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에 잘려나간 북벌의 꿈
-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된 토지 개혁을 주도하고 요동 정벌을 추진하다 살해당한 정도전
정도전은 고려 우왕 1년(1375) 북원(北元) 사신의 접대를 거부했다가, 지금의 전남 나주 지방인 회진현(會津縣)의 거평부곡(居平部曲)에 유배된다.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그에게 권신(權臣) 이인임·경복흥이 사신 접대를 맡기자,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든지, 오라 지워서 명나라로 보내겠소”라고 반발한 결과 유배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부친은 형부 상서(刑部尙書)를 지낸 정운경(鄭云敬)이었지만, 모친이 서녀(庶女)였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는 데 많은 고초를 겪었던 정도전이었지만, 신념에 따라 친명 외교를 추구하다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가 유배 가자, 그의 부인은 “끝내는 국법에 저촉되어 이름은 더럽혀졌으며, 행적이 깎이고, 몸은 남쪽 변방에 귀양 가서 풍토병이나 걸리고 형제들은 나가 쓰러져서 가문이 망하였습니다”(‘가난’)라고 원망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는 유배에서 화려한 벼슬길보다 더 큰 교훈을 얻었다.
△ 정도전이 수복을 꿈꿨던 요동 벌판. 정도전이 사병을 혁파하고 군제를
단일화하려고 하자 왕자와 공신들은 크게 반발했다.(사진/ 권태균)
그는 부인에게, “예전의 내 친구들은 정이 형제보다 깊었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구름처럼 흩어졌다”고 답했듯이 친구들을 잃었지만 대신 민중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부곡민들이 유배객을 환대해준 데 감격해, “세상의 버림을 받아 멀리 귀양 왔는데… 모두가 지극히 후대해주었다. 내가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감동하여 그 시말(始末)을 적어서 나의 뜻을 표시한다”(‘소재동기’(消災洞記))라고 느낌을 적었다. 정도전은 유배 생활 때 천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유배 생활을 통해 민중의 삶 배워
이것이 중요한 전기였다. 정도전이 토지개혁에 집착한 것은 토지 문제를 백성들의 시각으로 바라본 결과였다. <고려사> ‘식화(食貨)’조는 “요즈음 들어, 간악한 도당들이 남의 토지를 겸병함이 매우 심하다. 그 규모가 한 주(州)보다 크며, 군(郡) 전체를 포함하여 산천(山川)으로 경계를 삼는다”라고 전할 정도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었는데, 이는 대다수 농민들이 몰락한 결과였다. 대다수 농민들은 권세가에게 땅을 빼앗기고 전호(佃戶·소작인)가 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유배에서는 풀렸지만 왜구의 창궐과 권세가들의 박해 때문에 정착하지 못하던 그는, 우왕 9년(1383) 함경도 함주(咸州)로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군대를 보고,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무엇인가는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둘의 만남은 정도전의 혁명이념과 이성계의 혁명무력의 만남이자 결합이었다. 이듬해인 우왕 10년(1384) 10년 만에 다시 벼슬길에 오른 정도전은 이성계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한다.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으로 극도로 어수선한 정국은, 정도전의 기획에 의해 토지개혁 정국으로 전환된다. 그해 7월 같은 역성혁명파 조준(趙浚)이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문을 올린 것을 필두로, 간관 이행(李行), 전법판서 조인옥(趙仁沃) 등이 잇달아 사전(私田) 개혁을 주장하고 나선 것은 정도전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위화도 회군의 또 다른 주역 조민수를 “사전 개혁을 저해하므로 대사헌 조준이 논핵하여 내쫓았다”라는 <고려사절요>의 기록대로 토지개혁 정국으로 이성계의 경쟁자 조민수까지 제거했다.
정도전은 “전제(田制·토지제도)가 무너지면서 호강자(豪强者)가 남의 토지를 겸병하여, 부자는 밭두둑이 잇닿을 만큼 토지가 많아진 반면,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게 되었다”(‘부전’(賦典) <조선경국전>)라는 분노를 토지개혁 정국으로 연결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구상하는 토지개혁은, “옛날에는 토지를 관에서 소유하여 백성에게 주었으니, 백성이 경작하는 토지는 모두 관에서 준 것이었다. 천하의 백성으로서 토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부전’)라고 말한 대로, 국가가 토지를 몰수하여 공전(公田)으로 만든 다음, 백성들의 수대로 나누어주는 계구수전(計口授田) 방식을 추구했다.
