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선거를 다시 하겠으며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1960년 4월 26일 독재자 이승만이 발표한 하야 성명 일부입니다. 그는 다음 날 대한민국 4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사흘 후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살아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박정희 정권은 그가 1965년 7월 19일 숨지자 국립묘지에 안장함).
그런 이승만은 아직도 수구세력에게 '건국 대통령' 또는 '국부'로 추앙받고, 심지어 유영익 국사편찬위원장은 "세종과 맞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12년 동안 머물렀던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유는 40일 전에 치러진 4대 정부통령 선거 때문입니다.
'일찌기 없던 공포분위기'… 3·15 부정선거
그해 3월 15일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일찌기 없던 공포분위기>였습니다.
선거일이 15일이었는데도 '투표'는 이미 14일부터 시작됐습니다. 대한민국 땅덩어리가 넓어 시차가 12시간 이상 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자유당 정권은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이기붕 이름이 기표된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었습니다. 선거일인 15일에는 투표용지 20장을 넣거나 자유당 당원들은 기표소까지 들어가 감시했습니다.
기표소까지 따라 들어와 '감시'했으니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가 헛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투표자수보다 이승만과 이기붕 득표수가 더 많았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독재자 이승만이 민주공화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독재자 박정희도 '부정선거'를 저질렀습니다. 전두환도 이승만과 박정희보다는 못했지만, 군인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시도했습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로 규정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물론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은 대통령 선거가 '부정선거'이기 때문에 탄핵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열린우리당을 지지한 발언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년 내내 '부정선거' 의혹에서 단 하루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부정선거, 불공정선거로 치러진 대선에 불복하는 것이 민주주의 실현"
장하나 민주당 의원이 지난 8일 개인 성명을 통해 한 발언입니다. 그는 이어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가 총과 탱크를 앞세운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다면,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를 동원한 사이버 쿠데타로 바뀌었다는 것만 다를 뿐"이라며 "다가오는 6월 4일 지방선거와 같이 대통령 보궐선거를 치르게 하는 것이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내년 지방선거 때 보궐선거를 주장했습니다.
박근혜, 1987년 이후 처음으로 '부정선거' 비판받아
'부정선거', '대통령 퇴진'은 지난 1년 동안 익숙한 단어이지만, 현직 국회의원 입을 통해 나온 것은 처음이라 파장은 컸습니다. 당연히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대선불복이냐"로 반박합니다. 이미 박근혜 대통령도 "난 국정원에 도움 받지 않았다"고 말했고, 야당 대표를 앞에 두고 "내가 댓글로 당선됐느냐"고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지난 대선이 "공정선거"였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유는 이미 검찰이 시간이 부족해 121만 건만 공소장에 기록했을 뿐, 국정원 직원들이 2200만 건을 트윗 또는 리트윗 한 것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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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선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책보세 |
민주선거가 정당성을 갖는 이유는 '공정성'입니다. 공정성은 국가기관이 개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는 국정원과 군사이버사령부가 SNS를 통해 개입한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국가보훈처도 동영상을 제작해 박근혜 후보는 긍정적으로, 문재인 후보는 부정적으로 홍보했습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18대 대통령선거는 '공정선거'가 아니라 부정선거입니다.
그런데 부정선거라는 말만 꺼내도 "대선불복"이라며 "유권자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매도합니다.
이제 당당하게 말할 때가 됐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부정선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책보세)입니다.
책은 "18대 대선에서 국정원, 군사이버사령부, 국가보훈처가 여론을 조작하여 선거에 개입한 상황을 청와대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어 "더불어 우리는 공정한 투표권을 상실 당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진실을 마주보지 못하고 외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명백한 부정선거라고 해도 재선거를 요구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무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에 우리는 진정한 이 나라의 주권자임을 깨닫고 스스로 결단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박 대통령, 가장 깨끗한 선거로 당선됐다고 말하지 못하나"
저자는 "선거의 공정성이 확고하게 지켜지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부정선거지, 공정선거가 아니고 부정선거도 아닌 상황이란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내가 댓글로 당선됐느냐고 반박합니다. 새누리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댓글 몇 개가 당선에 영향을 끼쳤느냐고 따집니다.
하지만 댓글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치지 않아도, 국정원이 댓글을 단 자체가 공정성을 무너뜨렸습니다. 부정선거입니다.
책은 이렇게 묻습니다.
