기관에 협조자로 포섭당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편승공작은 안기부나 정보사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지 않기 때문에 어떤 공작보다도 수명이 길다는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이 공작이 성공하려면 편승한 사업이 잘 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보기관의 '보이지 않는' 지원이 있어야 했다.
- 본건 진입 단계
안기부 8국의 송봉선 단장과 이강복 전문공작관은 1995년 3월 박채서 공작원이 아자의 대북 광고사업에 편승한 공작을 국가인가 공작으로 편성해 안기부장과 대통령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암호명 '흑금성'으로 명명된 박채서의 공작 계선은 '박채서 국가공작원(정보서기관), 이강복 전문공작관(정보부이사관), 송봉선 공작2단장(정보이사관), 남영식 8국장(정보관리관, 이후 안기부 조직개편으로 이대성 '203실장), 권영해 안기부장'으로 연결되었다.
흑금성 공작은 우리 측 공작원이 북한 보위부에 위장 포섭되는 것이 핵심이었다.
외부에 알려지는 비밀공작은 대부분 실패한 것이거나, 국가 간 정치 외교적 이슈가 없는 것들이다.
- 성과 거양 단계
흑금성 공작에서 원래의 공작목표는 북한 주민을 감시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정보-방첩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였으나, 나중에는 보위부는 중간목표로 바뀌고, 북한의 최고 수뇌부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공작목표로 확대되었다.
공작은 본래 인간의 보편적인 약점을 파고 들어가는 '더티 잡'이다.
허황되거나 거짓이 가미된 공작보고서를 만드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까지도 무능력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이 국가정보기관의 비밀공작 요원들이었다.
'북한은 고장 난 비행기와 같아서 언제 떨어질지 모른다'는 김영삼 대통령의 북한 붕괴론 인식도 대북공작원들이 제보한 잘못된 정보가 입력된 사례였다.
흑금성 공작의 성과는 안기부 최우수 공작 평가를 받은 것으로 객관적 평가를 할 수 있다. 흑금성 공작은 1996년에 이어 1997년에도 2년 연속 안기부 최고팀으로 선정되어, 당시 권영해 안기부장으로부터 각각 4천만원과 5천만원의 포상금과 축하상품을 받았다.
흑금성 공작은 성과가 너무 빨리 나타났고, 또한 너무 크고, 중요했다.
- 대북공작 80%가 C급 이하, '살아있는 공작'은 10% 이하
'정보의 정치화' 또는 '정치화된 정보'에 따른 첩보활동의 실패는 의외로 빈번하게 일어난다.
북한은 1990년대 경제난 이후 공작금이 없어 공작망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선이 끊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안기부는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운 기자나 종교인 등 정치적 색채가 없는 사람들을 공작원이나 협조자로 이용하였는데, 이들은 취재나 선교라는 본연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조종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이들이 공작기관을 자기들의 취재나 선교사업에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런 류의 편승공작이 가장 활발했다.
- '공작의 꽃' 흑색공작
1990년대 중반 안기부의대북공작 수준은 C급 이하 공작이 거의 80%였다. A급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은 불과 한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였다. 대북 공작망이 국내외뿐 아니라 북한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는 말은 진실과는 한참 동떨어진 말이었다. 단시 '살아 있는 공작망'은 10%가 안 되었다.
'공작의 꽃'이라는 이중공작원을 쓰는 고도의 공작은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였다. 바로 그 중의 하나가 흑금성 공작이었다. 그런데 대북 첩보활동을 하는데 1개 사단 병력보다 더 소중한 이중공작원을 대통령 선거에 이기기 위해 흑색선전에 써먹고, 공작 파일(이대성 파일)을 공개해 신분까지 공개해 버린 것이다. 국가정보기관(구 안기부)의 수뇌부가 정치적 의도와 자신들의 구명을 위해 정보기관 본연의 임무를 져버린 것이자.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평가
... 이명박 정부 시절에 김정일의 건강이 이슈가 되었을 때 국정원이 정보위에 마치 김정일 옆에서 칫솔질을 지켜본 것처럼 정보를 노출한 적이 있다. 공작원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아마추어의 짓이다. 김정일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도 일본 내각조사실 공작원이었다...
부임 당시 대북공작원이 200명 가량이었는데, '살이 있는 공작'은 50명도 안 되었다. 흑금성은 그 중에서도 A급 공작원이었다...