이들은 공양왕 2년(1390) “기존의 모든 토지 문서(公私田籍)를 서울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는 <고려사> ‘식화지’의 기록처럼, 모든 토지문서를 불태운 뒤 그 토대 위에서 공양왕 3년(1391)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을 반포했다.
그러나 과전법은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지는 못하고 직역자에게만 토지를 주는 방식으로 후퇴했는데, 이는 권세가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부전’에서 그 실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전하(이성계)께서는 잠저(潛邸·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집)에 계실 때, 친히 그 폐단을 보고 개탄스럽게 여기어 사전 혁파를 자기의 소임으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개 경내의 토지를 모두 몰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키고, 인구를 헤아려서 토지를 나누어주어서 옛날의 올바른 토지제도를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는데, 당시의 구가(舊家) 세족(世族)들이 자기들에게 불편한 까닭으로 입을 모아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여러 가지로 방해하여, 이 백성들로 하여금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어찌 한탄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부전’<조선경국전>)
그러나 정도전은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前朝·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배나 낫지 않겠는가?”(‘부전’)라고 토지개혁의 성과를 자부했다. 혁명은 아니더라도 혁명에 가까운 개혁이란 뜻이었다.
명나라,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
이성계는 과전법 제정 이듬해 조선을 개창하는데, 그의 즉위에 많은 조짐들이 있었다고 각종 사료는 전한다. “木子가 돼지를 타고 내려와서 다시 삼한(三韓)의 강토를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말도 그중 하나인데, 木子는 곧 李자의 파자(破字)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새 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조작의 혐의가 짙은 이런 조짐들 때문이 아니라, 한 해 전에 반포한 ‘과전법’ 덕분이었다. 과전법으로 개혁정책의 혜택을 입은 백성들이 새 왕조 개창을 지지했기에 고려의 구신(舊臣)들은 농민들을 새 왕조 개창에 반대하는 봉기로 내몰 수 없었던 것이다. 토지개혁이 조선 개창의 원동력이었는데 그 토대는 정도전이 마련한 것이었다.
△ 정도전의 초상. 모든 백성에게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주려했던 그의 꿈은 끝나버린 것일까?
조선의 유학자들이 비판받는 두 가지 큰 이유는, 보수적 사고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때문인데, 두 가지 모두 양란(兩亂·임진, 병자난) 이후에 두드러진 현상이다.
정도전은 불교를 극력 비판하는 <불씨잡변>(佛氏雜辨)을 썼지만, 과전법 시행에서 보듯이 보수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친명 외교정책을 주장하다가 유배까지 갔지만 사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대주의는커녕 요동 수복을 모색했던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이 개국 직후인 1392년 10월 계품사(啓稟使) 및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간 것은, 표면상 새 나라 개창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게 1393년 5월 태조 흠차 내사(欽差內史) 황영기(黃永奇) 등을 사신으로 보내, “사람을 요동으로 보내 포백(布帛)과 금은으로 우리 변장(邊將)을 꾀었다”고 비판하고, 또 “요사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여진족을 꾀여 가권(家眷) 500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몰래 건넜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소”라고 항의했다. 정도전이 요동 수복을 위해 사람을 포섭하고, 여진족을 회유하는 첩보활동을 했다는 항의이다. 주원장은 또 “어찌 그대의 고려에서 급하게 병화(兵禍)를 일으키는가? …짐은 장수에게 명해서 동방을 정벌할 것이지만… 여진인들을 모두 돌려보낸다면 짐의 군사는 국경(國境)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오”(<태조실록> 2년 5월23일)라고 협박했는데, 이는 명의 당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이 기마민족인 여진족과 손잡고 북벌에 나선다면 명나라로서 막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정도전은 태조 2년 11월에는 구정(毬庭)에 군사들을 모아놓고 진도(陣圖)에 따라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격구를 빙자한 요동정벌 훈련이었다.
