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의 피고인 유우성씨는 지난 16일 오후 서울 서초동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사무실에서 열린 검찰의 증거조작 의혹 해명에 대한 반박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유씨는 이날 자신의 입장을 밝히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때로는 답답한 듯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
[토요판] 커버스토리
유우성·유가려 남매 이야기
▶ 서울시공무원 간첩사건의 피의자 유우성씨는 간첩으로 몰려 1년째 재판정에서 시달리고 있습니다.
유죄를 입증하겠다고 나선 검찰과 국정원이 증거조작을 했다는 중국 정부의 통보에 유씨는 크게 절망했습니다.
중국에 머물고 있는 유씨의 가족들은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유씨와 유씨 가족들을 다시 만나보았습니다. 간첩임을 밝혀내려 한 게 아니라, 간첩을 만들려고 한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이들은 말합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의 피의자 유우성(34)씨는 요즘 인터넷 뉴스 검색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언론이 검찰의 증거 위조 의혹을 다루는 것에 크게 고무됐다.
지난해 초 ‘서울시청에 간첩이 근무하고 있었다’고 발표한 검찰의 말을 대서특필하던 언론들이 항소심 재판정에서 불거지고 있던 증거 위조 의혹에는 침묵으로 일관하자 크게 낙담했던 유씨였다.
일부에서는 ‘국가정보원이 비공식적으로 입수한 문서여도 내용만 맞으면 괜찮다’는 설명으로 사건의 본질을 희석하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국정원이 입수했다고 하는 출입경기록이 유씨의 실제 여권기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도하는 언론은 적다.
“(서울시에서 근무할 때) 탈북자가 아니고 (기초생활)수급자를 관리하는 일을 했다고!”
지난 20일 밤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유씨가 화를 냈다. 텔레비전에서는 한 종편 프로그램이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을 정리한다며 유씨가 서울시에서 탈북자를 관리했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틀린 설명이었다.
탈북자 정보를 북에 건넸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 유씨는 언론 보도 하나하나에 예민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저는 남한이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건너왔는데, 국가기관이 이렇게 증거를 조작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저는 정말 북한이 싫어서 건너온 사람입니다. 검찰은 왜 저를 계속 간첩이라고 주장하는 걸까요.”
20일 밤 자신의 서울 강동구 집에서 기자와 만난 유씨가 맥주를 벌컥 들이켜며 말했다. 유씨는 지난해 8월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난 뒤에도 지금까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 까닭도 없이 두시간에 한번씩 깬다. 그동안 겪은 고통에 대한 후유증이다. 술을 들이켜면 조금 빨리 잠을 잘 수 있다. 수면제를 1년 가까이 먹어온 유씨는 이제 약에 의지한 잠을 줄이려 노력중이다.
조선족 동포가 사는 연길에도 간첩 증거조작 사건이 알려지며, 남매 얼굴은 꽤 알려져버렸다
티브이에 나오는 유씨의 얼굴이 가족들은 반가우면서도 슬프다
유씨는 인터넷 뉴스 검색으로 매일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검찰 말 대서특필하던 언론이 증거조작 의혹에 침묵하는 데 크게 낙담하며 절망하고 있다
북한이 싫어 남한으로 넘어왔는데…
유우성씨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나고 자란 재북 화교였다. 유씨는 “고조할아버지가 일제에 대항해 조선인들과 함께 싸웠던 한족 독립운동가였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후손들이 중국이 아닌 조선 땅에 정착하기를 바랐다. 할아버지는 조선 반도에서 숨을 거뒀다. 자손들은 조선 땅에 정착했고 한국전쟁 이후 그곳은 북한이 되었다.
그러나 유씨는 커갈수록 북한 정권이 싫어졌다. 관리들은 여유롭게 사는데 서민들은 너무 가난했다. 부자 세습 독재정권이 계속되는 게 못마땅했다.
2001년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탈북 직전까지 회령시의 한 병원에서 준의사(의사보조. 3년제인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면 준의사 자격증을 받는다)로 근무했다고 한다. 치료약이 없어 죽는 주민이 너무 많았다. 의사들은 약을 빼돌려 생계 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며 살고 싶어 의사가 되었지만 북한에서 의사로 사는 것이 점점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유씨는 재북 화교여서 중국을 다녀볼 기회가 남들에 비해 많았다. 두만강만 넘으면 입을 것 먹을 것이 넘쳐났고 병에 걸린 사람들도 병원에서 좋은 치료를 받는 것을 목격했다. 같은 하늘 아래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북한은 한심한 감옥 같은 곳이었어요. 아무리 의술이 높아도 의료설비와 의약품이 없으면 결코 환자들을 치료할 수 없는 곳이었어요. 점점 북한 사회가 싫어졌어요.”
