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전설, 설화

스퀼라 이야기

道雨 2019. 7. 11. 17:26




미노스 왕과 스퀼라 이야기




크레타 왕 미노스가 메가라 왕국(뒤에 알카토오스로 개칭함)을 공격할 때의 일이었다. 당시 메가라(알카토오스)의 왕은 니소스였는데, 이 니소스 왕에게는 스퀼라라고 하는 딸이 있었다.

미노스의 메가라 포위 공격은 여섯 달이나 계속되었지만, 메가라는 끄떡도 하지 않고 버티어 냈다. 그도 그럴 것이 니소스 왕의 머리카락 속에는 유달리 빛나는 자주색 머리카락 한 올이 있는데, 이 자주색 머리카락이 니소스 왕의 머리에 붙어 있는 한 메가라는 공략당하지 않는 것으로 운명지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가라 국의 성벽에는 탑이 하나 있었다. 이 탑에서 내려다보면, 미노스 왕이 군대를 포진시키고 있는 들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미노스 왕의 딸 스퀼라는 곧잘 이 탑으로 올라와 적군의 막사를 내려다보곤 했다. 포위 공격이 오래 계속되어 왔기 때문에 ,스퀼라는 적 장수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모두 외고 있었다.

그러나 적장수들 가운데서 가장 스퀼라를 감탄하게 하는 장수는 다름 아닌 미노스 왕이었다.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든 그의 늠름한 모습은, 아닌게 아니라 스퀼라가 찬탄할 만했다.

미노스 왕이 창을 던지면 기()와 힘이 창끝에 모이는 것 같았고, 미노스 왕이 활 시위를 당기면 아폴론도 그 앞에서는 빛을 잃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미노스 왕이 투구를 벗고, 자주색 용포를 휘날리며, 화려하게 치장한 백마에 올라 거품을 뿜어 대는 그 말을 고삐로 제어하는 모습은, 니소스의 딸 스퀼라의 넋을 송두리째 뽑아 놓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스퀼라는 그 비할 데 없이 우아한 모습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스퀼라는 미노스 왕이 들고 있는 무기, 잡고 있는 고삐를 질투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적군 사이를 뚫고 미노스 왕 곁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탑 위에서 미노스 왕의 진영 한가운데로 몸을 던지는 짓이든, 그를 위해 성문을 열어 주는 짓이든, 미노스 왕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하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꼈다. 탑 위에 앉아 미노스 왕의 진지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을 정도였다.

「아, 이 고통스러운 전쟁을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미노스가 우리의 적이라는 것은 슬픈 일이나, 어떤 이유에서든 내가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된 것이야 이 아니 기쁜 일인가. 저이가 나를 인질로 아버지에게 화평을 요구한다면, 아, 상대가 저이라면 기꺼이 들어주리라. 할 수만 있다면, 내게 날개가 있다면 저이의 진영으로 날아내려가, 우리 모두 저이의 자비를 구한다고 하고 싶구나.

그러나 그런 짓은 아버지를 배신하는 짓이다. 안 된다. 아버지를 배신하느니 이 몸이 죽어 두 번 다시 미노스 왕을 보지 않는 편이 낫지. 하지만 정복자가 인정 많고 관대한 자라면, 정복당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는 법. 더구나 정의가 미노스 편에서 있는 걸 보면, 어차피 우리는 저들의 군대에 정복당하고 말 게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우리가 지게 되어 있다면, 사랑의 힘이 저들을 위해 성문을 열어 준들 무엇이 나쁘랴? 어차피 조만간 무력하게 열어 제칠 성문인데 허송세월해서, 무익하게 피를 흘려서 득될 것이 무엇인가.

그러다 누군가가 미노스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면? 그만큼 용기 있는 자가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저이가 미노스인줄 모르고 그럴 수도 있지 않는가. 차라리 이 나라를 지참금으로 붙여 내 몸을 저이에게 허락하고, 이로써 이 전쟁을 끝내고 싶구나.

그러나 어쩌랴? 성문에는 경비병이 붙어 있고, 열쇠는 아버님이 가지고 계신 것을! 내 앞길을 막을 사람은 아버님뿐이구나.