드디어 명나라는 태조 5년(1396) 2월 ‘표전문(表箋文) 사건’을 빌미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다. 정도전은 명의 의구심을 풀기 위해 그해 7월 판삼사사(判三司事·종1품)에서 봉화백(奉化伯)으로 물러났으나 주원장은 만족하지 않고 태조 6년(1397) 4월, “정도전이란 자는 왕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가? 왕이 만일 깨닫지 못하면 이 사람이 반드시 화(禍)의 근원일 것이다”라며 정도전의 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사병 혁파에 왕자와 공신들 반발
정도전과 함께 북벌에 적극적이었던 남은(南誾)은, “사졸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동명왕(東明王)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라고 상서(上書)했다. <태종실록>에는 정도전이 태조에게 했다는 의미심장한 구절이 전한다.
“정도전이 지나간 옛일에 외이(外夷)가 중원(中原)에서 임금이 된 것을 차례로 들어 논하여 남은의 말을 믿을 만하다고 말하고, 또 도참(圖讖)을 인용하여 그 말에 붙여서 맞추었다.”(<태종실록> 5년 6월27일)
‘외이가 중원에서 임금이 된 것’은 바로 중원을 정복했던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고족의 원나라 등을 뜻하는 것이었다. 13년 전(1384) 함주의 이성계를 찾아가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국왕이 되는 길을 제시했던 정도전이 이제는 황제가 되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군이 압록강을 넘으면 명과 조선 중 하나가 끝장나는 전면전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북면 변방에서 태어나 개국의 위업을 달성한 이성계로서 ‘동명왕의 옛 강토 회복’은 남은 생애를 걸만한 일이었다.
급기야 명나라는 표전문 문제로 자국에 억류한 조선 사신 정총·김약항·노인도를 사형했다. 정총이 태조 이성계의 부인 현비(顯妃) 강씨의 승하 소식을 듣고 흰 상복을 입었다는 이유였다. 이 사건은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을 더욱 분개하게 했다. 인신(人臣)으로 국모의 상을 당해 상복을 입었다고 사람을 죽인 만행에 대한 분개는 당연했다.
정도전은 태조 6년(1397) 12월22일 동북면 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가 되어 함경도 지역의 주군 구획과 호구 정리, 성보(城堡) 수리, 그리고 군관의 재품(才品) 등을 파악하고 정비했다. 이 역시 전쟁 준비였다. 이성계는 재위 7년(1398) 함경도에 있는 정도전에게 서신과 옷 등을 내려주면서 임금이란 명칭 대신에 ‘송헌거사’(松軒居士)라는 당호(堂號)를 사용할 정도로 깊은 신임을 보였다.
그러나 요동 정벌을 위해 각 왕자와 공신들이 소유한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군제를 단일화하려 하자 커다란 반발이 일어났다. 사병 개혁에 대한 반발이었다. 요동 정벌에는 고토 회복이라는 역사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사병 혁파라는 국내 정치적인 요소도 들어 있었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이란 대의명분으로 군제를 단일화함으로써 여러 왕자들과 공신들이 갖고 있던 사병을 관군으로 편재하려 한 것이다.
왕자들이 진법 훈련에 사병들을 참가시키지 않자 이성계는 회안군 방간(芳幹), 익안군 방의(芳毅), 정안군 방원(芳遠), 흥안군 이제(李濟) 등 왕실 종친들의 부하 장수들에게 태 50대를 내렸다.
‘지극한 정치’의 꿈은 아직도 진행중
이때 대다수의 왕자들은 이성계의 강력한 명에 복종해 사병 혁파에 응했지만, 이방원과 방간이 이에 거부해 난을 일으키면서, 요동 수복은 목전에서 좌절되었다.
태조 7년(1398) 8월 이방원은 이성계가 와병 중인 틈을 타 전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방원과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정도전은 남은의 첩 소동(小洞)의 집에서 이직과 술잔을 나누고 있다가 살해된다. 그만큼 전격적인 쿠데타였다. 정도전뿐만 아니라 남은·심효생·이근·장지화 등 북벌을 주장하던 인물들은 모두 살해됐다.
새 나라 개창에 성공했던 정도전이 꿈꾸었던 요동 정벌은 이렇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모든 백성에게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입히려 했던 정도전, 요동 수복을 꾀했던 그의 꿈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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