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첫 직권재심 40명 무죄…재판장은 ‘순이삼촌’을 꺼내 읽었다
군법회의 뒤 수형 중 행불
검찰 “위법부당한 공권력 바로잡길”
재판부 “역사적 의미 남다르다”
“오늘 여기 와서 아버지 죄명이 내란죄라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조사받고 나왔지만, 두번째 조사받고 목포형무소로 간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무죄를 선고해주셔서 모든 한이 풀리는 것 같아 감사합니다.”
29일 제주지법에서 열린 4·3 직권재심 청구소송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고 허봉례씨 딸 허귀인(73)씨가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제주지법 형사4-1부(재판장 장찬수)는 광주고검 소속 제주4·3사건직권재심권고합동수행단이 직권재심을 청구한 40명에 대한 재판을 두차례 나눠 진행한 뒤,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 40명은 모두 4·3 당시 군법회의에서 유죄선고를 받고 수감 중 행방불명됐으며, 1948년과 1949년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에 기재된 2530명 가운데 인적사항이 확인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재판에서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 모두 4·3사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줬다. 변진환 검사는 “4·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은 비극적인 사건이다. 이념과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된 이 사건으로 유족들은 수십년 동안 희생자들을 가슴에 묻고 통한의 세월을 살았다. 이번 직권재심으로 공권력의 위법부당한 잘못을 바로잡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며 “전원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했다.
국선변호인으로 나선 강병삼 변호사도 “큰아버지가 군법회의 희생자다. 제 아버지는 오래전 큰아버지 비석을 세워 한을 풀어줬다고 하셨다. 저승에 가서도 고생했다고 해주실 거라고 말씀하셨다”며 “국선변호인으로 이 자리에 서게 돼 감사드린다”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법정에 나온 희생자 유족들은 “아버지가 처가에서 거름을 내다 갈중이(제주 전통 노동복)를 입은 채 끌려갔다”(김화중), “나이가 들어 10여년 동안 앉아서 생활하신 외할아버지가 집에서 소리만 나면 유리창에 붙어서 4·3 때 끌려간 아들이 보이느냐고 물었다”(김영철)며 눈물 속에 과거를 회상했다.
장 재판장은 재판을 시작하기에 앞서 “잠을 많이 설쳤다. 긴장해서 그런 것 같다. 직권재심권고합동수행단 첫번째 사건으로 이번 재판의 역사적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장 재판장은 이날 4·3의 비극을 그린 소설가 현기영의 <순이 삼촌>을 들고나와 “저는 4·3에 무지했다”며 한 구절을 읽기도 했다.
“그해 고구마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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