이후 탈북자가 많이 생겨 '여건 조성' 환경이 좋아져 공작원 숫자가 늘어났을 것이다.
국가 비밀공작의 최종 승인권자는 대개 국가정보기관장(국가정보원장)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대통령이 인가한다.그러나 비밀공작은 대부분 국내법과 국제법상 불법 행위를 수반하기 때문에 비밀공작이나 흑색공작원의 실체를 인정하는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흑색공작원을 자국의 법정에 세우는 일 또한 거의 없다. 그런데 박채서는 '비겁한 국가'를 대신해 법정에 증인으로 섰다.
박채서는 2010년 6월 1일 새벽 자택에서 국가보안법 위반(간첩죄) 협의로 긴급 체포되어, 그 후 대법원에서 징역 6년형이 확정 선고되었다.
제2권
제1장 : 무간도의 세계
1. 간첩 혐의로 체포된 공작원
2010년 6월 1일 국가정보원 대공수사국 요원 십수 명이 강서구 염창동의 한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서희 아빠(박채서)'의 체포와 함께 진행된 가택 압수수색에서 수사관들은 보관 중인 각종 군사교범과 <작전요무령> 같은 책자를 증거물로 압수해 갔다.
이후 20일 동안의 국정원 조사와 30일 동안의 검찰 조사를 거쳐, 이 50대 남자에게 적용된 죄명은 간첩, 특수잠입 · 탈출, 회합 · 통신, 편의 제공 등으로, 국가보안법 상의 거의 모든 죄명이 망라되었다.
- 조선일보가 발 빠르게 단독 보도한 까닭
체포된 50대 남자는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 씨였다. 조선일보는 박채서가 체포된 지 사흘도 안 되어 단독 타이틀을 붙인 ['작게 5027' 북 유출 혐의...현역 육군 소장 체포]라는 기사와 [북에 군 기밀 넘겨 구속된 '흑금성'은 누구?]라는 기사를 실었다.
"현역 군 장성이 간첩 혐의로 체포된 것은 수십 년 만에 처음 일어난 극히 이례적인 일"
이 현역 장군은 김인동 소장이었다. 함께 구속된 손모 예비역 중령은 박채서의 3사관학교 동기생인 손유범이었다. 조선일보는 스트레이트 기사와 함께 '흑금성은 누구인가]라는 해설기사도 실었다.
- 조선일보와 박채서는 '동업자' 관계
박채서와 조선일보는 중국에서 열리는 골프대회 관계로 동업자 관계였는데, 박씨가 긴급 체포되어 펑크를 내는 바람에 조선일보가 발 빠르게 보도할 수 있었다.
국방대학원(석사과정 8기)에 다니면서 골프에 입문한 그는 골프에 빠져 티칭 프로 이상의 수준급 골퍼가 되었다.
정보사 한미합동정보대에 배치된 뒤로는 틈나는 대로 용산 미군골프장을 드나들었다. 카다피 암살을 경고한 '리비아 공작'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포상으로 용산 골프장 출입카드를 받은 덕분이었다.
공작원을 그만둬도 골프로 먹고살 수 있을 만큼 실력을 갖춘 가운데, 그에게 골프는 본업인 공작의 성공을 위한 유용한 수단이었다.
그는 평양골프장에서 국가안전보위부 김영룡 제1부부장과 내기골프를 치기도 했다. 국정원 공작원이 국정원의 대북침투에 대한 반탐업무가 본업인 국가안전보위부의 수장과 내기골프를 한 것이다. 훗날 김영룡은 반탐에 실패한 책임을 지고 숙청되었다.
공작원을 그만둔 뒤에 삼합회 총회주와 라운딩한 것을 계기로 그의 골프 스승이 되었다.
그는 개성공단 사업을 계기로 다시 대북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북한 정권의 실세인 장성택을 설득해 서부전선의 군대를 후방으로 물리도록 하고, 그곳에 골프리조트를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북측은 개성의 전방 사단을 후바ㅏㅇ으로 재배치하고 골프리조트를 건설하려면 군부를 설득하기 위한 '선물'이 필요하다면서, 남측의 군사교범을 요구했다.
