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정치로 진골에 맞서다
--- 당나라에서 문명을 떨친 뒤 신라 개혁에 뛰어든 최치원의 투쟁과 좌절
▣ 이덕일 역사평론가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은 “(최치원은) 서울(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역사 기록에 전하는 것이 없어 그 세계(世系)는 알 수 없다”라고 전하고 있다. 세계를 알 수 없다는 것은 그의 가문이 진골이 아닌 육두품임을 뜻한다. ‘최치원 열전’은 또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12세에 바다를 따라 배를 타고 당나라로 들어가려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어린 나이에 해외 유학을 결심한 것은 신라에서는 진골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때 부친 최견일은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힘써 공부하라”고 격려했다. 부친이 말한 과거는 신라가 아니라 당나라의 과거였다.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진골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었던 반면 세계제국 당나라는 빈공과(賓貢科)를 설치해 뛰어난 외국인들을 등용했다. 최치원은 세계의 유수한 인재들이 몰리는 빈공과에 유학 6년 만에, 18살의 나이로 단 한 번에 급제했다. 당나라 시인 고운(顧雲)이 “열두 살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 문장으로 중국을 감동시켰네/ 열여덟 살에 글 싸움하는 과거에 나아가/ 화살 한 대로 금문책(金門策)을 깨었네”(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라는 시를 남겼을 정도로 열여덟 살 최치원의 과거 급제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 진골의 특권, 신라를 목조르다
급제 뒤 몇몇 관직을 거치던 최치원은 당 희종(僖宗) 6년(879)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진압사령관인 제도행영병마도통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썼다. “광명 2년(881) 7월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 모(某)는 황소에게 고한다”로 시작되는 ‘토황소격문’을 읽던 황소가 간담이 서늘해져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회자되면서 최치원의 문명은 당나라 전체에 높아져갔고, ‘토황소격문’은 당나라 전체에 필사되어 돌아다녔다. 최치원은 4년간 고변의 군막에서 표(表)나 격문 등을 저술하는 일에 종사한 공으로 879년 도통순관에 승차되면서 당 희종으로부터 비은어대(緋銀魚袋)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황제에게 인정받은 최치원은 당에서 출세할 수 있는 모든 요건을 갖춘 셈이었다. 그러나 그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견딜 수 없었다.
“가을바람에 오직 괴로이 읊나니/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 적구나/ 창밖 삼경에 비가 내리는데/ 등 앞의 외로운 마음 고향을 달리네.”(秋風惟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가을밤 비 내리는데’(秋夜雨中), <동문선>)
그는 귀국을 결심했다. 귀국 결심을 알리자 당 희종은 큰 혜택을 주었다. ‘최치원 열전’에는 “나이 28세에 이르러 귀국할 뜻을 가지자 당 희종이 이를 알고 광계(光啓) 원년(885, 헌강왕 11년)에 조칙을 지닌 사신으로 보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의 사신 자격으로 귀국하게 했던 것이다.
‘최치원 열전’이 헌강왕이 “그를 붙들어두려고 시독 겸 한림학사 등의 벼슬을 주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헌강왕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는 헌강왕도 신라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당시 신라는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한 시기였다. 신라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핵심 요인은 진골들의 특권이었다. 신라는 출신 신분이 아니라 당나라처럼 능력이 평가받는 사회가 되어야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최치원의 정치사상과 행정 경험이 반드시 필요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익힌 정치사상과 행정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 했다. 그의 정치사상이란 유학(儒學)정치 사상을 뜻한다. 유학정치 사상은 과거제를 기본으로 운용되는 체제로서 신분제를 기본으로 운용되는 신라의 골품제와는 전혀 다른 정치사상이었다. 신라는 능력이 아니라 출생 당시의 출신성분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는 폐쇄적인 사회였다. 최치원은 이를 유학정치 체제라는 좀더 개방적인 사회제도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진골 귀족들은 이를 거부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은 “최치원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당나라에 유학해 얻은 바가 많아서 앞으로 자신의 뜻을 행하려 하였으나 신라가 쇠퇴하는 때여서 의심과 시기가 많아 용납되지 않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받은 ‘의심과 시기’는 그가 육두품 출신이기에 더욱 거세게 가해졌다. 최치원 자신이 육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 말한 것처럼 이 역시 지배계급의 일원임에는 틀림없으나 진골 위주의 신라 사회에서는 중간 지배계층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 최치원의 승부수, 시무책 10여 조
신라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은 헌강왕이나 그 뒤를 이은 진성왕이나 모두 느끼는 과제였다. 두 왕이 모두 최치원을 중용하려 했던 것은 이런 개혁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각지에서 빈발하는 농민 봉기는 신라 사회가 근본적인 개혁에 나서지 않을 경우 내부에서 무너져버릴 것임을 말해주었다. 최치원은 진성여왕 9년(895) 난리 중에 사찰을 지키다 죽은 승병들을 위해 만든 해인사 경내 한 공양탑의 기문(記文)에서 “당나라에서 벌어진 병(兵)·흉(凶)이란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 멈추면서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서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라고 애도했다. 변화를 거부한 결과 신라는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내전 상황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으나 진골은 자신들의 특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중앙 정계의 이런 상황에 좌절한 최치원은 지방직인 외직을 자원해 대산군(大山郡·전북 태인), 천령군(天嶺郡·경남 함양), 부성군(富城郡·충남 서산) 등지의 태수를 전전했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진성왕 7년(893)에는 하정사에 임명되어 당에 가려 했으나 흉년이 계속되면서 농민들이 초적(草賊)으로 변해 길을 막는 바람에 가지 못했을 정도로 신라 사회의 혼란은 계속되었다.
