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문화재청에서 발간되는 [ 문화재 사랑 ]에서 옮겨온 것입니다.
투박스러워 오히려 정이 가는 목어
불전사물 중에서 만들기가 가장 쉬운 것이 아마 목어일 것이다. 범종과 같은 경우에는 제작 방법이 까다로워 몇몇 장인들만이 만들 수 있었다. 그에 비하여 목어는 길쭉한 나무를 잘라, 겉은 물고기 모양으로 다듬고 속은 파내면 되니 어지간한 목수라면 누구나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범종은 비슷한 시대에 만든 것이라면 그 모양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만 목어는 절마다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사찰을 탐방하다보면 절 안에 무수한 문화재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어도 각양각색의 색다른 목어를 보는 재미에는 견줄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절은 제법 살이 오른 통통한 물고기가 걸려 있고 어떤 절은 바싹 마른 물고기가 걸려있다. 이빨을 드러낸 험상궂은 것이 있는가 하면, 립스틱을 바른 것처럼 빨간 입술에 화려한 몸단장을 한 목어도 볼 수 있다.
다양한 목어들의 면면面面을 살펴보면
사찰에 걸려 있는 목어의 모양은 한마디로 물고기, 그중에서도 잉어를 닮았는데 이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몸 전체가 모두 잉어를 닮은 것과, 용의 머리에 잉어의 몸통을 하고 있는 것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잉어의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는 대구 동화사나 순천 송광사 목어, 양산 통도사의 목어가 대표적인데 그 모양도 이빨을 가지런히 새긴 것,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 등 여러 형태이다.
용두어신龍頭魚身 즉 용의 머리에다 물고기 몸통을 한 목어는 더 많이 볼 수 있다. 머리가 모두 용의 형상을 하고 있다지만, 경주 불국사의 목어는 물고기 얼굴에다 용의 뿔인 사슴뿔을 달고 있다. 포항 오어사의 목어는 이무기를 닮아 생긴 모습은 흉측스러우나 입에 물고 있어야 할 귀한 여의주를 콧잔등에 올려놓은 것이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양주 보광사의 목어는 며칠을 굶었는지 잔뜩 허기진 모습에 입은 어찌나 크게 벌렸는지 입에 문 여의주가 곧 떨어질 것 같다. 반면에 진주 청곡사의 목어는 금방 무엇을 잡아먹었는지 볼록한 뱃집에다 콧수염을 휘날린다. 이 청곡사 목어는 다른 목어에 볼 수 없는 특징이 또 하나 있는데 몸통에 발톱이 달린 용의 다리를 달고 무엇을 움켜잡으려는지 열심히 허공을 젓고 있다.
비록 투박스럽게 만들었으나 그 모양이 다양하여 우리들에게 관심을 끄는 이들 목어는 그 관심만큼이나 많은 설화를 품고 있다. 이야기에 나오는 목어는 지금의 목어와는 그 용도가 다르다.
목어에 얽힌 이야기 하나
지금 절에 있는 목어는 아무리 오래 된 것이라도 조선시대 중기에 만든 것이며 대부분 조선 후기 또는 근래에 만든 것이다. 절에서 언제부터 목어를 매달아 두고 사용하였는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그 유래를 찾다보니 저 멀리 중국 당나라 때 승려인 백장선사가 기록한 『백장청규百丈淸規』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선사가 남긴 『백장청규』는 사원 생활에서 지켜야 할 생활 규칙과 승려로서의 계율을 기록한 규약집이다. 이 규약집에서 목어에 대한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당시 이 절에서는 목어를 식당 한켠에 매달아놓고 공양이나 식사 시각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목어를 신호용으로 사용한 경우라 하겠다.
목어에 얽힌 이야기 둘
이번에는 목어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제례용으로 만든 유래이다. 중국에서는 후한 이후로 구마라습과 같은 외국 승려들이 중국으로 건너와서 자신이 가져온 경전을 한역漢譯하여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러다보니 언어가 다른 인도의 각 지역에서 온 불경인데 오역誤譯까지 많아 경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 당나라 때 현장은 직접 불경을 구하러 천축국天竺國이라 불리는 인도까지 다녀왔다. 그 후 그는 『대당서역기』라는 기행문을 남겼는데 흥미진진한 이 기행문은 『서유기』의 모태가 되었다. 손오공과 사오정, 그리고 저팔계가 보호하는 삼장법사가 바로 현장법사이다. 유명한 현장법사에게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전해 내려오는데 그중에서 현장법사의 지귀곡指歸曲에 전하는 목어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법사가 천축국 여러 곳의 순례를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도중 어느 한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마침 이 집에는 얼마 전 새로 맞이한 아내가 남편이 사냥을 떠난 틈을 타 전처소생의 갓난아기를 강물에 던져버렸는데, 집에 돌아온 남편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죽은 아들을 극락으로 인도할 천도재薦度齋를 올리려던 참이었다. 이 때 마침 귀한 법사를 만난 주인은 온갖 음식으로 대접하려 하였지만 현장은 사양하고 대신 물고기가 먹고 싶다며 강에 가서 큰 물고기를 잡아오라고 부탁하였다. 주인이 잡아온 물고기의 배를 가르자 그 속에서 잃어버린 아들이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그 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한다. 주인은 자신을 희생하고 아들을 살려준 이 물고기의 은혜를 갚을 방도를 물으니, “나무로 물고기 모양을 만들어 달아 두고 재를 올릴 때마다 이것을 두드리시오.”라고 일러주었다. 그 주인은 현장이 일러주는 대로 하였는데 그것이 목어의 유래라고 한다.
목어에 얽힌 이야기 셋
잘못된 행동을 깨우치는 경각심 때문에 목어가 만들어진 경우도 있었다. 어느 한 승려에게 몇 명의 제자가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모두 스님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유독 한 제자는 말썽만 일으켰다. 이렇게 지독히 말을 듣지 않은 그 제자는 공교롭게도 일찍 세상을 뜨고, 그 업보로 인해 등에 나무가 심어진 물고기로 태어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파도가 칠 때마다 나무가 흔들려 피를 흘리는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다. 마침 스승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이것을 목격하게 되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고 한다. 수륙재란 이름 그대로 바다와 육지에 떠도는 영혼들을 달래는 제례로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불교 행사이다. 그 제자는 이후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른 사람에게도 경각심을 주기 위해 등에 있는 나무를 뽑아다 물고기 모양으로 다듬어 사람들이 틈날 때마다 두드리게 하였다고 한다
목어에 얽힌 이야기 넷
마지막으로 목어를 교훈용으로 만든 예도 있다. 우리가 소나무나 대나무가 추운 겨울에도 언제나 푸르름을 잃지 않은 것을 보고 교훈을 얻는 것처럼 물고기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 물고기는 밤에도 눈을 감지 않는다고 한다. 하기야 물고기에게는 눈꺼풀이 없으니 우리처럼 눈을 감을 수 없다. 옛날 스님들은 제자들에게, 밤에도 눈을 감지 않고 지내는 물고기처럼 불철주야 불도에 정진할 것을 주문하여 목어를 만들어 걸어 두었다 한다. 목어가 물고 있는 붉은 구슬은 여의주如意珠라고 하는 상상의 구슬로서 어떤 소원도 다 들어준다고 한다. 사찰을 탐방할 때 혹시 인정스러운 목어를 보면 평소 가슴에 담아 두었던 소원 한 자락 꺼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글•사진•박종두 대구송일초등학교 교장, 『절 그 속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우리 문화재들』(2011, 생각나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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