군사교범은 불법과 합법의 경계선에 있었다. 교범은 군사기밀이 아니지만, 해외 반출을 하려면 군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공작원 시절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겠지만, 지금은 민간인 신분인지라,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된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 무간지옥과 공작원에 대한 공소장
- 리호남(본명 리철)은 북한 공작원인가
검찰의 총풍사건 수사결과에 따르면, 당시 무력시위 요청을 받은 리호남(리철운)과 김영수 보위부 과장, 그리고 박충(강덕순) 아태 참사 등이 다음날 "평양에 전문을 보냈으나 회답이 없어 답을 줄 수 없다"고 사실상 거절해 무력시위는 '미수'에 그쳤다.
- 리호남 '보위부 북경 연락책(1998년)' → '작전부 소속 공작원'으로 둔갑
보위부는 '간첩 침투를 막고, 간첩을 잡는 기관'이고, 작전부는 '간첩을 훈련해 남파하는 기관'이다.
국정원과 검찰은 리호남이 작전부(현 정찰총국)에 소속된 공작원이라는 명백한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리호남은 박채서가 체포된 후에도 여전히 대북사업가들과 접촉하며 활동하고 있다.
ㄹ리호남은 2005년 박채서와 함께 북측 조명애, 남측 이효리를 내세운 삼성 휴대폰 CF 광고사업으로 광고 돈벌이에 눈을 떠, 최근까지도 월드컵 남북한 공동 CF 광고사업을 제안하는 등, 여전히 돈(외화)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하는 경제사업 일꾼임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가 '대남공작원'이라면, 국정원은 그런 사실을 통일부에 통보하고, 통일부는 '공작원 리호남'과 교류협력사업을 추진하려는 남한 사업가들에게 경고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런 경고를 보낸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다.
실제로 리호남은 박채서가 긴급 체포된 뒤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베이징을 왕래하면서 대북사업가들을 만나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리철(리호남)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북한의 '경제사업 일꾼'이다.
2. 리철의 두 얼굴 : 예고된 참사와 전조, 그리고 덫
국정원 공작원 박채서와 북한 국가안전보위부를 연결하는 대화 채널이었던 리철의 '본업'은 내각 참사였다.
- 리철은 김일성종합대학 수석 졸업자
리철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출신으로 졸업 당시 전체 졸업생 중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하여, 당시 김일성 주석으로부터 주석궁에 초대되어 "당의 일꾼으로 키우라"는 김일성 교시를 받은 인물이다. 그 후 김일성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교수로 재직하였는데, 당시 그의 전공은 자본주의 경제학이었고, 박사학위 논문도 특이하게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발전계획과 그 성과에 대하여>였다고 한다.
김정일의 어록 : "잘 교육 · 훈련된 유능한 공작원 한 사람은 4개 정규사단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북한 인사들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전까지는 가명을 주로 사용했으나, 6.15공동선언 이후 김정일 위원자의 지시로 가명을 쓰는 사례가 줄었다.
- 김당이 법정에서 증언한 리철의 '본업'과 '부업'
김당은 박채서로부터 리철을 소개받은 이래 박채서가 간첩 혐의로 구속될 때까지 스무 번 가까이 리철을 만났다. 김당은 박채서의 재판에 출석해 자신이 만난 리철에 대해 법정에서 증언했다.
- 리철 "남북정상회담은 '안희정' 접촉부터 시작되었다"
리철과 안희정의 비밀접촉에서 상대방의 대화 의지를 확인한 뒤로, 몇 차례 더 남북 간에 접촉이 이뤄졌고, 김만복 국정원장과 서훈 대북전략국장 등이 비밀 방북해 10월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가 이뤄졌다.
- 대남 공작원이 남북정상회담도 중재했다?
- 리철, 남북정상회담 경제회담 대표로도 참석
- 북한 대남공작 기구의 실상
리호남은 2005년 남북합작 광고사업을 성공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박채서는 '아자 전무'로 활동했지만 그것은 북한 정보기관에 침투하기 위한 위장 직업이었고, 그의 '본업'은 공작원이었다.
리철은 대남 공작기관의 협조 요청으로 공작원이나 협조자 역할을 일시적으로 수행했을 수 있다.
김당은 공작원이 '부업'일 수는 있지만, 리철의 '본업'은 내각 참사가 맞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3. 서울과 평양, 워싱턴의 서로 다른 속내
남북대화의 채널은 크게 세 종류다.
