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끝난 일, 우린 원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이유진의 어떤 독일] 독일 새 정부의 야심찬 신재생에너지 정책
전 세계가 탈석탄과 탈탄소를 말하고 있는 지금, 원자력이 다시 논쟁의 중심에 섰다. 사고 위험성과 폐기물 처리 문제,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탈원전'은 언젠가는 해야 할 시대적 사명으로 인식됐다.
그런데 기후 위기가 가빠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탄소를 내뿜지 않는 원자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다시 나온다. 독일의 탈원전이 성급했다는 주장도 있다. EU에서는 글로벌 투자의 기준이 될 친환경 분류 체계 '그린 택소노미(EU Taxonomy)'에 원자력을 포함하려는 여론전이 치열하다.
하지만 독일은 원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 이후 탈원전 기조를 강화한 독일. 내년 말까지 모든 원자력 발전소가 폐쇄된다. 독일에서 원전은 이미 과거다.
친기업 자민당 너마저
지난 12월 8일 출범한 독일 새 정부. 세간의 우려보다 훨씬 더 야심찬 기후 전략으로 주목을 받았다. 진보성향인 사민당과 탈핵 지역운동에서 시작해 기후 의제를 주도하는 녹색당, 친기업 성향의 자민당이 연정 정부를 꾸리면서, 기후 의제의 향방이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 지난 12월 8일 출범한 독일 새 정부. 진보 성향 사민당, 탈핵과 기후의제로 성장한 녹색당, 친기업 성향 자민당이 연정정부를 꾸렸다. ⓒ Bundesregierung
사민당과 녹색당, 자민당으로 구성된 새 연방정부는, 당초 2038년 목표였던 탈석탄 목표 시기를 2030년으로 앞당겼다. 동시에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전체 전력의 80%까지 확대하기로 했다. 기존 목표는 65%였다. 이를 위해 육상 풍력을 국토 면적의 2%에 설치하고, 여건이 되는 건물 지붕에는 모두 태양광을 설치하도록 할 계획이다. 에너지 저장과 유연성을 높일 수 있는 신기술 개발에도 적극 투자한다.
원전의 신규 건설 및 수명 연장에 대한 내용은 없다. 오히려 국경 인근에 가동 중인 원전의 조기 폐쇄를 위해 노력하고, 핵폐기물 처분장을 얼마나 투명하고 과학적으로 건설할지에 대한 부분만 언급되어 있다.
독일 기후 에너지 싱크탱크인 아고라 에네르기벤데(Agora Energiewende) 염광희 박사는 "친기업 성향으로 기후 보호에 소극적이고 냉소적이던 자민당이 연정에 참여했음에도 이런 강력한 기후 정책이 나온 건, 그만큼 기후 의제의 중요성을 크게 보고 있는 것"이라며 "기후 에너지 정책이 기업을 옥죄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에 선제적으로 투자해 독일 기업과 산업의 세계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로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설명했다.
▲ 독일에서 현재 운영중인 원전 6기. 올해 말까지 3기, 내년 말까지 나머지 3기가 운영 종료된다. ⓒ BMU
독일의 탈원전
사회적 합의 과정은 길었다. 독일 탈원전은 2002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부가 처음 결단했다. 원자력 업계와 2년여간의 협의 끝에 원자력법을 개정해, 신규 원자력발전소 건설을 금지하고, 원전 수명을 평균 32년으로 못박았다. 이에 따라 2021년까지 탈핵이 이뤄지게 됐다.
앙겔라 메르켈이 소속된 기민·기사당은 탈원전에 반대했다. 전기요금 안정화, 재생에너지로 이행하는 과정에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다. 2009년 메르켈 2기 정부는 결국 원전 사용기한을 기존 계획 대비 8~14년 더 연장하기로 한다.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가 발생했다.
분위기는 반전됐다. 정치 사회적 압박 속에 메르켈은 원자력 사용기한 연장을 취소하고 탈원전을 선언했다. 당시 가동중이던 17기 원전 중 노후 원전 8기를 즉각 폐쇄하고, 나머지 9기는 단계적 폐쇄를 결정했다. 이 계획에 따라 올해 말 3기, 내년 말에 마지막 3기가 폐쇄되면 독일은 완전한 탈원전 국가가 된다.
