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재

[스크랩] 인류역사와 함께한 다리

道雨 2009. 4. 13. 16:19

 

인류역사와 함께한 다리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길이 생기고 또한 다리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렇듯 다리는 인류역사와 함께 하였다. 인류 최초의 다리는 언제, 어떠한 형태였을까? 예전에는 고기잡이나 농사에 편리한 강이나 바닷가에 모여 살았다. 이렇게 모여 살다 보면 습지 등 생활에 불편한 장애물이 있게 마련이다. 자주 다니는 곳은 길이 되고, 길 가운데 발이 빠지는 늪이나 소하천 등지에는 통나무를 걸치거나 돌을 띄엄띄엄 놓아 빠지지 않게 다닐 수 있도록 한 징검다리가 원시적인 다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다리는 신라 실성왕實聖王조에 “십이년十二年 추팔월秋八月 신신성成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라 하여 다리이름과 규모를 밝히고 있는데, 이때가 AD 413년이다. 이 당시 평양주平壤州는 현재의 양주楊州 지역으로 추정해보나 확실치는 않다.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다리는 없다. 그러나 앞서 발전한 고구려는 물론, 백제는 선진문물을 일본에 전하였는데 다리축조기술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백제의 다리기술자 노자공路子公이 일본에 건너가 현재 일본의 삼대기물三大奇物의 하나인 ‘오교吳橋’를 만들었다는 기록(AD 620)이 있는데, 이는 당시 백제인의 다리축조기술수준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이미 상당한 수준의 다리가 축조되어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존 최고最古의 다리는 통일신라(8세기) 때의 다리인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그리고 안양문에 이르는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이 다리들은 돌계단을 받치기 위한 다리인데 청운교와 백운교는 33계단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삼십삼천三十三天을 상징하는 의미 있는 다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리는 그 구조와 조형미가 놀라울 정도로 고도의 기술수준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멋과 다양한 형식의 옛 다리


옛 다리의 축조에 사용되는 재료는 한정적이었다. 돌과 나무가 주 재료였고 부분적으로 흙, 잔디, 철물 등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적인 재료로도 오늘날의 각종 형태의 다리형식이 모두 보인다. 예를 들면 구름다리[虹橋], 널다리[桁橋], 매단다리[懸垂橋] 등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형식뿐 아니라, 누다리[樓橋], 배다리[舟橋 또는 船橋], 잔교棧橋, 흙다리[土橋], 섶다리 등 오늘날 보이지 않는 다양한 형태의 다리가 이용되었다.

 


흙다리[土橋]


예나 지금이나 다리 가설의 책임은 국가였으나, 실제로는 다리 가설이 여의치 못하여 임시방편으로 주민 스스로 설치한 다리가 주로 흙다리였다. 흙다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흙으로 축조한 다리는 아니다. 다리발은 나무이고, 통행의 편의를 고려하여 다리바닥에 뗏장이나 나뭇가지를 얹어 상판에 걸친 나무 사이로 발이 빠지지 않도록 한 다리를 말한다. 이러한 다리는 재료로 보면 토土·석교石橋라 해야 할 것이나 다리주체는 다리바닥이므로 흙다리[土橋]라 부른다. 개천 가운데 나무말뚝을 박고, 시렁재로 가로 걸쳐 보로 삼고 그 위에 통나무를 붙여 깔았다. 바닥이 고르지 못한 까닭에 뗏장을 덮어 다니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다리는 매년 홍수 등으로 인하여 다시 놓게 되니, 우리 조상 모두가 다리가교의 기술자였다.