가. 공식-공개채널
남측 통일부와 북측 통전부 사이의 통-통라인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통상적인 남북대화 협상창구
나. 공식-비공개채널
국가정보기관(국정원 대북전략국)과 톤전부 사이의 정-통라인으로, 공식-공개채널의 정지작업을 하면서 조력자 역할을 하기도 하고, 직접 전면에 나서기도 한다.
다. 비공식-비공개채널
이른바 비선(秘線)라인으로, 북한은전통적으로 비선라인을 선호해왔다.
- 서울과 평양, 번지수를 잘못 짚다
서훈은 당시 남북 간 '통-통 채널'의 숨은 조력자이자, '정-통 라인'의 핵심 인사였다.
- 워싱턴은 서울을 의심했다
- 미국의 한국 대선 관찰 메커니즘
세종로 미국대사관 5층의 ORS(지역조사과) 간판이 달린 방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미 CIA(주어앙정보부) 서울지부(한국과)의 대외명칭이다.
- '검은 머리 미국인'들과 다양한 연락선
박채서는 정보사 소령으로 한-미합동공작대에서 3년 가까이 근무했다. 그때 미국 측 팀장의 경고를 계기로 이른바 '검은 머리 미국인'들이 얼마나 되는지 파악해 본 적이 있다. 2년 이상 은밀하게 관련 정보를 취합해본 결돠 약 380명에 이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미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검은 머리 미국인'들은 ,미국 측 팀장이 얘기했던 청와대와 기무사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국방, 사회, 문화, 언론 등 한국 사회 각 분야에서 지도급 인사로 행세하고 있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 국무부 비밀 전문은 사실상 스파이 노릇을 하며 미국에 줄 선 관료들의 치부를 드러내 주었다.
미국 대사관 관리들이 한국처럼 고위 관리를 포함한 사회 지도층과 여론 주도층 인사들을 광범위하게 만나는 나라는 찾아보기 어렵다.
더 충격적인 것은 주한미국대사관이 깔아 놓은 '비밀 연락선'이다.
미 대사관 관리들은 엄종식 당시 통일부 정책기획관을 '우리 동료' 또는 '우리의 통일부 연락선'이라고 불렀다.
정부 당국자가 주한 외교사절단에 '컨택트'로서 정보를 제공할 경우 형법 제113조, 즉 외교상기밀의 누설에 해당한다.
노무현 정부는 출범 초부터 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해 3인 소그룹(박선원, 이종석, 서훈)을 결성했으며, 북측과의 협상은 국정원과 국가안보회의(NSC) 관계자들이 담당했고, 남북관계 주무장관인 통일, 외교, 국방장관은 8월 8일 발표 당일까지 이를 몰랐다.
4. 국정원의 경고와 위기 징후
박채서는 자신이 체포되기 반년여 전부터 몇 가지 이상 신호를 감지했지만, 이산가족 개별 상봉, '남남북녀 결혼 프로젝트'를 추진했을 때처럼, 국정원이 방해공작을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뿐, 체포와 구속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 국정원이 박채서에게 보낸 세 가지 방식의 경고
도·감청, 지인을 통한 직접적인 싸인, 직접 행동
정보기관 내에서조차 공식 인가를 받지 않고 비밀리에 수행된 내부 불법공작이 비인가공작이다. 권영해 부장이 비밀리에 추진한 '아말렉 공작' 등을 포함한 일련의 '북풍공작'이 대표적 사례다.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는 '아자'라는 광고회사에 전무로 위장취업해 북한을 상대로 광고사업을 추진하는 '편승공작'인 '인가공작'(흑금성 공작)을 수행하는 중에 자신의 공작라인에 침투한 '비인가공작'(아말렉 공작 등)을 포착해 이들의 1997년 대선 정치공작을 막아냈던 것이다.
1998년 3월 권력 교체기에 권영해 부장과 이대성 해외공작실장 등 안기부 핵심 간부들이 김대중 정부와 '거래'하거나 '협박'하기 위해 '해외공작원 정보보고' 등을 짜깁기해 만든 이른바 '이대성 파일'을 언론에 공개하는 과정에서 '블랙'(흑색요원)이었던 그의 신원이 노출되는 바람에 그는 타의에 의해 공작원을 그만둬야 했다.