그러나 유씨는 중국이 아닌 한국에서 살고 싶었다.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한반도에서 한민족처럼 살아왔기에 중국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남한에서의 ‘제2의 인생’을 생각하게 되었다.
유씨는 2004년 3월 북한을 나와 중국-라오스-베트남-타이를 거쳐 한달 만에 한국에 도착했다. 살아남기 위해 막노동, 보따리상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고생 끝에 2007년 연세대학교 중문학과에 편입했고, 2011년 6월 서울시청 복지정책과 생활보장팀 계약직 공무원이 되었다.
생활이 안정되자 동생 유가려(27)씨를 데려와 함께 살고 싶었다. 동생은 아버지 유아무개씨와 함께 2011년 7월 북한을 완전히 나와, 중국 국적 취득을 위해 연길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유우성씨는 평소 자신과 연락하고 지내던 국정원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동생을 한국에 데려오고 싶다고 말하니까, 선생님(국정원 관계자)은 ‘한국에 데려오면 잘 도와주겠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데려온 건데, 마치 제가 북한 보위부의 지시를 받고 데려온 것처럼 국정원과 검찰은 주장했어요.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유씨는 국정원을 믿었다. 2012년 10월30일 동생을 제주공항을 통해 입국시켰다. 국정원에 자진신고했다. 국정원이 운영하는 경기도 합동신문센터(탈북자 신원 등을 확인하는 기관)에서 동생이 몇개월 머물다 조사가 끝나면 곧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유씨는 기대했다. 동생은 바로 합동신문센터로 보내졌다.
그러나 동생은 풀려나지 않았다. 2013년 1월10일 아침 국정원 수사관들이 유우성씨의 아파트에 들이닥쳤다. 눈을 가린 채 승합차에 태워졌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서울구치소에 입감됐고 파란색 수형복을 입게 됐다. 동생을 한국에 데려오면 도와주겠다던 국정원 관계자는 더이상 유씨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국정원의 설명은 황당했다. 동생 유가려씨가 “오빠가 간첩”이라고 자백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유가려씨는 ‘고문을 받고 허위 자백했다’며 기존 국정원에서의 진술을 뒤집었다.
국정원 수사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검찰 공소장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도 여럿 확인됐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들이 진행한 중국 현지 조사가 큰 역할을 했다. 탈북자 간첩사건에서 중국 현지 조사가 이뤄진 적은 없었다.
결국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는 지난해 8월22일 유씨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항소했지만 통상적인 절차로 보였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이 사건은 검찰이 새로운 증거를 제출하면서 논란이 시작됐다. 검찰은 지난해 11월1일 유씨가 북한과 중국을 오갈 때 기록된 출입경기록을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했다.
기록에는 유씨가 2006년 5월27일 오전 10시24분 중국 용정시 삼합변방검사참(중국-북한 국경지대의 중국 쪽 세관)을 통해 북한 회령시에서 나온 뒤, 한시간도 안 돼 오전 11시16분 다시 북으로 들어갔다가 2006년 6월10일 오후 3시17분 역시 삼합검사참을 통해 북에서 나온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유씨가 2006년 5월27일 이후 다시 북한에 간 적 없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유씨는 이 출입경기록이 가짜라고 확신했다.
유씨는 연길로 돌아간 동생에게 위임장을 보내 자신의 출입경기록을 발급받아 오게 했다. 놀랍게도 검찰이 제출한 출입경기록과 달랐다. 중국 공안이 보관중인 유씨의 실제 여권기록은 유씨가 발급받아온 출입경기록과만 내용이 일치했다.
법정에서 위조 공방이 오갔다.
지난 17일 중국 정부는 한국 재판부에 공문을 보내 ‘한국 검찰이 제출한 3건의 문서는 모두 위조’라고 통보했다. 간첩사건이 간첩조작사건으로 국면이 바뀌었다.
<동아일보>가 보도한 김아무개씨 보도의 진실
중국 연길시에 남아 있는 유우성씨의 가족들은 매일 한국 언론의 보도를 지켜보고 있다.
중국동포들이 많이 사는 연길시에서는 한국 텔레비전을 보는 가구가 많다. 유씨는 중국 연길 지역에서도 얼굴이 꽤 알려져버렸다. 가족들은 매일같이 텔레비전 뉴스에 나오는 유씨의 얼굴이 반가우면서도 슬프다.