독일의 에너지 전환은 일관성을 유지했다. 탈원전 기조를 유지하면서 재생에너지 설비와 송배전망을 꾸준히 확대했다. 한 정당이 주도해 16년간 정권을 이어간 배경도 있지만, 무엇보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전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덕분이다. 어떤 정당이 정부를 구성하더라도 에너지 전환 정책은 유지되거나 더 빨라질 뿐, 후퇴할 수는 없는 분위기가 됐다. 이는 막 출범한 새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재생에너지 어디까지 확대 가능할까
▲ 독일 신재생에너지 전력생산규모 ⓒ AGEE-Stat 번역
원전이 필요하다는 주장 뒤에는 항상 신재생에너지로는 전력 공급이 불안정하다는 이유가 뒤따른다.
독일 신재생에너지 전력생산 규모는 꾸준히 증가했다. 2020년 기준 재생에너지 전력생산 비중은 전체 전력생산량의 45%. 당초 목표인 35%를 초과 달성했다. 올해 들어 바람이 부족해 전력 생산이 줄었다. 풍력발전량이 지난해 대비 10% 감소했다. 바로 여기서 '에너지 공급 불안정'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전체 추이를 보면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독일 환경청은 "바람의 편차가 크지만, 새로운 풍력발전단지가 지속적으로 증가한 덕분에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독일 경제연구소(DIW)는 지난 11월 24일 발표한 연구보고서에서 "내년 탈원전 이후에도 독일 전력 공급은 안정적일 것"이라며 "2038년 탈석탄으로 인한 공급 우려도 기우"라고 전망했다. 연구소에 따르면, 독일은 지난해 전체 전력 생산의 4%인 20 TWh를 수출했다. 유럽 주변국과 연계된 에너지 송전 시스템 등을 봤을 때도 공급 안정성을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DIW는 설명했다.
날씨의 영향을 받는 신재생에너지를 보완하는 방법은 원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신재생에너지 설치를 더욱 늘리고, 잉여 전력이 발생할 경우 이를 저장해 필요할 때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2011년 이후 지금까지 노후 원전이 차례대로 폐쇄되었고, 그 공백을 신재생에너지가 꾸준히 채워왔다. 에너지 대란은 없었다. 앞으로 남은 원전이 폐쇄된다고 해도 전체 전력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라는 게 DIW의 분석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독일 새 정부가 내세운 야심찬 목표만큼 실제로 재생에너지를 대규모로 확장할 수 있을지 여부다. 가장 큰 과제는 주민 수용성. 염광희 박사는 "독일은 빠른 성과를 기대하며 대규모 재생에너지 단지를 설치하기보다는, 처음부터 여러 곳에, 태양광의 경우 지붕 등 잉여 공간을 이용하면서 주민수용성을 높여왔다"라고 설명한다. 이어 "독일에도 풍력발전기 높이의 10배 거리 안에 주거단지가 없어야 한다는 이격거리 규제가 있는데, 새 정부는 이 규제를 조정하면서 자원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겠다는 계획"이라고 설명한다.
원전 운영 회사조차 "원자력은 독일에서 끝났다"... 과거보다 혁신 준비
▲ 독일 링엔 지역에서 RWE가 운영하는 원자력발전소. 2022년 말에 운영이 종료된다. RWE는 이 부지를 활용한 친환경 수소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 ⓒ RWE
독일이 원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원전을 운영하는 기업 때문이다. 독일에서 아직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중인 기업은 RWE, Eon, EnBW 3곳. 이들은 이미 탈원전 이후의 판을 짰다.
독일 링엔에서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 중인 RWE는, 셸 등 다른 에너지 기업과 함께 녹색 수소 생산과 활용, 판매를 위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원자력 발전소가 있던 자리는 녹색 수소 생산을 위한 수전해 발전소로 변모한다. RWE는 "독일에서 원자력발전소는 단종된 모델"이라며 "우리는 2022년 말까지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고, 안전한 해체를 책임진다"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 중인 기업 Eon도 <한델스블라트>와의 인터뷰에서 "원전 폐쇄 직전에 (기후 전환을 위한) 원전의 기여를 논의하는 건 너무 늦었고, 유용하지도 않다"라고 밝혔다. EnBW는 "탈원전은 2011년 정치적 사회적으로 합의됐고, 법적으로도 명확히 규정됐다. 원자력은 독일에서 끝났다"라고 말했다.
원전의 폐쇄 시기를 법에 명시하면서, 원전 운영사의 역할은 남은 기간 원전을 안전하게 운영하고, 폐쇄 이후 안전하게 원전을 해체하는 일이다. 신규 원전 설립이나 수명 연장을 논의하기에는 현실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늦었다.
독일 원전 운영사들은 이미 손을 떠난 원전에 미련을 두기보다, 선도적으로 에너지 전환을 이끄는 에너지 기업을 지향한다. 독일이 원전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과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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