최치원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가 귀국 10년째인 진성여왕 8년(894) 신라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종합적 개혁안인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은 그의 승부수였다. 시무책에는 당연히 신분보다는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이는 진골의 신분적 특권을 축소하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자는 주장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위기에 빠진 신라 사회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한 진성여왕은 최치원의 시무책을 즉시 가납하고 그를 육두품 중의 최고 관직인 제6관위 아찬에 봉했다. 그러나 아찬 정도의 품계로 진골들의 특권과 싸우며 개혁정치를 추진할 수는 없었다. 그의 시무책은 진골 귀족들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시대와 조우하지 못한 불우한 천재 최치원은 은둔의 길을 택했다. 40여 살 장년의 나이로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경주 남산과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등을 두루 돌아다니며 세상의 시름을 잊으려 애썼다. 육두품 출신의 그로서 체제 내의 개혁이란 처음부터 잘못된 단추였는지도 모른다.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유랑 속에서 생을 마쳤다. <삼국사기>는 그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하고 있으나 그때가 언제였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죽음의 경위마저 불분명하게 생애를 마친 것이다.
최치원은 자신을 ‘썩은 유학자’(腐儒) 또는 ‘유문의 끄트머리 학자’(儒門末學)라며 유학자로 자처했다. 그러나 그는 지증(智證)·낭혜(朗慧)·진감(眞鑑) 등 선승들의 탑비문을 찬술하고, 노장사상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이런 견지에서 유·불·도 삼교의 통합을 주장했다.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서 그는 “우리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이 교(敎)를 설치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하는데 군생(群生)을 접촉하여 교화한다”라고 말했다. 이 글에서 최치원은 “집에 들어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魯司寇·공자)의 주지(主旨)요, 무위의 일에 처하여 불언(不言)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周柱史·노자)의 종지(宗旨)이며, 모든 악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봉행하는 것은 축건태자(竺乾太子·석가)의 교화인 것이다”라고 신라 고유의 풍류도에 삼교를 접합시켰다. 그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상과 종교가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통합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신라인이면서도 고구려와 백제 역사에 대해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최치원이 당나라 태사시중(太師侍中)에게 올린 편지에는 식민사관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들을 담고 있다.
@ 사후에 더 높은 평가 받아
“동해 밖에 삼국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한·변한·진한인데, 마한은 고구려요,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기에 강병이 100만 명이어서 남으로는 오·월을 침공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幽·燕·濟·魯) 등의 지역을 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으며, 수나라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은 저 요동 정벌로 말미암은 것입니다.”(<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중국의 근대 석학 곽말약이 편찬한 <중국사고지도집>(中國史稿地圖集)에 따르면 오·월은 중국 양자강 이남 지역을 뜻하고, 유·연은 북경 북쪽에서 만주 일대까지이며, 제·노는 산동성 일대이다. 고구려와 백제가 만주 일대는 물론 북경과 산동성 일대, 그리고 양자강 유역까지 뒤흔들었다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광무제(光武帝) 본기’는 “(광무제) 25년(서기 49) 춘정월, 요동 변방의 맥인(貊人)이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침략했는데, 요동 태수 제융(祭?)이 불러 항복시켰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맥인은 바로 고구려를 뜻한다.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에 따르면 북평은 현재 북경 서남쪽 하북성 만성(滿城)현 부근이고, 어양은 북경시 밀운(密云)현 부근, 상곡은 하북성 회래(懷來)현, 태원은 오늘의 산서성 성도인 태원시다. 고구려가 중원 깊숙한 곳까지 진출했다는 뜻이다. 중국 남조시대의 <송서>(宋書) ‘백제 열전’에는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 리에 있었다. 그 후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하자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점령하였다.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라고 전하고 있다. 요서군과 진평군은 학자들에 따라 현재의 북경과 천진 사이라고 추정되기도 하고 북경 북쪽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는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 대륙에 진출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지만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아무런 이유 없이 부정된 기록이기도 하다.
최치원은 진골 정치 체제에 도전했으나 6두품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좌절했던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다. 그가 신라 사회에 적용하고자 했던 유학정치 사상은 그의 당대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후 고려가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삼은 것은 최치원의 영향이 적지 않다. 그가 고려시대에 공자를 모시는 문묘에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제향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최치원은 당대의 현실정치에서는 실패했으나 그의 유학정치 사상은 이후 고려와 조선의 주류 정치사상으로 기능했다. 유학정치 사상은 조선 후기에는 수구적 사상으로 전락했지만 이때만 해도 그 어느 사상보다 진보적이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간 사람답게 사후에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조선의 서거정(徐居正)이 최치원의 <계원필경>(桂苑筆耕)을 “우리 동방의 시문집이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부득불 이 문집을 개산비조(開山鼻祖)로 삼으니 이는 동방 예원(藝苑)의 본시(本始)이다”라 칭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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