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불법 개입, 순응과 복종만 남은 사회의 결과”
남녀 수도자 시국미사 조현철 신부 강론 전문
(카톨릭뉴스 / 조현철 신부 / 2014-02-03)
답이야 뻔하지만, 새삼스레 질문을 해봅니다.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은 왜 불법임에도 조직적으로 대선에 개입했을까?”
즉시 떠오르는 답은 권력입니다.
권력의 꼭대기에는 실제로 권력을 움켜쥔, 또는 움켜쥐려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권력 획득에 필요한 것들을 기획, 지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가장 밑에는 이 지시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게 하나 있습니다. 가장 위나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가장 밑에 있는, 불법적인 대선 개입을 지시 받고 이를 직접 수행한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그런 지시도 자신들의 업무라고 생각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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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현철 신부는 이날 강론에서 특정하고 특수한 범죄가 아닌, 평범한 이들이 일상에서 저지르는 악행의 매커니즘을 지적하면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악이기에 더욱 절망적일 수 있지만, 이런 어둠의 시대에서 그리스도인, 특히 수도자들은 그 한가운데서 예수의 방법으로 빛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정현진 기자 |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학교 현실, 우리 학생들의 처지가 떠오릅니다.
초등학교부터 대부분 학생들의 목표는 대학교 진학으로 정해집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이른바 ‘스카이(SKY)’ 또는 최소한 ‘인 서울(in Seoul)’을 목표로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교에 들어온 후에는 취업, 특히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 취업이 목표가 됩니다.
“대학, 대학생, 대학 생활이 정말 이런 걸까? 이래도 되는 건가?”
가끔 이런 회의와 고민이 생겨도 거기에 오래 한눈을 팔아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다 잘못하면, 아예 사회에 진입조차 못하는 ‘루저(loser)’가 될 수 있습니다.
현실이 왜 이런지, 이게 정말 당연한 건지, 옳은 건지,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자기만 손해라는 겁니다. 주어진 현실을 재빨리 인정하고, 이 현실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고 능력을 키우는 것이 현명합니다. 현실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판적 의식은 결국 손해라는 생각이 많은 젊은이들을 지배합니다.
요행히 취업을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위에서 떨어지는 지시에 순응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처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판적 의식은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도리어 위험합니다.
이렇게 무비판적, 자발적 복종이 내재화된 인간이 양산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대학도 기업과 시장의 요구에 발맞춰 이른바 ‘실무형 인재’의 양성에 집중합니다. 문제의 신속한 해결 능력, 지시의 효율적 수행 능력이 그 핵심입니다.
사회적 비판의식을 지닌 지식인의 양성이라는 대학의 중요한 사회적 기여는 대학의 순위 평가에 도움이 될 때에만 겨우 대우를 받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경쟁이 지배하는 시장 구도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옆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 지쳐 쓰러져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질 때까지 앞만 보고 달리게 만드는 치열한 경쟁이 지배하는 사회,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이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알아서들 순응과 복종을 내면화합니다. 이 내면화 과정에 비판적 의식의 제거는 필수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또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대한문 앞 광장, 분향소를 차리고 자신들이 당한 부당함, 억울함을 호소하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다른 이름들도 떠오릅니다, 한진, 기륭, 재능, 콜트콜텍, 삼성, 유성, 용산, 밀양, 강정, 삼척.
여기저기서 소리 없이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국익이라는 한마디에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을 빼앗겨버리는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겨납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함께 좀 살자고 비명을 지릅니다.
소수이긴 하지만, 이들의 비명소리를 마음에 담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줍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버스로 서로를 찾아가 위로하고 연대하기도 합니다. 서로 힘이 되어줍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에 감동과 파문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비명과 사람들의 응답은 현실에 대한 자발적 순응과 복종이 내면화된 세상에서 그렇게 오래 가지 못합니다.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곧 일상으로 되돌아갑니다.
이제, 대선에 개입한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기관의 직원들이 조금은 더 잘 보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댓글과 트윗과 리트윗을 열심히 수행한 이들은 자신들을 평범한 공무원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자신이 소속된 조직의 사명에 나름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으로 자부했을지도 모릅니다. 지시를 효율적으로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자신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라는 생각이 내면화되었을 겁니다.
그 지시가 어떤 사회적 함의를 지니는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지는 것은 자신들의 일상적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심지어는 대선 개입을 지시한 기관의 책임자들도 그럴지 모릅니다.
이렇게 보면, 이들도 결국은 자발적 순응과 복종의 인간을 양산하는 우리 현실의 일부,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더 심각합니다. 올바르지 않은 것도, 불법도 지시로 주어지면, 자신의 일상업무로 별 거리낌 없이 처리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양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범법 행위, 불의한 행위, 비윤리적 행위도 조직 내에서는 ‘지시’란 명목으로 정당화되고 일상적으로 수행됩니다.
“요즘 둘째 놈 좀 어때? 학교 성적은? 좀 올랐다고? 다행이네. 오늘은 야근이라니까 그러네. 그래, 알았어. 내일은 일찍 들어갈게. 그래, 오랜만에 얘들이랑 외식이라도 하자고. 알았어, 끊어, 이제, 나 일해야 돼.”
영화 <변호인>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었지만, 사람을 고문하다가 잠시 쉴 때 집에 전화를 해서 자기 부인과 이런 일상적 대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는 수사관도 있었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했던 고(故) 김근태 선생의 말에 따르면, 가장 절망스러웠던 것은 그토록 끔찍한 고문을 자행하는 사람들의 평범함, 일상성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는 고문도 그저 일상사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고문을 자행하면서도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겁니다. 고문도 다른 업무와 마찬가지로 성실히 수행하면 그뿐입니다.
유태계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 불렀습니다.
