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정도전이라면 오늘 

道雨 2016. 4. 13. 11:34

 

 

 

정도전이라면 오늘

 

 

 

“정치는 나눔이고 분배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김영민)이 한 말이다.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분배”라는 정치학적 정의보다, 내게는 이 말이 정치에 대한 현실적이고 간명한 정의로 여겨진다.

 

정치는 분배다.

드라마에서 정도전은 “정치는 결국 누구에게 거둬서 누구에게 주는가 하는 문제”라고, 재분배의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재분배 이전의 분배 그 자체가 정치의 핵심 문제다.

가령 노동자의 임금은 시장에서 자율적으로 결정되는 순수한 경제의 영역인가?

아니다.

최저임금 제도, 비정규직 제도,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결정짓는 노동조합 관련 법과 제도 등, 수많은 관계와 제도하에서 결정되는 정치의 영역이다.

정치는 분배고, 재분배의 문제다.

 

정치는 나눔이다.

정치는 권력을 나누어 이를 통제하고 행사한다. 정치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자와 권리를 가질 수 없는 자를 나누고, 이를 제도화한다.

가령 선거권이 인정되는 기준(19살), 근로기준법상의 일부 권리가 배제되는 노동관계 등, 권리의 인정과 배제를 가르는 기준을 결정하는 것이 정치다.

헌법은 평등한 권리를 보장한다. 그러나 불평등한 분배는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병원비가 없어 치료를 할 수 없다면, 그의 생명권과 존엄은 평등하게 보장받는 것일 수 없다.

 

정치는 나눔이고 분배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눔과 분배의 과정, 결과는 최대한 평등해야 한다. 경제가 불가피하게 불평등한 결과를 산출하는 과정이라면, 정치는 그 불평등에 개입하여 이를 조정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더 많은 평등을 지향해 가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에서 정치의 역할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하위 50%의 자산이 전체 자산의 2%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사회적 부는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0년 전에 비해 10배가 넘게 상승했지만, 오늘의 세대는 30년 전 부모 세대들에 비해 결코 풍요롭지 않다.

 

금수저, 흙수저로 표현되는 불평등한 현실과 그에 대한 분노, 체념은 우리 사회의 시한폭탄이다. 문제는 정치다. 이제까지 우리의 정치는 이 불평등의 문제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제도권의 정치는 그저 자기들끼리 권력을 나누고 유지하는 것을 제1의 과제로 삼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현실에 대처하는 우리의 방법은 두 가지다.

 

그 한 가지는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제도 정치가 만들어낸 불평등한 현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상의 실천이다.

멀게는 근로기준법을 불사르며 ‘우리도 사람이다’를 선언한 전태일이 그랬고, 희망버스라는 연대의 형식으로 ‘비정규직 철폐, 정리해고 반대’를 주장했던 해고노동자들이 그랬다. 이들 모두 대의제라는 제도 정치 공간의 합의과정에서 대의되지 않는 자들이었고,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이었다.

이렇게 배제된 자들이 삶의 구체적 현장에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기 위해, 기존의 불평등한 결과에 이의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고, ‘민주주의’라는 말의 본래 의미에 부합하는 정치가 발생한다.

 

또 하나는 평등에 투표하는 것이다. 불평등의 문제에 도전할 새로운 정치 주체를 세우는 것이다. 권력 놀음에 빠져 정치를 지역 구도 등의 문제로 왜곡한 기존의 정치적 대표들을 교체하는 것이다.

정당의 홍보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평등한 현실에 도전할 정치적 가능성을 지닌 주체들이 보인다. 그들이 비록 현재 소수의 세력이라고 하더라도, 평등을 위한 투표는 결코 사표가 아니다. 평등에 투표해야만, 평등의 문제를 정치의 중심에 놓는 정치지도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존엄을 위해 투표하자. 평등에 투표하자.

 

 

정정훈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