아, 신들이 아버님을 수습해 가주었으면 좋으련만! 아니, 내가 왜 이런 것을 신들에게 빌고 있지? 다른 여자 같으면, 나처럼 뜨거운 사랑으로 불타는 다른 여자 같으면, 상대가 누구든 제 손으로 사랑의 장애물을 물리칠 것이리라.

그런데 나만큼 그런 일에 자신있는 여자가 또 있을까? 불이나 칼로 싸울지언정, 원하는 것은 기어이 손에 넣는 내가 아니더냐.

그러나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불도 칼도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직 아버님의 자주색 머리카락 한 올. 내게는 황금보다 귀하다. 머리카락 한 올이야말로 내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이므로.」


스퀼라가 이런 식으로 저 자신의 마음과 싸움을 벌이고 있을 동안 밤이 찾아와,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은 깊이 잠들었다.

스퀼라는 아버지 니소스 왕의 침실로 숨어들어 그 운명의 머리카락을 뽑았다. 그리고는 성문을 빠져나와 적진으로 들어가서는, 미노스 왕의 부하에게 어서 빨리 왕을 친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윽고 미노스 왕 앞으로 나아간 스퀼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니소스의 딸 스퀼라입니다. 이 나라와 아버지의 궁전을 왕께 바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오직 대왕뿐, 대왕을 사랑하오니 다른 상으로 공()을 갚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자주색 머리카락을 보소서. 이 머리카락과 함께 아버지와 아버지 왕국을 대왕의 손에 바칩니다.」

이 말과 함께 스퀼라는 저 운명의 머리카락이 든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미노스는 몸을 뒤로 젖힐 뿐, 그 머리카락에는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호령했다.

「사악한 계집이구나. 신들이 어찌 너 같은 것을 그냥 두리. 더러운 계집이여, 너는 우리 시대의 수치이니, 바라건대 땅도 바다도 너에게만은 쉴 곳이 되어 주지 않기를. 우리 크레타 땅이, 제우스 신께서 터잡으신 이 땅을, 귀축()과 다를 바 없는 너 같은 계집으로 욕되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미노스 왕은, 제 손에 떨어진 메가라를 공정하게 다스리기로 마음먹고, 함대를 거두어 그 섬에서 떠날 차비를 하라고 부하들에게 명했다.

스퀼라는 미친 여자처럼 날뛰며 소리쳤다.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이렇게 나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승리를 안아다 준 나를? 저를 위해 아버지와 나라를 희생시킨 나를? 오호라, 큰 죄를 지었구나, 죽어야 마땅할 것이나, 네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함대가 그 땅을 떠나려 하자, 스퀼라는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리고는 미노스를 태운 배의 키에 달라붙어, 그 배를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했다. 그러자 하늘 높이 날고 있던 한 마리 물수리(니소스 왕이 변신한 새)가 스퀼라를 발견하고는, 송곳처럼 내리꽂히며 부리와 발톱으로 스퀼라를 공격했다.

몹시 놀란 스퀼라는 배에서 손을 떼었다. 그대로 두었으면 필시 바다 깊숙이 가라앉았을 테지만, 자비심 깊은 신들이 나서서 스퀼라를 새(백로)로 변하게 해주었다.

물수리는 오늘날까지 옛날에 품었던 앙심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하늘 높이 날다가 딸(백로)을 발견하면, 여러분도 누차 보셨을 테지만, 부리와 발톱으로 공격하여 옛날의 한을 풀어 보려 하는 것이다.




*** 알카토오스 : 사람 이름이자, 왕국 이름


알카토오스(Alcathous)는 피사(Pisa)의 왕 펠로프스(Pelops)와 그의 아내 히포다미아(Hippodamia)의 아들로, 이복동생 크리시포스(Chrysippus)를 죽인 죄로 추방되어 메가라로 갑니다.

메가라의 왕 메가레우스(Megareus)의 아들이 키타이론(Cythaeron) 산의 사자에게 죽자, 알카토오스가 나서 사자를 처치합니다.

 

사자를 처치한 공으로 알카토오스는 공주 에우아크메(Euaechme)와 결혼을 하고, 후에 메가라 왕국을 물려받습니다.

그 뒤로 메가라의 아고라는 알카토오스란 이름을 갖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