1998년 6월 그는 국정원으로부터 해직 위로금 조로 3억원을 받고 나왔다. 국정원 창설 이후 최초로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에 침투해 북한 최고위급에까지 접근한 A급 공작원에 대한 보상이었다.
노무현 정부에서 그는 대북 비선으로 활동하면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를 했고, 이명박 정부로 정권이 바뀐 뒤에도 여전히 대북 비선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 박채서가 체포되기 전에 김당에게 전한 세 가지 메세지
1) 2010년초 김정일 방중설
김정일의 방중설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한다면, 북한이 이제 더는 남한에 구걸하지 않고 중국과 상대하겠다는 의미. 민족적 비극이다.
북한으로서는 식량난 해결이 시급한데 남측이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어 김정일이 자존심을 굽히고 중국을 향해 손을 벌리려 한다는 것.
2)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남북정상회담 추진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임태희 노동부 장관(당시 대통령실장)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의 비밀접촉. 북한은 식량 10만톤을 요청, 남측이 내민 카드는 고작 1만톤뿐.
3) 당(통전부) 우선이었던 북한의 대남 공작라인이 군부 중심으로 재편되어, 호전적인 군부가 전면에 나서게 된 바람에 한반도의 전쟁 위험지수가 높아졌다. 노동당 소속이었던 작전부와 '35호실', 그리고 인민무력부 소속의 정찰국을 통합해 정찰총국으로 확대 개편되어 김영철 상장이 '인민군 정찰총국 총국장'에 임명됨으로써, 대남공작의 전면에 군부가 나설 것을 우려함.
- 효용 가치를 상실한 해고 공작원을 대하는 방식
국군 정보사 공작단 공작관이던 현역 소령에서 국가안전기획부 203실 소속 정보서기관으로 특채되어 대북 특수공작을 수행하던 그의 운명이 꼬인 것은 한겨레 신문의 보도 때문이었다. 한겨레가 '이대성 파일'을 공개함으로써 북한 전문 광고기획사 아자의 박채서 전무가 국가안전기획부 공작원임이 드러난 것이다.
국가는 그를 해고하면서 3억원의 위자료를 건넸다. 일종의 '입막음 비용'이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접근이 어려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안전보위부에 침투하는 데 성공해, 김영룡 국가안전보위부장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매제이자 북한 권력 2인자인 장성택 조선로동당 조직부 제1부부장의 신뢰를 받고, 마침내 김정일 국방위원장까지 면담한 그였다. 이와 같은 공작 성과를 인정받아 국가안전기획부에서 두 번이나 최우수 공작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해고공작원에 대한 신변보호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성 파일'이 공개된 직후인 1998년 4월 김영룡 보위부장(제1부부장) 등 흑금성과 연결된 보위부 간부들이 줄줄이 숙청되었다.
국정원은 그가 이대성 파일이 공개되어 내곡동에서 조사받을 때 일본 조총련(조선총련)과 평양 사이에 오간 전화통화를 도·감청해서 그에게 일부 내용을 알려준 바 있다.
"'박채서에 대한 보복 행동을 시행해도 되느냐'는 조총련의 질의에, '별도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라'는 평양의 보류 지시가 떨어졌다."
아자에 투자한 투자자들이 그에게 손실액을 보전받을 수 있도록 나서달라고 성화였다. 그는 국가공작으로 인한 민간인의 피해를 보상해줄 것을 국정원에 여러 차례 요청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 "통 크게 봐줘라"는 평양의 메시지
1998년 8월 박채서는 베이징에서 리철을 만났다.
"내가 당신들에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겠소. 목숨이 아깝지 않은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소마는, 이ㅏ 바닥에 뛰어들 때부터 나는 죽음을 각오한 몸이오. 다만 부탁하건대, 나 하나만으로 끝내주시오. 내 처와 어머니, 그리고 어린 자식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소?"
이튿날 다시 만난 리철에게서 박채서는 평양의 회신내용을 들었다.
"그 사람도 자기 조직과 국가에 청성한 것밖에 더 있느냐? 통 크게 봐줘라."