"왜 박근혜 대통령이 역사상 가장 깨끗한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말인가? 왜 기껏한다는 말이 불복하지 말라고 말도 끝도 없이 고함지르는 것 뿐이란 말인가? 18대 대선의 공명정대함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나 같은 불온세력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27쪽)
"대선불복이냐"는 시민과 야당을 급박하는 박근혜 정권은 지난 대선이 공정선거였는지 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불복하지 말라는 힐난은 부정선거 여부와 무관하게 그저 현재의 권력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부정선거 의혹을 둘러싼 사실 관계를 고의적으로 외면하는 기만적인 언사"라는 비판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부정선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는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는데 일부의 선거 부정이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주장은 무엇보다 18대 대선 당시 공정선거를 장담하고 약속했던 여당과 정부의 고위관계자를 모욕하는 발언이지만, 이 주장이 더 지독하게 모독하는 대상은 따로 있다"며, "예를 들어 그들의 말을 철석 같이 믿었던,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던 유권자들은 어떻게 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즉, 공정성을 훼손한 댓글 공작이야 말로 유권자 표를 모독했다는 비판입니다.
"관권을 동원한 명백한 선거부정이 벌어진 상황에서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변명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용납한다면 공정선거라는 개념은 마침내 무너지기 때문이다. 18대 대선의 선거 부정과 그 처리 과정 전체가 공정선거라는 개념이 이 땅에서 과연 성립할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중대한 사태인 이유다."
공정성을 잃어버린 지난 대선이 '부정선거'라면 중대한 사태입니다, 그럼 이제 "부정선거라 하더라도 승복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당연히 하야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면 된다"는 말입니까?
장하나 의원 같은 경우 후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부정선거라 하더라도 하야와 재선거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박근혜 대통령이 부정선거로 당선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부정선거라 하더라도 하야와 재선거는 안 된다"에 방점을 찍고 있는지 모른다고 묻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부정선거라는 확신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들의 겁박에 무력해진 나머지 그들이 오히려 시인할까 바 겁에 질려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겉으로는 '부정선거라며 당장 책임을 져야 한다'며 분개하고 있지만, 실은 하야라는 경우 만큼은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이다."(91쪽)
그러면서 "문제는 권력도, 보수언론도, 부정선거 가능성이 있는 18대 대선도 아니다. 문제는 괜한 갈등과 분란을 일으킨 우리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문제 앞에서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대선불복이냐"는 말 한마디로 지난 1년을 버틴 박근혜 정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부정선거라면 이 나라는 민주국가 아니라는 말에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부정선거라면 이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공정한 선거가 치러져도 민주주의 국가이고, 부정선거가 저질러져도 민주주의 국가라면,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 개념을 희화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부정선거가 일어났을 뿐 아니라, 그것이 은폐되기 까지 한 땅을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말하는 데 조금이라도 주저한다면, 이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이곳이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고통스러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100쪽)
문제는 지금 우리가 많이 무력해져 있다는 점입니다. "언론이 장악되고 민주주의가 훼손된 이 땅의 참혹한 현실을 견디며 우리가 지치고 무력해진 상태"입니다.
"부정선거가 확증된다고 하더라도 권력이 이를 순순히 시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또 권력의 그 후안무치한 태도에 자칫 저항이라도 한다면 무력한 우리들은 도리 없이 잔인하고 비열한 탄압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 없습니다. 이런 두려운 현실이 우리 앞에 있지만 나아가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투표권은 우리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공정선거를 통해 정당한 경쟁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는 유권자의 기대가 실현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기대권 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기 전에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이라면 당연히 감당해야 할 필연적 의무입니다."(본문에서)
부정선거 의혹 제기는 민주시민이 감당해야 할 의무
부정선거란 내게 주어진 한 표가 "내 의지를 실현할 기회를 근본적으로 강탈 당했음을 의미한다"면서 "간단히 말해 그것은 당신이 원하는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음에도 선거 부정으로 인해 그 가능성을 부당하게 탈취 당했다는 걸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는 당신이 박 후보를 찍지 않았다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야말로 부정선거의 직접적 피해 당사자일 수 있는 당신의 억울함을 표출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18대 대선이 부정선거라면, 논리적으로든 현실적으로든 하야와 재선거밖에는 다른 어떤 결론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237쪽)
이제 주권자인 우리는 스스로 결단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는 권력과 장악된 언론 때문에 무력감을 느끼지만, 무력감을 인정하고 '18대 대선은 부정선거인가?'라는 질문을 끝까지 지켜내야 합니다. 하야와 재선거가 누군가에게 요구하거나 부탁할 사안이 아닌 이 나라의 주권자인 우리 스스로 결단할 문제라고 <부정선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는 말합니다.
"18대 대선은 혹시 총체적 부정선거였던 것은 아닌가?
무력한 우리 모두가 권력을 향해 이 질문을 서슴없이 던질 때, 동시에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 이 질문의 당사자라고 함께 선언할 때, 그리하여 자신이 값진 투표권 한 장을 지키려는 우리의 절규가 마침내 정당한 것으로 판명 됐을 때, 우리는 무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무력했기 때문에 이 질문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2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