“저와 우리 오빠를 괴롭힌 국정원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수하면 좋을까요. 이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고 저희 가족만 너무 큰 고통을 받고 있어요.”
24일 저녁 연길시에서 만난 유가려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국정원 이야기부터 꺼냈다. 아무리 오빠가 간첩이 아니라는 증거를 갖다 내어도, 검찰은 또다른 반박 자료를 제출해 당황스럽다고 했다.
유가려씨는 지난 몇달 동안 화룡시 공안국과 삼합변방검사참 등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중국에서 조사된 것들을 한국 재판부가 믿지 않을까봐 중국 공안의 설명이 담긴 영상물도 제출했다.
검찰은 유가려씨가 공안과의 친분을 이용해 허위 영상물을 제작한 것일 수 있다고 반박했다. 유가려씨는 공안국에 잡혀갈까 두려우면서도 어렵게 구해온 증거들을 계속 허위라고 하는 검찰의 입장이 전해질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유씨의 아버지는 요즘 암투병중이다. 베이징의 큰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수술을 계속 미루고 있다고 했다. 아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마음 편하게 수술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유가려씨는 오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자료를 찾으러 다니느라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지 못하다, 최근에야 조그만 판매점의 직원이 되었다고 한다.
부녀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동아일보>의 보도 내용 때문이었다. 동아일보는 이날 아침 한 탈북 여성 김아무개씨의 증언을 보도했다.
김씨는 “유우성씨의 아버지가 ‘아들이 보위부 남파 간첩으로 한국에 가 있다’고 내게 말한 적 있다. 자신들도 화교 신분을 속이고 남한으로 갈 것인데 내게 함께 가자고 말했다”고 인터뷰했다. “간첩 노릇을 한 것이 중요하지 언제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넘어갔는지 따지는 게 뭐가 중요하냐”는 말도 했다.
유가려씨와 아버지 유씨의 말을 종합하면, 김씨는 2010년께 회령시에서 유가려씨 가족과 얼마간 같이 지냈다. 교화소(북한의 교도소)를 나온 지 얼마 안 돼 오갈 곳이 없어진 김씨를 한 지인이 함께 살면 어떻겠느냐고 소개했다고 한다.
유씨 어머니가 2006년 세상을 떠난 뒤 유씨 가정에는 어머니 노릇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생활 성향이 잘 맞지 않아 김씨는 유씨 가족과 크게 싸운 뒤 보름 만에 헤어지게 됐다고 한다.
“가려가 ‘오빠가 한국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얘기하기는 했지요. 하지만 (내가) 보위부 남파 간첩으로 갔다고 말했다니요. 우리와 헤어질 때 무척 안 좋게 헤어졌지만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할 수 있나요.” 아버지 유씨가 격앙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보름밖에 같이 살지 않은 여자에게 아들의 비밀을 다 말해주고 함께 남한에 가자고 하는 게 말이 돼요? 아들이 남한에서 보위부 간첩일을 하는데 가족들이 뭣하러 남한에 가서 함께 살 궁리를 합니까?”
원심 재판정에서 김씨는 이미 동아일보 기자에게 했던 증언을 한 바 있다. 1심 재판부는 신원을 알기 어려운 탈북자의 일방적 주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이러한 내용들을 기사에 싣지 않고 김씨를 ‘객관적인 제3의 증언자’로 포장했다.
유우성씨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는 탈북자들은 또 있다. 정순옥(가명·32)씨는 원심 재판정에 나와 유우성씨를 2007년 북한 회령시에서 봤다고 증언했다.
정씨의 말이 맞다면, 2006년 6월 이후 북한에 다시 들어온 적 없다는 유씨의 주장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정씨는 1998년 유씨를 처음 길에서 본 뒤, 무려 10년 만에 회령시 길에서 우연히 유씨를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정씨는 유우성씨와 한 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없다. 회령시 옆 유선시에서 살았다. 말 한번 섞어본 적 없고 같은 도시에 살지도 않는 어떤 여성이 10년 동안 길에서 두번 본 남성을 기억해내는 것은 얼마나 신뢰할 만한 행동일까. 검찰은 정씨를 재판부에 중요 증인으로 불러 신문했다.
재판정에 나온 정씨는 교화소를 다녀온 남편의 출감 연도가 2005년 9월인지 2006년 9월인지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오직 10년 동안 길에서 두번 본 유우성씨의 모습만 정확하게 기억했다. 재판부는 정씨의 말을 비중있게 판단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검찰이 찾아서 법정에 증인으로 내세우는지 모르겠어요.”
