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은 평등하다
미국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수사·정보기관이 감시 대상 차량에 신호발신기를 심어 추적하는 것은 영장 없이 가능할까?
1983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그렇다고 판결했다. 자동차로 이동하는 모습은 누구에게나 목격될 수 있는 만큼 프라이버시와 상관없다는 이유였다.
이런 논리라면 요즘의 지피에스(GPS) 추적장치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지만 연방대법원은 2012년 ‘존스 사건’에서 둘을 구분했다.
“신호발신기를 이용하더라도 요원들이 일정 거리에서 직접 따라붙는 등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데, 지피에스 기술은 사무실에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언제든 타깃의 위치를 알려준다.”(존 로버츠 대법원장)
구닥다리 기술과 첨단 테크놀로지의 질적인 차이, 국가기관이 너무도 쉽게 개인을 감시할 수 있게 된 새로운 위험을 인식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냉철한 판단이 다는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재판에서 미국 법무부 쪽이 영장 없는 지피에스 장치 사용을 주장하자, 로버츠 대법원장이 묻는다.
대법원장: 그렇다면 정부가 우리 대법관들 차량에 죄다 지피에스 장치를 심어 감시할 수도 있겠군요?
법무부 대리인: 대법관님들을요?
대법원장: 예. (법정 내 웃음)
법무부 대리인: 대법원 판례에 비춰보면, 도로를 달릴 때는 대법관님들이라고 해서 더 큰 프라이버시를 기대할 수는 없을….
대법원장: 감시할 수 있다는 얘기군요. 내일이라도 당장 우리 차량에 지피에스 장치를 설치할 수 있다? 그래도 헌법적 문제가 없다?
법무부 대리인: 누구나 똑같이… 연방수사국(FBI)이 원하면 감시요원을 24시간 풀어 누구라도 미행할 수 있듯이….
웃음도 섞여 있었지만, 재판을 진행하던 대법관들은 찜찜하지 않았을까.
한 미국 언론은 이를 두고 “조지 오웰 식의 가상적인 논쟁이 대법관들 자신의 구체적인 문제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고 표현했다.
영장 없는 지피에스 장치 사용을 금지하는 전원일치 판결에는 대법관들의 이런 실존적 상상력도 투사됐을 듯싶다.
연방대법원은 2014년 스마트폰 압수수색을 엄격히 제한하는 ‘라일리 사건’ 판결에서도 전원일치로 뭉쳤는데, 한 평론가는 “대법관들 모두 스마트폰을 사용할 테니, 스마트폰이 쉽게 압수수색당하는 상황의 문제점을 직감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견제받지 않는 사찰의 칼날은 그 누구라도 겨눌 수 있다는 직관이 두 판결에 깔려 있는 셈인데, 이는 앞에 인용한 법무부 대리인의 답변에서도 입증된다.
“누구나 똑같이.”
감시의 대상은 ‘평등’한 것이다.
실례로 지난해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테러단체를 감시하던 실력으로 국회 정보위원회의 컴퓨터를 몰래 들여다보기도 했다.
더 풍부한 사례는 대한민국에서 찾을 수 있다.
안기부(현 국정원)가 운영했던 도청조직 ‘미림팀’은, 한정식집과 골프장 등을 찾아다니며, 정계·재계·언론계 인사 등 650여명을 사찰했다.
집권당 총재인 이회창씨 주변도 감시 대상이었고, 잘 알려졌듯 이학수 전 삼성그룹 부회장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대화도 도청됐다.
윤석양씨가 폭로한 보안사(현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 대상에도 야당 정치인은 물론, 집권당의 김영삼 대표최고위원과 그 측근들, 보수·진보 언론사 간부 등이 망라돼 있었다.
과거의 버릇은 고쳤을까?
몇십명에게만 쓸 수 있는 그 비싼 기술을 사찰에 이용하려 한다면 누구부터 타깃으로 삼을까?
상상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사찰 기술이 첨단을 달리는 이 시대에, 국가기관의 선의에 내 프라이버시를 온전히 맡길 것인가, 아니면 과거보다 더 의심하고 견제할 것인가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강경 보수주의자인 로버츠 대법원장은 후자를 택했다.
상상력이 빈곤한 이들에게 참고가 될 듯하다.
박용현 논설위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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