- 북한 잠수정 사건과 해안선 촬영 비디오테이프
1997년 1월, 공작원으로 활동 시절에 북측은 박채서에게 남한의 해안선을 해수역장을 중심으로 비디오로 촬영해달라고 요청했으며, 박채서는 국정원 본부(대북공작국)에 디브리핑 하면서 북측의 요구사항을 이강복 공작관에게 보고했으며, 이강복 공작관은 군사시설보호법에 저촉이 되지 않도록 적당히 작업해서 주라고 지시했다.
그는 강릉 경포대 해수역장에서 동해시 이남까지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해안선을 8mm 캠코더로 촬영해서 북측에 전해주었다. 물론 해안의 주요시설이나 특히 군의 경계초소 등 군사시설보호법에 저촉될 수 있는 시설은 애초 촬영하지 않았다.
그 후 북측의 요청으로 서해안 지역도 비디오 촬영을 했지만, 대선 관련 북풍공작에 정신이 팔려 비디오테이프를 잊고 있었다.
공작원에서 해고된 후, 보위부에서는 과거 사업을 정리하자고 하면서, 리철을 통해 그에게 1년 전에 촬영한 서해안 비디오테이프를 마저 달라고 요구하였고, 그는 리철에게 전해주었다.
국정원은 박채서가 해고된 뒤에도 북측 파트너와접촉해 서해안을 촬영한 비디오테이프를 북측에 건넨 것을 군사시설보호법 위반 및 간첩 혐의로 문제삼았다.
제2장 : 혼돈무간
5. 부부간첩과 민혁당 사건
- 박채서, 국방대학원에서 골프에 미치다
국방대학원 시절 박채서는 골프에 미쳤고, 정씨 3인방(정호용 국방장관, 정석모 민정당 사무총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자주 라운딩했고, 싱글골퍼로 자리매김했다.
성수대교 붕괴 사흘 만에 해경이 서해에서 구조한 '국군포로출신 탈북자 1호' 조창호 소위는 국민적 분노를 일시에 딴 데로 돌리기 위해 급조한 안기부의 작품이었다.
- 부부간첩과 북한 반잠수정, 김영환과 민혁당 사건
국정원의 민혁당 간첩사건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이 사건에 연루된 김영환 등은 '명백한 간첩'이었다. 그런데 국정원은 이처럼 '똑 떨어지는 간첩'을 공소보류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국정원의 공소보류 의견은 곧 사실상의 무죄방면을 의미했다.
6. 첫 이산가족 개별 상봉
- 언론사 방북 및 이산가족 상봉 주선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김대중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으로 새로운 기운이 움틈.
2000년 3월 9일, 베를린 선언
1) 정부는 북한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 북한의 도로, 항만, 철도, 전력,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이 우선 확충되어야 한다.
2) 현 단계에서 당면목표는 통일보다는 냉전종식과 평화정착이다.
3) 인도적 차원의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 적극 노력
4) 남북한 당국간의 대화 필요
베를린 선언이 주목받는 이유는 북측이 이 선언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임으로써,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햇볕정책'은 북한과의 접촉면을 넓혀가는 정책이며, 북한이 근본적 개혁, 개방의 길로 나오게 해, 남북이 국제사회에서 공존하고, 궁극적으로 통일의 문을 열어가자는 것.
김대중 정부 대북정책의 양대 기동은 금강산 관광과 이산가족 문제였음.
- 역사적인 이산가족 개별상봉과 북남 수뇌의 상봉
해외 교포가 아닌 남한 주민이 공식적으로 북한 당국으로부터 가족상봉을 위한 초청장을 받아 방북한 것은 한명훈 씨가 처음이었다. 한명훈씨 사례는 남북 이산가족 개별상봉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되었다.
코미디언 남보원(본명 김덕용)고 가수 현미(본명 김명선)가 방북했으나, 남보원만 50년 전 헤어졌던 누님을 만나고, 현미는 고향 땅을 밟아보는 데 만족해야 했다.
- 김당의 평양 방문과 올브라이트의 방북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르면, 북한을 방문할 사람은 사전에 통일부 교류협력국에서 북한주민 접촉승인을 받은 뒤에 북측 관계기관에서 보내온 초청장 원본을 제출해야 한다. 초청장에는 누구누구를 어떤 목적으로 언제부터 언제까지 초청한다는 내용과 초청하는 사람들이 북한에 체류하는 동안 '신변안전을 보장'한다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초청장은 신변안전 보장각서의 성격을 띤다.
