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백제 황금사리병, 사리장엄구 1천400년 만에 빛나다

道雨 2007. 10. 24. 14:17

 

 

 

              백제 황금사리병 1천400년 만에 빛나다

 




(부여=연합뉴스) 김승욱 기자 = 정확히 1천430년 전인 577년.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왕흥사터에서 황금 사리병이 발굴됐다.

백제시대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舍利藏嚴具. 사리를 담는 사리기를 비롯해 탑에 안장되는 각종 공양품을 일컫는 말)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의 발굴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발굴 당시 황금사리병은 은으로 만든 사리 외병에 봉안됐으며 은제사리병은 다시 청동사리함에 담긴 채로 출토됐다. 금.은.동 사리 사리장엄구 일체가 한꺼번에 발견된 셈이다.

특히 청동 사리함(높이 10.3㎝)의 몸체에는 다음과 같이 5자6행의 명문 29자가 새겨졌다.

'정유년이월(丁酉年二月)/십오일백제(十五日百濟)/왕창위망왕(王昌爲亡王)/자위찰본사(子爲刹本舍)/리이매장시(利李枚葬時)/신화위삼(神化爲三)'

'정유년 2월15일 백제왕 창(=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고 해석된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 기록에 근거해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된 것으로 알려졌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태자 이외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가 능산리사(567년 축조)보다 10년 늦게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짐에 따라 6세기 중반 백제 사찰 축조양식의 변화를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부여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금.은.동 사리장엄구의 발견은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 발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발굴성과"라고 평가했다.

지진 등 자연재해를 막기 위해 묻은 진단구(眞壇具)에서는 목걸이 및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한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픔, 관모장식을 비롯해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년에서 사용한 상평오수전 등 다양한 유물이 확인됐다.

또 왕흥사터의 중심축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왕의 행차와 관련된 어도(御道)로 추정되는 시설이 확인됐다. 현재 확인된 규모는 남북길이 62m, 동서너비 13m로 사찰의 석축과 연결된 20m 가량은 경사졌으며 그 아래쪽부터는 평탄하게 조성됐다.

이밖에 동서방향의 석축부위에서 백제시대 평기와가 다량 출토됐다. 연화문수막새(蓮華紋圓瓦堂), 연목와(椽木瓦) 등이 다수 출토됐으며 소조 광배(光背)로 보이는 토제품 2점도 함께 발견됐다.

kind3@yna.co.kr
 

 

 

                                  석제뚜껑 개봉 후 사리함 노출 상태


(서울=연합뉴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4일 충남 부여 왕흥사터의 발굴현장에서 황금사리병 등 출토유물 일체를 공개했다. 사진은 석제뚜껑 개봉 후 사리함 노출 상태. << 문화재청 제공 >>/2007-10-24 11:16:19/

 

 

 

 

 

                      백제 사리기 최초로 발굴


전성기 백제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금·은·동 사리기(舍利器·사리함, 사리병 등 세트)가 최초로 발굴됐다. 이는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이래 최대의 발굴 성과로 학계는 보고 있다.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부여 왕흥사지 발굴 현장에서 기자설명회를 열고, 왕흥사 목탑지에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엄구와를 발굴했다고 밝혔다. 또 백제 창왕(위덕왕) 당시의 왕흥사 조성기를 밝혀주는 명문도 나왔다고 밝혔다.

사리함에서는 왕흥사 창건(577년)과 관련된 명문기록 및 사리기의 봉안수법, 목탑 심초부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이 확인됐다. 또 사리구를 포함, 백제시대 귀금속 및 장신구 등 다량의 진단구(眞壇具·건물을 세울 때 재난을 피하려 땅에 묻는 그릇 따위)가 출토돼 당시 공예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부여문화재연구소측은 설명했다.

사리함(높이10.3㎝)은 장방형 심초석(心礎石·건물의 중심기둥을 받치는 돌, 가로 100㎝ 세로 110㎝) 남쪽 끝단에 가로 16㎝ 세로 12㎝ 높이 16㎝의 크기로 마련된 사리공 내부에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 뚜껑에 덮여 봉안돼 있었다. 재질은 청동으로 원통형 동체에 보주형 손잡이가 부착된 볼록한 뚜껑을 덮었다. 함 내부에는 다시 은제사리병(외병)을 봉안하였고 이 은제 사리병 안에는 다시 금제사리병(내병)이 봉안돼 있었다. 실제 사리는 별도로 확인되지 않았다.

명문은 사리함 동체부에 5자6행의 음각체로 ‘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本舍/利二枚葬時/神化爲三(정유년 2월 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에 600년(법왕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됐다고 기록돼 있는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것과 위덕왕이 597년(위덕왕 44년)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아좌(阿佐) 태자 이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다는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 확인됐다.

부여문화재연구소는 “명문 및 사리구의 구성내용을 통해서 절의 축조가 같은 위덕왕 대에 만들어진 능산리사지(567년)보다 10년 뒤에 조성됐다는 연대가 밝혀졌다”며 “이로써 백제사 편년과 동시기 고고학적 자료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했을 뿐만 아니라 백제 위덕왕 대의 정치·사회·문화적 흐름을 연구하기 위한 새로운 단서를 확보하게 다”고 설명했다.

불교문화재 전문가인 민병찬 제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백제 사리함으로 풀세트가 나온 것은 처음이고 현재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진단구는 심초석 남쪽변을 중심으로 다량 출토됐다. 목걸이와 팔찌, 비녀, 금제귀고리 등 장신구로 사용했던 구슬류와 옥류, 금제품, 금동제품, 은제품, 관모장식 등을 비롯해 철도자, 운모로 만든 연꽃, 중국 남북조시대 북제(550~577년)에서 사용되었던 상평오수전 등 다량의 유물이 확인됐다. 이는 백제시대 장신구연구 및 귀금속 제작, 대외관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김영번기자 zerokim@munhwa.com

 

 

 

              1400여년 만에 빛 본 '백제의 예술'


국내 최고(最古)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사리와, 사리를 담은 각종 용기 등 장식품)가 나온 충남 부여의 백제 왕흥사 목탑터에서는 금제 장식품(위쪽)과 형형색색의 구슬들(아래쪽)이 함께 출토됐다. 크기는 1㎝ 내외지만 백제인의 예술혼을 한껏 느낄 수 있는 명품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발굴 결과 왕흥사는 서기 577년에 세워졌음이 새롭게 밝혀졌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는 24일, 출토된 구슬 8000여 점 등 발굴 유물 전체를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