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상식

다시 한번, 차별금지법

道雨 2021. 12. 13. 11:13

다시 한번, 차별금지법

 

 

피고 보험회사는 (장애인인) 원고에게 보험 계약을 설명하고 계약서를 교부하라.

 

원고의 청구취지다. 처음 이 재판을 접했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일단 생소했다. ‘법원이 할 수 있는 판결이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도 들었다. 재판은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장애인 차별금지법)에 규정된 법원의 적극적 구제조치 명령권에 근거하여 진행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시 내게 그 재판은 ‘멘붕’ 그 자체였다. 사인 간의 계약 체결 과정에 법원이 개입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는데, 무엇이 차별인지 판단하는 과정은 더더욱 어려워 보였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차별은 쉬워 보인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기대수명이 낮다는 등의 통계에 묶여 사실상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다니, 부당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구체적인 재판으로 들어가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세세한 사정들이 존재한다. 가령 보험회사가 장애라는 사정만으로 보험 가입을 승인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장애로 인한 위험성 평가를 별도로 거쳤다고 주장할 때, 위험성 평가의 당부당을 따져 법률상 차별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은, 멀리서 볼 때처럼 단순하지 않다.

한편, 가까이서 보는 세세한 사정들 사이에서 고민할 때, 다시 한 발짝 떨어지면 가려진 문제가 보인다. 예산이 없다는 이유로,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위험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이유로, 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고, 지하철이나 버스 등의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우며, 영화관에 갈 수 없고, 놀이기구를 타지 못하는 삶이, 과연 법과 이치에 부합하는가.

 

2007년 장애인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이래, 14년의 시간 동안 판사들은 멀리 보기와 가까이 보기를 반복하면서 장애를 이유로 한 차별이 무엇인지, 시정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 법원의 개입 권한은 어디까지인지 고민했다.

차별이라는 주장이 모두 용인된 것은 아니다. 적극적 구제조치를 명한 판결은 드물다. 그러나 선례가 쌓이면서 판사들의 장애 및 차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고, 구제조치 명령 권한의 범위도 점차 명확해졌다.

판결로 인해 사회의 인식이 제고되고, 관련 업계의 관행이 바뀌기도 했다. 사회의 변화는 다시 재판에 영향을 미치고, 재판의 결과는 사회의 변화에 규범적 승인을 부여하며 선순환한다.

그 결과 장애로 인해 포기하는 삶의 영역이 서서히 축소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세상이 천지개벽할 정도로 흔들리진 않았다.

 

현재 국회에는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이 계류 중이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경우, 자유가 지나치게 제한당하고 세상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변할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해 있다. 그러나 장애인 차별금지법 제정 이후의 변화를 살펴볼 때 그 우려가 합리적인지 의문이 든다.

차별금지법의 내용이 오로지 재판을 통해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재판 영역에서 판사들은 앞서 장애인 차별금지법 재판에서 그러했듯이 멀리 보기와 가까이 보기를 반복하며, 헌법이 규정한 평등과 자유 및 권리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나가려고 노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존재하는 차별은 선언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현실의 복잡다단함이 무시되진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유용함이다. 헌법에서 이미 평등을 명시적으로 선언하고 있고, 개별 영역에서의 차별금지법들이 존재하지만, 구체적으로 인지되지 못하는 차별의 영역이 무수하다.

나부터도 법 공부를 하고 자격시험 및 임용 절차를 거쳐 법 전문가라는 판사가 되었지만, 구체적인 차별 및 구제에 대해 고민한 것은 장애인 차별금지법에 따른 재판을 맡게 되면서였다.

장애인 차별금지법에 따른 변화가 보여주듯,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우리 사회는 가려졌던 분리와 구별, 제한 및 배제, 불리한 대우 등을 인식하고, 그것이 과연 법과 이치에 합당한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모든 차별 주장이 차별로 인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민하는 과정에서 차별에 대한 개념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동력이 될 것이다. 동시에 가려진 삶, 포기해야 하는 삶, 구분된 삶의 영역들도 ‘서서히’ 축소될 것이다.

 

참고로, 앞 사례에서 차별은 인정되었으나 구제청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현재 보험업계는 장애인을 위한 보험을 운용하며, 장애를 이유로 한 가입 거절이 차별임을 명시하고 있다.

 

 

류영재ㅣ대구지방법원 판사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22959.html?_fr=mt0#csidxf831e5e412181a9924c7fe9904d18e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