유우성씨는 자신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검찰이 위증을 하는 증인들을 내세우는 것 아닌지 의심한다. 탈북자들은 남한으로 오기까지의 경력과 삶이 모두 베일에 가려져 있어, 정체를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국정원과 검찰은 유우성씨에게 불리한 자료들은 적극 재판부에 제출한 반면, 공소장 작성에 불리한 참고 증언들은 정식 조서로 작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2월 중국 연길시에서 만난 유우성씨의 동생 유가려씨가 기자와 인터뷰하는 도중 과거의 아픔이 떠올라 눈물을 흘리고 있다. 허재현 기자 |
공소유지에 불리한 수사물들은 고의로 누락?
유우성씨의 친구 위덕만(가명·32)씨는 회령시에서 어렸을 때부터 유씨와 함께 자라왔다. 그는 2004년 11월 북한을 완전히 나온 화교였다.
위씨는 유씨가 지난해 국정원에 붙잡혀간 뒤 국정원 수사관의 연락을 받았다. 유씨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위씨가 말한 내용은 어찌 된 일인지 정식 조서로 작성되지 않았다.
기자를 만난 위씨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우성이는 제 ‘불알친구’거든요. 간첩을 할 애가 아니에요. 북한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친구예요. 제가 2011년 7월 유우성 아버지와 유가려가 아예 북한에서 중국으로 나왔다고 수사관에게 분명히 말해줬어요. 그때 제가 연길에서 식당을 할 때였기 때문에 잘 알거든요. 그런데 제가 해준 얘기는 나중에 보니 정식 조서로 남겨져 있지 않더라고요. 왜 저는 법정에 나가 증언할 기회도 주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북한에 남아 있던 유가려씨 부녀는 2011년 7월 중국으로 완전히 이사를 나왔지만, 검찰은 계속 북한에 거점을 마련해 유씨 부녀가 북한을 드나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우성씨는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서아무개씨라는 탈북자가 있어요. 2007년 회령시에서 저와 위덕만이 함께 서 있는 것을 봤다고 국정원 수사관에게 진술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국정원은 위덕만이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중국 산둥성 옌타이시에서 식당을 하느라 북한에 들어간 적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2007년에 회령시에서 서씨가 저와 위덕만을 봤다고 한 진술은 거짓말이란 것을 국정원이 확인한 것이지요. 그런데 왜 수사기관이 서씨의 주장만 믿는지 모르겠습니다. 서씨는 7년이나 아편을 해온 사람이란 것도 국정원이 알고 있어요.” 서씨는 원심 재판정에 출석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뚜렷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았다.
유우성씨는 2006년 당시 베이징에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유씨가 수두를 앓던 2006년 5월27일에서 6월10일 사이 유씨의 여자친구는 베이징과 창춘 등에서 그를 간호했다.
국정원과 검찰은 유씨가 2006년 5월27일에서 6월10일 사이 북한에 들어가 보위부에서 간첩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씨는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때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할 수 있는 유씨 여자친구의 존재를 수사관에게 설명했다. 유씨의 여자친구는 국정원 수사관의 전화를 받았고 자세한 경위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검찰이 재판부에 낸 수사목록에는 이 진술이 빠져 있었다.
유씨의 변호를 맡은 김용민 변호사는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하는 수사목록에는 지금까지 수사가 이뤄졌던 모든 것들이 정리돼 있어야 한다. 유가려씨가 국정원에서 2012년 11월과 12월(국정원에서 허위 자백하기로 결심하기 전) 진술한 것들이 수사목록에 다 빠져 있어서, 우리가 중간에 항의한 적 있다. 검찰이 실수라며 그때야 수사목록에 추가했다. 공소유지에 불리한 수사물들을 고의로 누락했다면 큰 문제다”고 지적했다.
국정원과 검찰이 수사 과정에서 확인한 ‘유우성씨에게 유리한 증언들’ 중 수사목록에 빠져 있는 것들이 5건 정도 된다고 유씨는 설명했다. 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들만 선별해 수사목록이 작성됐는지 유씨는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유씨와 친척관계에 있는 또다른 탈북자는 국정원에 여권을 1년 전 빼앗긴 채 돌려받지 못했다고 한다. 유씨가 붙잡혀간 뒤 국정원에서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를 받은 이 탈북자는 유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취지로 증언했다고 한다.
이 증언 뒤 국정원 수사관으로부터 ‘추방당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었다. 겁을 먹고 여권을 돌려달라는 말도 못하고 있다고 지인들은 전했다.
