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회원(永懷園)(속칭 애기능)에 대하여
그림 1) 영회원 민회빈 강씨 묘
* 종 목 : 사적 제357호
* 명 칭 : 영회원(永懷園)
* 분 류 :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 수량/면적 : 2,182㎡
* 지 정 일 : 1991.10.25
* 소 재 지 : 경기 광명시 노온사동 산141-20
* 시 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국유 |
*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愍懷嬪姜氏)의 무덤이다.
* 민회빈 강씨는 강감찬의 19대 손녀이기도 하며,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 많은 고생을 하기도 했다. 귀국 후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의 후궁 조씨 등이 민회빈이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왕실을 저주한다는 모함을 하여, 궁궐에서 쫓겨나 1646년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 44년(1718)에 죄가 없음이 밝혀져 다시 복위되고, 고종 7년(1903)에는 무덤을 영회원이라 부르게 되었다.
무덤 주변에는 많은 석물들이 있으며 비석과 정자각은 남아있지 않다.
@ 소현세자[昭顯世子]
* 1612(광해군 4)~1645(인조 23).
* 인조의 맏아들.
이름은 왕().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빈(嬪)은 우의정 강석기(姜碩期)의 딸 민회빈(愍懷嬪)이다. 1625년(인조 3) 세자로 책봉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전주에 내려가 남도(南道)의 민심을 수습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한 뒤 자진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뒤에 효종) 및 주전파 재신(宰臣)들과 함께 인질로 청나라 선양[瀋陽]에 갔다. 그는 9년간 선양에 머무르는 동안 현실적으로 청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양국간에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조정자로서 상당한 재량권을 행사했다. 1644년 9월에는 명나라를 정벌하는 청나라 군사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 70여 일을 머물면서 독일인 신부 J. 아담 샬(일명 湯若望)에게 천주교와 서구 과학문명에 대한 여러 지식을 배워,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 등을 가지고 왔다. 1645년 2월 18일 서울로 돌아왔으나, 조정은 서인들이 반청친명정책(反淸親明政策)을 고수하여 세자의 태도에 부정적이었고, 인조도 세자의 선양에서의 행동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또한 세자빈과 관계가 좋지 않던 인조의 총비 조소용(趙昭容)이 여러 가지로 세자를 모함했다. 세자가 귀국한 지 2개월 만에 원인 모를 병으로 급사(急死)하자 세자빈과 여러 대신들이 사인을 규명하고자 했으나,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서둘러 입관을 마쳤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시신은 9혈에서 출혈하고 있었으며 진흑(盡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그뒤 세자빈은 역모를 꾸몄다 하여 그의 가족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장지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에 있다. 처음에는 소현묘라 했으나, 고종 때 소경원(昭慶園)으로 격상되었다.
@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
?∼1646(인조 24). 조선시대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嬪). 본관은 금천(衿川). 우의정 석기(碩期)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가례(嘉禮)를 올려 소현세자빈이 되었다. 병자호란 뒤인 1637년 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갔다가 1644년에 귀국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는 심관(瀋館)에서 국왕의 대리자로서 많은 재량권을 행사하였고 청측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귀국하게 되자 인조는 세자에게 전위(傳位)를 강요당하거나 세자 대신 입조(入朝)의 요구를 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세자는 환국 후 두달 만에 병증(病症)이 있은 지 3일 만에 34세로 급서(急逝)하였다. 세자의 독살혐의가 짙은데도 인조는 입관(入棺)을 서두르고 강빈(姜嬪)과 대신들의 간청도 뿌리치고 장례를 매우 간소하게 지냈다. 그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이 귀국하여 세자가 되었고, 소현세자의 원손(元孫)은 왕위계승자격을 잃게 되었다.
여기에다 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강빈과 반목질시하던 조소용(趙昭容)이 강빈이 인조를 저주하였다고 무고하여 그의 형제들을 모두 유배시키자, 강빈은 인조거실(仁祖居室)근처에 가서 통곡하고 그때부터 왕에게 조석문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도 받게 되어 후원별당에 유치(幽置)되었다가 조정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46년 3월에 사사(賜死)되었다.
이어 세자의 어린 세 아들은 귀양가게 되고, 강빈의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 혹은 장살(杖殺)되는 비극이 전개되었다.
* 애기능 저수지
* 안양천
*** 민회빈 강씨의 묘 인근에(능선 하나 건너) 금천 강씨 문중묘역이 조성되어있다.
일설에 의하면 민비의 첫째아들이 항문이 막힌 채 태어나 출생한 지 5일만에 죽었다고 하며, 영회원 가까운 곳에(능선 하나 건너) 묘를 썼기 때문에 이 일대가 ‘애기능’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이곳에 있던 애기능은 약 10여년전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그 자리에는 금천 강씨 문중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민회빈이 금천 강씨인지라 그리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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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가져다놓은 것일까? 영회원 표지석 옆에는 꽃다발 두 개가 바싹 마른 채 놓여 있었다.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바싹 마른 꽃이 애처롭게 보였다.
지난 6일, 광명시 노온사동에 자리 잡고 있는 '영회원'을 찾았다. 영회원은 소현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무덤이다. 민회빈 강씨는 강빈으로 불리기도 한다.