수백만의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어떻게 보통 사람일 수가 있겠습니까?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필시 괴물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아이히만은 당시에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독일 사람 중의 하나였을 뿐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정권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고, 자신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유의 사람들이 보이는 공통적인 특징은 비판의식의 부재로 나타났습니다.
세상에 악이 창궐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악의 평범성 때문입니다. 세상의 악에 대한 책임 소재를 가리기가 힘든 것도 바로 악의 평범성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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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진 기자 |
이탈리아 문학가 쁘리모 레비(Primo Levi)를 자살로 몰아간 것도 바로 악의 평범성 때문일 겁니다.
레비는 1943년 말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에서 수감생활을 했지만, 결국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70이 되어가는 때에 자살로 삶을 마감합니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때, 레비가 탄 화물칸의 45명 중 4명만이 살아서 수용소로 들어갔고, 레비는 그 4명 중의 한 명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수감자의 평균 생존 기간은 3개월, 레비는 무려 11개월을 살아남았고, 결국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참혹한 시기를 이겨낸 사람이, 왜 노년에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마감했을까? 어디선가 레비가 한 다음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잘못된 현실을 깨닫지 못하게, 비판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현실, 그리고 잘못된 현실에 아무 생각 없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수많은 사람들!
아마도 레비는 이 현실을 깨닫고, 이 현실에 절망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러면서 우리의 현실을 다시 뒤돌아보게 됩니다. 그다지 다른 것 같지 않습니다. 아니, 더 악화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신자유주의를 기반으로 세계화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삶의 무게에 허덕이는 사람들은 점점 늘고 있지만,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을 찾기는 힘듭니다.
현실은 어쨌든 주어진 것이고, 여기에 의문이나 도전을 제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여겨집니다. 그저 여기서 ‘효율적’으로 살아남는 것이 과제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신속한 순응, 자발적 복종은 필수입니다.
이런 현실을 타파하지 않고는, 국정원 대선 개입 같은 사건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업무 수행을 통해 계속될 것입니다.
아무리 법을 만들어도 근본적인 변화는 어려울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둠과 같습니다. 캄캄한 밤입니다. 밤이 되면 어둠은 어디로나 퍼져갑니다. 분명히 있지만 잡아서 없앨 수가 없습니다. 이 난감한 현실 속에서 우리 수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어제 봉헌 축일을 지내며 수도자의 삶을 다시 한 번 되새겼습니다. 교회헌장은 세상에서 수도자가 해야 할 사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수도자들은 자신들을 통하여 교회가 참으로 나날이 신자들이나 비신자들에게 그리스도를 더 잘 드러내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여야 한다”(제6장 45항).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만, 특히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세상에 드러내 보이도록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런 난감한 현실 앞에서, 먼저 “예수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자문해볼 만합니다.
오늘 복음(마르 5,1-20)은 예수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만남을 들려줍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주위에 공포스러운 존재였지만, 어느 누구도 그를 제어할 수가 없었습니다. 족쇄와 쇠사슬로 여러 번 묶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힘이 장사라 모두 끊어버립니다. 하지만 예수로 인해 결국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서 쫓겨나고 그 사람은 정상이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기 위해 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러자 예수 앞에서 더러운 영의 정체가 환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는 숫자가 많아 이름이 ‘군대’라는 그 많은 영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립니다. 마치 해가 뜨고 빛이 들면서 어둠이 사라지듯, 그렇게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더러운 영을 일일이 잡아 쫓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둠을 잡아서 없앨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을 벗기는 것은 빛입니다. 빛 앞에서 어둠은 사라집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께서 하신 것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더러운 영이라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그 현실 속에 오로지 현존하는 것, 빛으로써.
예수께서 하신 유일한 행위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둠이란 현실 속에서 예수의 방식으로 현존하기.
그래,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셨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예수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 아픈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가갔고,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비인간화하는 제도를, 율법을 통렬히 비판하고 기존의 세력에 도전했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찾은 하느님의 뜻이었고, 예수는 이 뜻을 철저히 따랐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비웠고, 스스로 가난해졌습니다. 하느님께 순명했고, 사람들을 위해 가난해졌고, 불의한 체제에 맞서 고난을 감내했습니다.
우리가 이 같은 예수의 삶을 오늘의 현실에서 드러내고 살아낸다면, 우리의 삶은 돈과 권력이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는 현실에 대해서, 그리고 이 같은 현실의 무비판적 수용과 자발적 복종에 대해서 가장 강력한 거부이자 도전이 될 겁니다.
악이 평범함으로 일상화되어 버린 현실 속에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방식으로 현존하게 되면 우리는 빛이 됩니다. 그럴 때 악은 알아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냅니다.
오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를 찾아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밝히듯, 일상화된 악, 어둠이 우리 앞에 찾아와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밝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둠은 물러가고야 맙니다. 빛 앞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 어둠은 없습니다.
하여, 언제나 예수의 마음으로 세상 속에 현존할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해야겠습니다. 어둠의 현실 한가운데로 들어가되, 현실과 가장 대조적인 모습, 어둠을 드러내는 빛으로 현존해야겠습니다. 그럴 때, 일상 속에 내재화된 악, 일상으로 위장된 악이 폭로될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폭로된 악은 맥을 추지 못합니다. 그렇게 악은 우리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힘을 잃을 것입니다. 어둠이 걷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온통 흔들어 놓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사람들을 온통 흔들어 깨울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사람들을 온통 흔들어 깨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루카 12,49)
예수의 방식으로, 예수의 모습으로, 그렇게 세상에 현존할 때, 우리는 예수께서 지르시고자 했던 불을 세상에 활활 타오르게 만들 것입니다.
조현철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제휴매체인 카톨릭뉴스 지금여기 3일 자에 실린 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