유우성씨의 이모 조인군(55)씨는 중국 지린성 쓰핑시에 살고 있다. 2006년 5월27일 이후 열흘간 유씨의 행적을 잘 알고 있는 당사자이다. 유씨는 국정원 수사관들에게 이모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확인을 요청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국정원은 조사를 하지 않았다.
조인군씨는 26일 <한겨레>와 만나 분통을 터뜨렸다. “가강이(유우성씨가 북한에서 사용하던 이름)가 어머니 장례 치르고 나서 우리 집에 와서 열흘간(2006년 5월말에서 6월초) 머물렀어요. 가강이가 어머니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며 많이 울었어요. 가강이가 저와 함께 있던 기간에 북한에 있었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가강이가 그때 우리집에 머물고 있었던 것을 본 이웃집 사람들 두명의 확인서까지 법원에 제출했는데 대체 왜 한국 검찰은 아직도 그때 가강이가 북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겁니까.” 조인군씨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기자에게 언제쯤이면 조카가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는지 물었다. ‘검찰이 무죄 판결에 항소해 대법원까지 가게 되면 몇년간 더 힘들 수도 있다’고 답하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가강이는 한국이 자신을 받아줘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좋은 데 취직했다며 참 감사해했어요. 그런데 어찌 한국은 누명을 씌워 사람을 괴롭힙니까. 정말 한국에 실망했어요.”
검찰과 국정원은 ‘그날’ 이후 유씨의 행적 증명해줄 증인은 조사하지 않거나 무시한 채, 북한서 유씨 봤다는 탈북자들만 법정에서 증인으로 내세운다
2007년 국정원의 부탁을 받고 북한 첩보활동하는 탈북자에게 정보요원 활동을 제의받았다. 국정원에 잘 보여야 했지만 유씨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유가려씨가 티브이 보다 놀라는 이유
유우성씨의 어머니 조아무개씨는 2006년 5월22일 숨졌다. 남한에 머물고 있던 아들과 몰래 전화통화를 하다가 보위부의 기습단속에 걸렸다는 게 유씨의 말이다. 평소 심장이 좋지 않던 조씨는 깜짝 놀라 심장이 멎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이 일로 유씨는 보위부 요원이 될 게 아니라 보위부를 적으로 삼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검찰은 유씨와 그의 친구들, 친척들의 일관된 진술은 무시하고 유가려씨가 국정원에서 고문받아 허위 자백한 것으로 보이는 진술에만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수사 과정에서 유씨가 북한을 드나들며 간첩활동을 했다고 볼 수 없는 여러 증거들이 확보됐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간첩으로 보일 만한 증거들만 꿰어맞추어 공소장을 작성했다면, 이것은 ‘간첩을 잡는’ 게 아니라 ‘간첩을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유씨는 이러한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결과를 미리 만들어놓고 수사를 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제가 간첩이 아니라는 진술을 하는 사람들의 말은 모두 무시하고, 저에 대해 잘 모르거나 악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진술만 검찰은 받아들이고 있어요. 재판부는 동생이 국정원에서 어떤 고문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을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유씨는 2007년 국정원의 부탁을 받고 북한 첩보활동을 하는 탈북자로부터 함께 정보요원 활동을 하자고 제의받은 적이 있다.
유씨는 거절했다. 북한과 접촉도 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국정원에 잘 보여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허위 정보를 건네주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유씨의 판단이었다.
“혹시 그때 국정원의 부탁을 들어줬다면 제가 이렇게 간첩으로 몰리지 않았을까요.” 유씨는 대체 자신이 왜 간첩으로 의심을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호소했다. “저는 남한에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돕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 사회복지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그런 이유였어요. 제발 좀 저를 평범한 한국 국민으로 살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나 텔레비전 뉴스에 자주 얼굴이 나오면서 이제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었다.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생계를 위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학부모가 유씨의 얼굴을 알아차려 더이상 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안정적인 일자리였던 서울시 공무원 일자리도 잃고, 1년 동안 재판정에 오가느라 유씨는 하루하루가 고통스럽다.
동생 유가려씨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괴롭혔던 국정원 수사관들이 가끔 집회 현장에 나타나 텔레비전 뉴스 카메라에 잡힌다. 텔레비전을 보던 유가려씨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이런 날은 제대로 잠을 이루기 어렵다.
“국정원과 검찰의 증거 조작을 밝히는 게 국익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억울한 사람의 한을 그대로 묻어두는 게 국익이라고 생각한다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유가려씨는 조국으로 삼고 싶어 건너왔던 한국 사회가 자신의 기대와 다른 것이 슬프다.
중국 연길/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