햇볕은 뜨거웠으나 바람은 서늘한 기운을 잔뜩 품은 계절에 찾아간 영회원은 고즈넉하기만 했다. 애기능 저수지를 지나 영회원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구불거리는 오솔길이었다. 그 길에는 나이가 400살이 넘는 느티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느티나무는 나뭇잎이 조금씩 붉은 기운으로 물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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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회원 가는 길에는 400살이 넘는 느티나무가 있다. |
ⓒ 유혜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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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무, 영회원의 영욕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400년 이상을 한 자리에 붙박여 있었으니 강빈이 이곳에 묻히던 날의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이곳에 가거든 잊지 말고 느티나무를 한 번쯤 쓰다듬어 보기를 권한다. 나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영회원은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게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무덤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영회원에서는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어야 했던 젊은 청상의 한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월이 너무 많이 흐른 탓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가을 볕이 너무 따뜻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강빈은 아주 총명한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학식이 풍부하고 지성을 겸비했으며, 곧은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강빈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영회원을 찾는 의미가 없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소현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강빈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소현세자가 조선의 임금이 되었다면 왕비가 되었을 것이나, 그이는 왕비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오히려 푸르디 푸른 나이에 한을 품고 죽을 운명이었다.
임금의 음식에 독을 탔다는 누명... 서른다섯 나이에 사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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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회원은 울타리가 쳐져 있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
ⓒ 유혜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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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면서 강빈의 운명은 바뀌었다. 청나라에서 강빈은 자신의 빼어난 경영수완을 발휘할 수 있었다. 국제무역과 농사로 재산을 축적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소현세자와 강빈은 청나라 고관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청나라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강빈을 기다린 것은 가혹한 운명이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독살했다는 이야기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뒤 고작 두 달 뒤에 소현세자가 갑작스레 죽었다. 인조는 강빈 역시 죽인다. 인조가 먹는 음식에 독을 탔고 후궁인 소용 조씨를 모함했다는 혐의였다. 그뿐인가. 소현세자와 강빈의 어린 세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을 보낸다.
첫째아들 경선군은 열아홉 살, 둘째 아들 경완군 열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주도에서 죽었다. 셋째 아들 경안군은 나중에 유배에서 풀려나나 그 역시 스물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부모의 비극적인 운명이 자식들에게도 이어진 것일까?
경안군이 제주도로 귀양을 떠날 때 나이가 고작 네 살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제주도로 귀양을 떠나야 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경안군은 드라마 <추노>에서 오지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왕손이다.
자신이 죽은 뒤, 어린 세 아들이 제주도로 귀양을 가고 친정마저 풍비박산이 난 것을 강빈은 알았을까?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았고, 훗날 효종이 된다. 효종은 강빈의 무고함을 밝혀주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소현세자의 후손이 대를 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현실은 잔혹하다.
강빈의 무덤은 처음에는 아주 초라한 봉분에 지나지 않았다. 임금의 음식에 독을 탄 죄인의 신분으로 사약을 받았으니, 장례조차 변변히 치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남편의 곁이 아닌 친정의 선산에 묻혔을 터. 그래서 영회원은 애기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친정집에서는 어린 나이에 시집간 강빈을 '애기씨'라 불렀고, 그이가 묻힌 무덤이 안쓰럽고 안타까워 '애기능'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양철원 광명시청 학예연구사의 설명이다. 소현세자는 서삼릉에 잠들어 있다.
강빈이 죄가 없음은 그이가 죽은 지 70여 년이 지난 뒤에 밝혀진다. 숙종 때였다. 숙종 때 혐의가 벗겨진 강빈을 소현세자와 합장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끝내 강빈은 남편의 곁으로 가지 못한 채 광명시에 남았다. 대신 무덤은 민회원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리고 고종 때 영회원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편 곁으로 가지 못한 초라한 무덤... 새로 조명받는 강빈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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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회원 부근에는 애기능의 유래를 간직한 '애기능 저수지'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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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빈은 비록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아주 높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지만 실의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무역 등을 통해서 재산을 불릴 줄 아는 실용성을 갖춘 현명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강빈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으며, 그에 대한 평가는 점점 더 깊이를 더하고 있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슬픈 삶은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다. 드라마틱한 요소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JTBC에서 방영한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은 강빈의 삶을 조명한 드라마였다. 요즘도 강빈은 드라마에 등장하고 있다. tvN에서 방영하고 있는 <삼총사>에 소현세자와 강빈이 나온다. 드라마마다 강빈은 조금씩 다른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역사 속의 강빈과 드라마의 강빈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면서 드라마를 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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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회원 가는 길은 가을이 깃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
ⓒ 유혜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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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대 광명시장은 "강빈을 제대로 조명해서 광명의 인물로 널리 알려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강빈은 청백리의 표상인 오리 이원익 대감과 더불어 광명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무덤은 초라하고 소박하지만 강빈은 결코 초라한 인물이 아니다. 소현세자와 더불어 우리 역사에서 오래도록 기억되면서 존경받아야 하는 존재다. 가을이 가기 전에 한 번쯤 영회원에 들러 강빈의 삶을 돌이켜보는 것은 어떨까?
[ 유혜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