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차’ 문체부 경고…‘지원하되 간섭 않는다’는 원칙 깼다
문화계 팔길이 원칙 훼손 비판 목소리
“무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민간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을 강조해온 정부가 앞장서서 이를 공개적으로 부정한 겁니다.”
문화체육관광부 고위직 관료로 일했던 한 문화계 인사가 5일 <한겨레> 기자와 만나 던진 말이다. 최근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서 윤석열 대통령을 풍자한 고등학생의 카툰 작품 <윤석열차>가 전시된 것을 문체부가 문제 삼아, 4일 주최 쪽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쪽에 엄중히 경고한다고 밝히며 관련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표한 데 대한 반응이었다.
그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당시 청와대 지시로 문체부가 벌인 블랙리스트 공작은 극비리에 내밀한 잣대를 씌워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들을 지원에서 배제했지만, 이번에 문체부가 엄중 경고 방침을 밝힌 것은 사실상 처음 국가기구가 공개적으로 간섭 잣대를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문화예술계의 창작자와 기획자들 사이에서는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가 공표한 이래 외형적으로는 가장 핵심적인 국정 문화 기조로 20년 넘게 유지돼온 ‘팔길이 원칙’이, 진흥원에 대한 문체부의 엄중 경고 공표로 사실상 깨졌다고 보는 기류가 역력하다.
‘팔길이 원칙’은 국가기구가 민간 문화예술 활동을 비롯한 공공분야에서 금전 등의 지원은 하되 운영에 대한 간섭은 배제해 자율성을 보장하는 원칙을 뜻한다. 소득주도성장론을 주창한 영국의 경제학 거장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가 1940년대 제기한 이래, 오늘날 세계 각 나라 정부에서 보편적인 문화예술 정책의 전범으로 자리잡았다.
이번 사태 이후로 국내외 지자체나 민간단체의 문화예술 행사 때 정부 눈치를 보는 관행이 다시 생길 것이라며, 사실상의 블랙리스트 부활이 아니냐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지자체 미술 관련 기관의 간부는 “문체부는 검경과 같은 규율기관이 아니라 정부 부처 중 유일하게 문화예술의 자유를 주창할 수 있는 문화기관인데, 규율기관의 논리로 작품을 찍어내며 정치개입 행위를 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문체부 지원을 받는 상당수 문화예술계 행사 관계자들은 콘텐츠 내용에 대해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팔 길이 원칙
팔 길이 원칙은 공공지원 정책 시행의 기준 중 하나로, ‘팔 길이만큼 거리를 둔다’는 뜻이다. 즉,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공공에서 지원은 하지만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취지다.
팔 길이 원칙은 1945년 영국에서 처음 고안된 개념이다. 예술평의회(Arts Council)를 설립하면서 예술과 정치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만들었다.
법원은 2017년 7월 27일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이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운영한 행위에 대해, ‘형법상 직권남용죄로 처벌할 수 있는 범죄’라고 판단하며, ‘팔 길이 원칙’을 언급했다.
재판부는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범행은 팔길이 원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정치권력의 기호에 따라 지원에서 배제할 개인・단체를 청와대와 문체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해 하달한 것이다”라며 “문화예술위원회 등의 존재 이유를 유명무실하게 했고, 공정성에 관한 문화예술계와 국민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했다”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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