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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첨성대의 구조와 내부 모습

道雨 2010. 12. 16. 15:40

첨성대의 구조와 내부 모습

 

 

 

 

경주시 인왕동(속명-비두골)에 있는 첨성대는 국보 31호다.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이며 건축 후 한번도 무너지지 않은 위대한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해시계 구실을 했다는 '규표설'에다 불교의 우주관을 나타내는 수미산을 본뜬 제단이라는 설을 줄기차게 받고 있는 건축물이기도 하다.

또 기단이 정사각형이고 몸체가 원으로 돼 있어 이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쌓은 돌의 개수를 세 보면 360여개로 1년의 날수를 상징하며 12단은 12개월, 12단(위)+12단(아래)=24단은 24절기, 12단+12단+3단(입구)=27단은 신라 27대 선덕여왕을 뜻한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축조의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여러가지 설이 제기되는 가운데 1970년 이후, 상당히 과학적으로 해석하고 접근하려는 시도가 학계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내부의 구조들이 과학적인 기계에 의하여 파악되고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신라역사과학과의 자료에 따르면

 

 첨성대의 구조
 

  전체가 기단부(基壇部), 원주부(圓柱部), 정자형두부(井字形頭部)의 3부분으로 되어있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석(花崗石)으로 총 석재수는 365개 내외이며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

  정자형 두부는 모두 다듬어져있다.

  원주부의 내벽은 다듬어져 있지 않으나 마찰(摩 擦)로 약간 마모(磨耗)된 흔적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1. 기단부는 4각형 상하(上下) 2단
     ① 상단(上段) - 1변이 5.18m, 높이 39.5cm, 석재수(石材數) 12개
     ② 하단(下段) - 1변이 5.36m, 높이 39.5cm, 석재수 8개
     ③ 방향 - 남변(南邊)이 정남(正南)에서 동쪽으로 19° 

   2. 원주부는 총 27단으로 높이는 8.05m의 술병형
     ① 최하단의 둘레 16.0m, 제14단의 둘레 11.7m, 최상단의 둘레 9.2m
     ② 13단에서 27단까지의 속이 비어서 사다리 2개를 중간의 장대석에 걸쳐서 상하로 오르내릴수 있

        게 되어있다.  27단을 지나서 정자형 두부로 올라가면 목판으로 서반부 개구를 덮어서 하부와

        차단할 수 있는 구조이다.

   3. 정자형 두부는 상하 2단의 정(井)자형 구조
     ① 각단이 각각 306×32×32cm의 크기의 장대석 4개씩으로 정자형으로 이뤄졌다.
     ② 정자석 내부는 220×220×64cm의 공간을 이루고 하부는 목판을 깔았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 서반부는 개폐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부구조의 모습은 어떠할까?

 

위의 구조도에서 1번 부분, 밖에서 사다리로 오르면 출입구 부분이다

출입문(12단)까지는 자갈과 흙으로 채워져 있으며 윗부분은 자갈로 덮혀 있는 모습이다

 

 

 

 

다음은 3번 부분, 즉 원주부분의 내벽 모습이다

다듬어져 있지 않다고 알려져 왔으나 크기가 일정하고 거친 면이 적은 것을 보아 약간은 다듬었음을 알 수 있다

 

 

 

 

쌓은 돌 틈 사이로 쐐기처럼 박은 작은 자갈들도 많이 보인다

 

 

 

첨성대 내부에서 하늘쪽을 향해 쳐다본 모습이다

가운데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장개석이 걸쳐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진에서 2번 부분, 즉 내부 사다리를 걸치기 위해 가로로 가로질러놓은 장대석이다

 

 

 

 

가로로 걸쳐놓은 장대석이 외부까지 뻗혀 있다

 

 

 

사진의 4번, 정자형 두부의 내부 모습이다 

첨성대의 맨 윗부분 우물정(정)자 모양의 두부로서 2단으로 노여 있다

 

 

 

두부 안쪽에 사람이 활동할 수 있도록 긴 장대석이 놓여 있다

사다리를 통하여 왼쪽 빈 공간으로 올라온 후 나무 판자를 덮고  그 위에서 관측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징한다

 

 

 

항아리처럼 생긴 몸통의 가장 윗단 돌이 놓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밖에서 본 정자형 두부의 모습이다

 

 

 

 

첨성대의 용도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를 살펴보면

 

▶ 일본인 와다(和田) - 일제강점기에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渾天儀)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

 

홍이섭(洪以燮)도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

 

홍사준(洪思俊) - 처음으로 첨성대 실측

    "첨성대 내부에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며

    개천설(蓋天說)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

 

전상운(全相運)

    "개방식 돔으로 관측하기에 불편한 내부구조를 근거로 상설 천문대로 보기 어려우며 백제인들이

    주비(周髀)의 법에 따라 세웠을 것"

 

김용운(金容雲)

    "첨성대가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이 아니며, 다만 수학 및 천문학에 관한 당대의 권위서였던

  〈주비산경 周髀算經〉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축조한 상징적인 탑"

 

이용범(李龍範)

    "첨성대는 천문관측과는 관련이 없으며, 다만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須彌山)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

 

박성래(朴星來)

    "첨성대를 넓은 의미의 천문대로 평가하면서도 겉 모양은 불교의 수미산을 좇았으며,

    토속신앙에 따른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

 

이와 같이 첨성대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구조적으로 볼 때 소박한 의미의 천문관측대라는 의견이 주류이다.

 

 

첨성대는 어떻게 쌓았을까?

 

 

 

 1.5m의 깊이로 땅을 파고 흙을 다진 뒤 큰 돌을 채워 넣고

사이사이로 작은 돌을 채워 넣는다

 

 

 

 

다진 기초 위에 기단석을 2단으로 올린다

 

 

 

 

 

 

 

 

 

기단석 위에 돌을 쌓으면서 내부와 외부에 같은 높이로 흙을 쌓아 올린다

비스듬히 쌓은 외부의 흙더미 위로 돌을 끌어 올린다

 

 

 

 

입구가 있는 부분까지 내부와 외부의 흙을 제거한다

 

 

 

 

마지막 내부의 흙은 그대로 둔 채 외부의 흙만 제거한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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