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팔만대장경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것
나무를 통해 역사를 읽는 흥미로운 방법을 알져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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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교수는 목재조직학을 다루는 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그냥 나무의 조직이나 세포 형태를 연구하는 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나무 속에서 역사를 읽기도 하는 특이한 존재다.
그는 이 책 이전에 펴낸 <궁궐의 우리나무 > , <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 , < 나무, 살아서 천 년을 말하다 > 등을 통해 우리에게 나무를 통해 역사를 읽는 흥미로운 방법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책 <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 > 은 '나무, 석가모니와 만나다', '자작나무 제작설의 진실 혹은 거짓', '다시 새기는 팔만대장경', '경판의 탄생지를 둘러싼 미스터리', '처음 모습 그대로, 750년 경판 보존의 비밀', '옛 사람들의 완벽한 경판 관리 노하우?', '8만 1,258장의 생존 기록' 등 모두 8장으로 이뤄져 있다.
저자는 매우 친절하게도 대장경판의 탄생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궁금증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간다. 책에 실린 중요한 내용을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팔만대장경에 대한 궁금증 몇 가지
①팔만대장경판은 이름 그대로 팔만 개일까?
팔만대장경이라는 이름 속엔 이미 양적인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은 정확히 팔만 개가 아니라 8만1258개이다.
②옛 문헌에 나오는 기록대로 팔만대장경판은 정말 자작나무로 만들어졌을까?
'자작나무는 백두산 원시림을 비롯한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 중국의 북동부, 사할린에서 시베리아에 걸쳐 자란다. 추운 곳을 좋아하는 한대 수종이기 때문이다. 만약 자작나무를 베어다 경판을 만들었다고 가정한다면, 생각해볼 수 있는 지역은 북한 내륙의 고산 지방이다. 나무를 벌채하여 압록강이나 대동강에 뗏목을 띄워 황해로 내려와 강화도로 가져와야 한다. 대장경판을 새길 당시 수도 개성을 비롯한 육지는 몽고군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이런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79 쪽)
저자가 목재조직학 연구 방법에 따라 팔만대장경 약 250여 점을 표본으로 삼아 현미경으로 나무의 세포 모양과 배역을 살펴본 결과 경판의 재질이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거제수나무가 88퍼센트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통설에서 말하는 자작나무는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③760년 전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어떻게 아직까지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은 채 남아 있을까?
지금으로부터 760년 전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지금껏 남아있다는 것이 경이로울 정도로 한반도는 지속적으로 전쟁에 시달려 왔었고,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도 수많은 화재에 시달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는 데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해인사에 있던 빨치산을 공격하는데 폭탄을 쓰지 않고 기관총으로만 공격함으로써 대장경의 파괴를 막은 폭격기 편대장 김영환 대령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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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대장경판 글자 수가 전부 5천2백여 만 자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기에 달라붙어서 수고해야 했을까?
요즈음 서각(書刻) 장인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한 사람이 하루에 새길 수 있는 글자 수는 적게는 30자 많게는 50자 정도라고 한다. 경판 당 글자 수는 644자다. 경판 한 장을 새기는 데 13일에서 21일이 필요한 셈이다.
또 전체 대장경판 글자 수 5천2백여 만 자를 하루에 새길 수 있는 글자 수를 평균 40자로 나누면 판각에 동원된 장인의 연인원이 나온다. 약 131만여 명이라는 계산이다.
⑤경판은 과연 강화도에서 만들어져 해인사로 옮겨졌을까?
통설에 따르면 경판은 강화도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태조실록과 정조실록의 기록대로 태조 7년 5월12일에서 정조원년 정월 11일까지 9개월에 걸쳐 대장경판이 강화도 선원사에서 합천 해인사로 옮겨왔다는 건 사실일까? 현실적 여건을 감안하면 그 많은 양의 경판을 옮긴다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저자는 여기서 상상의 힘을 발휘한다.
'지금까지 팔만대장경판은 강화도에서 만들어져 해인사로 옮겨온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말은 사실일까? 먼저 경판을 새길 나무를 어떻게 조달하느냐가 문제로 떠오른다. 좁디좁은 강화도로 고려의 수도가 옮겨갔으니 수많은 사람들이 밥 해먹고 불 지펴서 추위를 피할 에너지가 필요하다. 산의 나무는 대부분 잘려 나갔을 것이다. 재질이 좋아 새김에 쓸 나무가 모두 없어져버렸을 테니 강화도 자체 조달은 불가능하다. 강화도에서 경판을 새겼다면 그 엄청난 양의 나무를 배에 실어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고려군과 몽고군이 대치하는 전쟁 상태에서, 더욱이 간만의 차가 커서 썰물 때면 십 리도 넘게 갯벌이 노출되는 강화도의 해변에 배를 대고 무거운 통나무를 운반했을까?'(153쪽)
거기에 저자는 경판의 재료인 나무들이 자라는 장소와 함께 그 많은 양의 경판을 옮기는 일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덧붙인다. 결국 경판의 제작지는 고려 무인정권의 실력자 최우의 식읍지였던 진주를 비롯하여, 해인사와 가까이에 있는 지역이 아닐까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와 관련지어 몇 년 전, 경남 남해에 놀러 갔을 때의 일화 한 가지가 있다. 남해 역사박물관장 등과 함께 팔만대장경 제작지일 가능성이 있는 고현면 발굴 현장에 동행한 적이 있다. 결국 그 발굴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박상진 교수의 견해가 아주 개연성이 높다는 반증일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위대성을 기억하기 위하여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5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해인사 장경판고를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렸다.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대장경판일진대, 건물만 등재하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다행히 원문에는 '경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고'라고 돼 있다니 경판도 거기 포함돼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팔만대장경이 위대한 것은 일본이 우리나라에 대장경 인쇄본을 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 조선왕조실록 > 에 실려 있는 것만 효종 때까지 80여 회라고 한다.
'대장경 인쇄본을 달라는 방법도 갖가지였다. 사신을 통해 일본 국왕 이름으로, 때로는 지방 호족들까지 대장경 인쇄본을 요구하여 조선은 항상 그 처리에 고심했다. 더 이상 불교를 숭상하지 않으므로 대장경을 인쇄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행패를 부릴까 두려워 때에 따라 대장경 인쇄본을 주기도 하면서 그들을 달랬다. 시달림의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태종·세종 때는 인쇄본이 아니라 아예 대장경판을 주자는 논의까지 있었다. 또한 대장경 인쇄본을 얻으려는 수차례의 요구가 좌절되자, 일본은 사신이 단식투쟁을 하거나 군사를 동원하여 대장경을 탈취할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20쪽)
이렇게 온 세계가 인정해 주는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의 위대성을 정작 그 주인인 우리만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해인사에 찾아간다면 팔만대장경의 비밀이 그대로 환히 눈에 들어올 것이다. 마침 오늘은 식목일이다. 나무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가슴에 심는 일도 나무 심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아닐까.
겨우 살창 틈으로나 장경각을 들여다볼 수 있을 뿐인데 가면 뭐하냐고요? 그런 분은 해인사 입구 성보박물관에 들리시면 된다. 아주 가까이에서 대장경 경판을 볼 수 있다. 물론 노터치다. 만진다고 해서 경판이 성희롱이라고 고발하지야 않겠지만, 그게 문화재를 대하는 예의니까.
********************************<오마이뉴스 /안병기 기자 20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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