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만든 '보수' 대법원... 반세기 만에 낙태권 '폐기'
낙태권 보장 '로 대 웨이드' 판결 뒤집어... 바이든 "비극적 오류"
미국 연방 대법원이 여성의 낙태 권리를 보장한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을 공식 폐기했다.
대법원은 24일(현지시각) 다수 의견을 통해 "헌법은 낙태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으며, 헌법의 어떤 조항도 그런 권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라며 "따라서 이 판결은 기각되어야 하고, 낙태를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은 국민과 그들이 선출한 대표에게 반환된다"라고 결정했다.
그러면서 "임신 중절은 심오한 도덕적 문제를 제기한다"라며 "헌법은 모든 주민에게 임신 중절을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행위를 금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미국 헌법에 낙태 권리를 부여한 조항이 없다면서, 연방 정부 차원에서의 낙태 권리 보장을 폐기하고, 그 권한을 주 정부와 의회에 넘긴 것이다.
원정 낙태, 불법 시술 우려... "대법원 판결, 대다수 미국인과 대립"
앞서 대법원은 1973년 로 대 웨이드 판결, 1992년 플랜드페어런드후드 대 케이시 판결 등으로 낙태 권리를 보장해왔으나, 전체 9명 중 보수 성향 대법관인 6명이 이를 뒤집은 것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3명의 보수 성향 대법관을 임명해 대법원의 보수화를 이끌었다.
반면에 스티븐 브라이어, 소니아 소토마요르, 엘리나 케이건 등 3명의 진보 성향 대법관은 소수 의견을 통해 "대법원의 결정에 슬픔을 안고, 근본적인 헌법적 보호를 상실한 수백만의 미국 여성을 위해 반대한다"라고 밝혔다.
이로써 미국의 전체 50개 주 가운데 절반 이상이 낙태를 금지하거나 엄격하게 제한할 것으로 전망된다. 대부분 보수 성향이 강하고 공화당이 우세한 곳들이다.
이 때문에 낙태가 금지된 주에서 임신한 여성이 낙태를 허용하는 주로 이동하는 원정시술이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원정시술이 여의치 않은 경우 무허가 시술을 받거나, 불법 약물을 통해 낙태를 시도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또한 갤럽이 지난 2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서 응답자의 55%가 낙태를 찬성하면서, 대법원의 판결이 국민 정서에 뒤떨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AP통신은 "대법원의 판결은 대다수의 미국인과 대립하게 된다"라며 "최근 30년간 50개 넘는 나라가 낙태를 보장했으나, 미국은 폴란드와 니카라과처럼 오히려 낙태 제한을 향해 나아가는 몇 안 되는 나라"라고 지적했다.
CNN 방송도 "낙태 환자의 75%가 빈곤하거나 저소득 여성"이라며 "여성이 낙태를 선택하는 주된 이유가 경제적 여건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출산을 강요받는 여성을 위한 사회 안전망 확대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바이든 "대법원이 미국을 150년 전으로 돌려놔" 규탄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1년 텍사스주에서 성폭행을 당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 한 여성이 낙태 수술을 거부당하자, 텍사스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됐다. 노마 매코비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신변 보호를 위해 '제인 로'라는 가명을 썼고, 당시 '헨리 웨이드'라는 이름의 텍사스주 댈러스 카운티 지방검사와 법정에서 맞붙으며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당시 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이 찬성 7, 반대 2로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에 의거해 여성의 낙태할 권리가 합법적이라고 인정한 바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대법원 판결 직후 대국민 연설을 통해 "국가와 법원에 슬픈 날"이라며 "대법원이 미국을 낙태가 불법이었던 150년 전으로 돌려놓았다"라고 격앙된 어조로 규탄했다.
또한 "나도 대법원의 판결을 듣고 거의 쓰러질 뻔했고, 이 나라 여성의 건강과 생명은 위험에 처했다"라며 "너무나 많은 미국인의 근본적인 헌법적 권리를 앗아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극단적 이념이자 대법원이 저지른 비극적 오류"라고 주장했다.
특히 '예외 없는' 낙태 금지를 시행하는 주 정부를 향해서는 "여성과 소녀가 성폭행으로 생긴 아이를 떠맡아야 할 정도로 극단적"이라며 "나를 공포스럽게 한다"라고도 했다.
외국 정상들도 이례적으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트윗을 통해 "낙태에 대한 법적 권리를 잃은 수백만 명의 미국 여성과 함께할 것"이라며 "지금 그들이 느낄 두려움과 분노를 상상도 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이번 미국 대법원의 판결은 엄청난 뒷걸음질"이라며 "나는 항상 여성의 선택권을 지지해왔고, 지금도 그렇다"라고 강조했다.
"싸움 안 끝났다"... 11월 중간선거서 핵심 쟁점으로 급부상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할 경우에 대비해 행정명령을 검토해왔다. 여기에는 낙태약 구매 제한을 완화하거나, 원정시술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낙태를 둘러싼 민주당과 공화당의 시각차가 극도로 분열돼 있어, 오는 11월 중간선거의 핵심 쟁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으로 고전하는 민주당은 전세 역전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분위기다.
민주당의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공화당이 장악한 대법원이 암담하고 극단적인 목표를 달성했다"라며 "이 잔인한 판결로 우리의 어린 딸들이 어머니나 할머니 세대보다 권리를 더 억압당하게 됐다"라고 비판했다.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은 "우리는 반격할 도구가 있다"라며 "11월 중간선거에서 민주주의를 믿는 사람들을 뽑아서 로 대 웨이드 법안을 통과시키고, 법으로 만들도록 해야 한다"라고 촉구했다.
바이든 대통령도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여성의 선택권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의회가 연방법으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복구하는 것밖에 없다"라며 "이번 가을에 여성의 권리를 연방법으로 지킬 수 있는 상·하원 의원을 의회로 보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
다만 <뉴욕타임스>는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50년 가까이 지났으나, 의회가 아직도 낙태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을 제정하지 못했다며 민주당을 비판하기도 했다.
반면에 낙태 반대를 주장하는 마이크 펜스 전 부통령은 "이번 판결은 미국인에게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라며 "이 땅의 모든 신성한 생명이 법의 중심으로 회복될 때까지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라고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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