통일교육원에서 방북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김당은 한국 기자로로서는 처음으로 아태평화위의 단독(개별) 초청을 받아 7박8일 동안 평양을 취재했다.
북한과 미국 사이 공동코뮈니케(10월 12일) 내용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위원장께 클린턴 대통령의 의사를 직접 전달하며, 미합중국 대통령의 방문을 준비하기 위하여,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가까운 시일 안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로 합의하였다."
* "통미봉남?"... 6.15선언은 민족적 행운"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방북단과 서방 기자단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5.1경기장에서 관람한 '조선노동당 창건 55돌 경축 10만명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이었다. 북한의 집단체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조직된 집단공연'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충격적인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7. 평양은 평화를 원했다
* 평화를 원하는 우리의 '가난한 이웃'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가장 열성적으로 추진했던 대표자가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인 법륜스님이었다. 법륜스님은 '북한 식량난의 실태 : 북한 식량난민 1천694명 면담조사 결과보고서'를 발표했다. '약 3년간 면담 조사자들이 속한 가족 구성원 9천249명 가운데서 발생한 사망자는 28.7%인 2천653명이었다... 북한 전체로는 1995년 여름부터 3년간 약 3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제사회에서도 최소 100만 명, 최대 300만 명이 기아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구호 활동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과거 레이건 행정부가 에티오피아에 대한 원조를 주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100만 명의 아사자를 냈다.
적게 잡아도 100만 명이 넘는 대량 아사의 알차적 책임은 명백히 김정일 정권의 몫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인도적 식량 지원을 가로막은 것은 북한의 핵개발과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같은 군사적 도발, 그리고 이로 인한 군량미 전용 논란 등이었다.
그러나 집권 초기에 동맹보다 민족 우선을 내세우다가 북한 붕괴론의 환상에 빠진 김영삼 정부가 냉탕과 온탕을 오가느라 대북 식량 지원의 타이밍을 놓친 탓도 컸다.
* 평양은 평화를 원했지만, 평화는 멀리 있었다.
평화(平和)는 그 본 뜻이 그렇듯, 벼(禾)를 사람들 입(口)에 고루 나눌(平) 때 오는 것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북 강경외교를 표방한 네오콘이 포진한 부시가 집권하면서, 대북정책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반 클린턴 정책을 펼침으로써, 김대중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온 '햇볕정책'은 추진 동력을 상실했다.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몰아봍이며 북한 붕괴론을 숨기지않자, 수교 직전까지 갔던 북미관계는 급속히 얼어붙었다. 북한은 NPT 탈퇴와 핵동결 해제로 저항했고, 미국은 대북 중유공급 중잔, 경수로 사업 중단으로 맞섰다.
이명박 정부는 9년 만에 다시 찾아온 한반도 평화의 모멘텀을 살리기는커녕, 오히려 훼방을 놓는 데 급급했다.
북한은 오랜기간에 걸쳐 온건파의 대화 제의가 거절당하면 군부 강경파가 대남 도발을 강행하는 패턴을 되풀이해왔다.
8. 북한 붕괴론이라는 장미빛 환상
1989년 11월 9일 동서냉전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그해 12월 미· 소 정상이 몰타회담에서 냉전종식을 선언하면서, 갑작스레 동독이 서독에 흡수 통일되었다.
동독의 슈타지(국가보위부)에 종사한 자는 즉시 면직되었으며, 외교관과 군인 · 경찰공무원 등 특수직 공무원들도 심사를 거쳐 십중팔구는 면직되었다. 이에 따라 부족한 행정 인력을 메우기 위해 서독의 공무원들이 구 동독 지역에 파견됐다. 1995년 통계에 의하면, 3만6천 명의 서독 공무원들이 동독 지역에서 일했다.
김영삼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고 화답했다.
'북한난민 수용계획'의 암호명인 '충무 3300'은 북한으로부터 대규모 난민이 밀려 내려올 경우에 대비한 계획으로, 최대 20만 명 규모의 수용시설을 각 시도에 운영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국정원과 기무사 등 관계기관은 대공용의점이 뚜렷한 북한 주민들을 예비 검속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북한비상통치계획'의 암호명인 '충무 9000'은 북한 체제가 붕괴하거나 북한의 남침을 격퇴해 흡수 통일할 경우, 통일부 주도하에 북한을 비상 통치하기 위한 계획이다.
