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핑장서 한 말 다 도청됐다니”…국정원 직원 1심 유죄
국정원 수사관 4명 징역형에 집행유예
프락치 활용해 소화기 모양 도청 장치 설치
캠핑장 간 대학생들 대화 5시간 동안 도청
재판부 “프락치 관여 불구 국정원 직원도 공동정범”
프락치 폭로로 알려져…“권력 압박 이기지 못했다”
민간 정보원(프락치)을 이용해 일반인을 불법 도청한 혐의로 기소된 국정원 직원들에게 징역형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일반인들이 평소 동료들과 하는 말을 동의도 없이 녹음해 도청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김동현 부장판사)는 지난달 31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국정원 대공수사국 소속 수사관 최 모 씨 등 4명에게 각각 징역 6~10월에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지난 2015년 8월 충남 서산의 한 캠핑장 안에 비밀 녹음 장비를 설치해 대학생들의 대화를 5시간 정도 녹음한 혐의를 받았다. 국정원이 포섭한 프락치 A 씨가 대화를 주도하도록 한 뒤에 이를 녹음했다.
법 위반 사실 알고도 동의없이 녹음한 국정원 수사관
국정원 수사관들은 대화에 참여하는 대학생들의 동의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녹음하는 것이 통신비밀보호법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법원 영장을 발부받거나 긴급 감청에 따른 사후 허가 과정도 거치지 않았다.
지난 2014년 국정원은 서울의 한 대학 학생조직에서 활동했던 A 씨에게 접근해 속칭 ‘프락치’로 포섭했다. A 씨는 이후 국정원 협조자로서 자신이 속한 단체의 재학생과 졸업생 등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관련 조사 활동에 참여했다.
국정원 직원들은 지난 2015년 7월 프락치 A 씨로부터 대학생들이 충남 서산에 모모일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사전에 충남 서산의 캠핑장을 찾아 캐러밴 내부 구조를 확인한 뒤에, 녹음장치가 은닉된 소화기 모양의 비밀 녹음 장비를 제작했다. 소화기 모양이어서 일반인이 육안으로 식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치밀한 준비를 통해 설치된 비밀 녹음 장비는, 대학생들의 대화를 5시간 동안 녹음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 이들은 캠핑장 부근을 오가는 시민들의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재판부는 “국정원 수사관들이 법률상 허용되지 않은 타인 간 사적 대화를 녹음한 것으로써, 직무 특성상 이런 위법 행위를 조심해야 하는 피고인들이 범행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단순한 과실이나 실수에 의한 범죄라고 볼 수 없다”라면서 “제보자가 대화 녹음에 일부 관여했다고 하더라도, 피고인들은 범행에 가담한 공동정범으로서 죄책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라고 밝혔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계속된 프락치 활동
다만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오랜 기간 국정원에 근무하면서 국정원장, 대통령 등으로부터 표창을 받는 등 모범적으로 공무원 생활을 한 점, 녹음 자체가 사적 이익이 아닌 국가 안보를 위해 이뤄진 점 등을 참작했다.
이 사건은 2019년 프락치 A 씨가 자신의 프락치 활동을 폭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A 씨는 “제가 너무나 부족한 인간이라서 국가권력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해서는 안 될 행위를 했다”라면서 “죄 없는 사람들의 죄를 만드는 일을 5년 가까이 하면서 매일 무섭고 힘들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당시 10만 원, 20만 원이 없어 신용불량자가 되는 게 무서웠다. 그래서 (국정원이 준) 녹음기를 들고 동료와 선후배를 만났다”라면서 “하지만 경제적 사정이 어려운데도 신용대출을 받아서 저를 도와주려고 했던 선배의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내 양심 고백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특히 A 씨의 프락치 활동은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어졌다. 이는 향후 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다고 해도 국정원의 ‘프락치’를 활용한 국내 개입 활동은 계속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당시 A 씨는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저도 기대하고, 사업이 종료되는 것인지 국정원 직원에게 물었다”라면서 “하지만 국정원은 ‘김대중, 노무현 때도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한다. 그러니 지금 하는 사건들은 기회가 될 때 터뜨릴 것’이라고 이야기했다”라고 말했다.
국정원 ‘프락치’ 공작사건대책위원회에 따르면, A 씨가 활동한 곳은 ‘통일경제포럼’이라는 단체였다. 총사찰 대상자는 50명가량이었으며, 5년간 모든 모임과 개인적인 대화 등을 전부 녹음해 제공했다.
국정원은 A 씨에게 한 달에 200만 원씩 지급하고, 허위 진술서를 작성할 때마다 만~80만 원을 추가 지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박승철 기자psc2023@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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