 

 

나무다리[木橋]


나무다리는 돌다리의 돌보다 재료의 내구성이 낮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 나무는 다른 재료보다 구하기가 손쉬웠고, 가설하기에도 쉬운 장점이 있었다. 나무는 휨에 강하기 때문에 다리 지간支間을 넓게 할 수 있었다. 또한, 나무는 가공이 손쉬워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나무다리는 재료의 특성상 널다리[桁橋] 형식밖에 없다. 압축에 약한 나무로는 구름다리[虹橋]를 틀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현先賢들의 시화詩畵에 애용되었던 간단한 외나무다리를 비롯하여 그 외에도 회랑廻廊과 같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형식이 있는가 하면, 나무다리 위에 누각樓閣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돌다리[石橋]


남아 있는 대부분의 다리는 돌다리이다. 선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다리가 돌다리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돌다리는 예부터 각종 형태로 발전했다. 징검다리나 석재 한 장을 걸쳐 놓은 간단한 널다리에서부터 조선시대 가장 긴 살곶이다리[箭串橋]와 가장 폭이 넓었던 광통교廣通橋, 아름다운 반원형의 창경궁 옥천교玉川橋, 선암사仙岩寺 승선교昇仙橋와 같은 아름다운 홍교虹橋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와 형식이 다양한 형태로 남아 전해진다. 석재가 풍부한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돌다리의 가설 여건이 좋았다. 돌다리는 공력功力이 많이 들긴 하였지만 반영구적이어서, 돌다리 놓기를 선호했다. 돌다리는 폭과 길이도 다양하여, 교각橋脚을 여러 개 세우기도 하고 다리 폭도 한 사람만 겨우 다니던 규모에서 임금의 행차가 가능할 수 있게 폭 넓은 다리를 마련하기도 하고, 신분에 따라 통행이 구분되는 삼도구분三道區分의 다리도 마련하였다.  

 


전설과 민속의 보고寶庫

 

 
옛 다리에는 다양한 전설傳說과 민속民俗이 깃들여있다. 견우와 직녀의 사랑에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은 오작교烏鵲橋를 등장시켜 서로 만날 수 있게 해 주었고, 다리 굿을 통하여 이승과 저승을 잇는 상징적인 의미의 다리를 놓아주어 죽은 자의 영혼이 극락세계에 이르도록 빌기도 하였다. 또한, 답교놀이와 안동安東 지방의 놋다리밟기 등의 놀이가 전해지고 있다. 답교踏橋놀이는 매년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야간에 주로 행해졌는데, 놀이의 참가자는 재상宰相으로부터 여염집의 아녀자兒女子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기록(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다리[橋]라는 말은 사람의 다리[脚]와 그 음音이 같이 해석되는 속설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와 같이 다리를 밟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다리 병이 없다고 했다. 도성에서의 답교놀이의 중심지는 오늘날 청계천의 광통교, 수표교 등지가 대표적이며, 이곳에서는 단순히 답교놀이만 한 것이 아니라 퉁소[簫]와 북[鼓]까지 울리면서 매우 성대했었다고 한다.

 

 

정과 사랑이 깃든 기념물記念物


이와 같이 옛 다리는 오늘날 콘크리트 다리가 지니는 단순한 교통소통이라는 기능을 뛰어넘어, 조상이 통행수단으로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생활문화로 흡수했다. 그래서 다리는 지역 일대의 중요한 기념물記念物이 되었고, 다리를 사이에 두고 이웃동네와 교류하며 화합을 다졌다. 답교놀이를 통하여 한해의 건강을 기원하고, 다리에 돌짐승·이무기 돌·도깨비상 등 각종 벽사시설을 설치하여 각종 재앙을 막고자 하는 주민의 소망을 표현하였다. 또한, 다리는 신명나는 놀이가 펼쳐지는 무대였고, 어릴 적 다리에서 놀던 동심童心이 어려 있고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순수하게 키워가던 사랑이 배어있는 곳으로, 옛 다리에는 사랑과 정, 약속 등 사람들의 정감 어린 삶과 추억이 담겨있다.

 

손영식 _ 명지대학교 객원교수 / 문화재청 전문위원

출처 : 문화재청
글쓴이 : 문화재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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