* 중앙일보의 '충무계획' 보도와 북한의 반발
* 국방부와 외교부 그리고 청와대의 거짓말
한국과 미국은 북한 급변사태를 상정한 이른바 '개념계획 5029'의 작계화 문제와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의견 대립을 노출했다.
전략적 유연성은 주한미군이 유사시 한반도에서 다른 지역으로 또는 다른 지역에서 한반도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한미 양국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초부터 북한 급변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하고, 그해 12월에 만든 게 이른바 '개념계획 5029'이다. 북한의 내부정변, 대규모 소요사태, 정권의 붕괴, 대량 난민사태 등 급변사태시 군사적 조처가 포함되었다. 하지만 개념계획은 병력 동원이나 부대 배치 등이 담겨 있지 않은 추상적인 시나리오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뒤 미국측은 '개념계획 5029'의 작계화, 즉 '작계 5029'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이종석 사차장을 비롯한 NSC 관계자들이 합참으로부터 '작계 5029'의 일부 내용을 입수해 검토한 결과, 주권 침해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전시가 아닌 북한 급변사태에 한국 정부가 통제해야 할 제반 상황을 한미연합사가 통제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위원장인 NSC 상임위원회는 '작계 5029'가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내정 간섭 장치로 활용될 소지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비전시상황인 북한 급변사태에 대해 한국 정부가 주권적 차원에서 주도적으로 책임진다는 것은 본질적인 원칙이라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미국측에 설명함.
제3장 종극무간
9. 지구상에서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나라
북한은 CIA가 공식적으로 선언한 바와 같이, 지구상에서 가장 정보 접근이 어려운 나라이다.
2017년 5월 10일 CIA는 북한의 핵 · 미사일 위협을 전담하는 특수 조직 '코리아 임무센터'를 신설했다. CIA가 특정 국가를 전담하는 임무센터를 만든 것은 처음이었다. 센터장은 한국계 앤드루 김이었다.
박채서는 공작원을 은퇴한 뒤에도 대북 비선 활동을 하면서 북한 정권의 2인자인 장성택 행정부장과 속 깊은 대화를 주고받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 북한에서는 '전화번호부'도 비밀
북한은 1960년대 이후 국가 통계를 '국가기밀'로 분류해 발표하지 않고 있다.
* '가짜정보'에 기만당한 '김일성 사망' 해프닝
통신정보는 수집비용이 적은 데도 불구하고, 핵심부의 통화내용을 실시간에 들을 수 있어 적시성과 신뢰도가 높다. 그러나 통신감청을 예상하고 '가짜뉴스'나 '기만정보'로 속이면 기만 당하기도 쉽다. 김일성 사망 소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1986년 11월 16일 북한 당국은 전방지역에서 '김일성이 죽었다'고 방송하고 일부 초소에서는 조기를 거는 일이 발생했다. 전방첩보를 입수한 조선일보는 11월 16일 자 1면에 '김일성 사망설'을 전했다. 그리고 휴간일인 17일에는 '김일성 총 맞아 피살'이라는 제목으로 호외까지 냈다. '세계적 오보로 판명된 사건이다.
10. 미국의 한반도 전략 변화
11. 한 · 미 연합사 '작계 5027'
12. 한 · 미 간 국익이 충돌한 '전쟁 이후 단계'
제4장 : 남남북녀
13. '행동대장 이상재'와 '괴벨스 허문도'
14. 언론기본법과 '보도지침'
15. '남남북녀' 결혼 프로젝트
16. 최초의 남북합작 광고촬영
제5장 : 병아리 작계
17. 삼합회 총회주와의 만남
18. 중국군의 '병아리 계획', 39도선 이북을 점령하라
19. 개성공단과 골프리조트의 덫
20. 김정일 '100인 그룹'과 장성택 비자금
제6장 : 불신지옥
21. 박채서 덫에 빠지다
22. 미국의 방해공작
23. 노무현과 미국은 서로를 믿지 않았다
제7장 : 아, 천안함
24. 이명박 정권 출범과 북한의 대남전략
25. 이명박 정부 시기의 비밀 대북접촉
26. 2인자 장성택과 권력투쟁
27. 대한민국이 공격당했다
에필로그 : 북풍과 병아리 계획, 그리고 천안함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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