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골령골 따라 1㎞,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
제노사이드의 기억 대전 골령골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 13번지 일원은 한국전쟁 때 남한에서 벌어진 최대 민간인학살 터다. 당시 지역 사람들이 ‘골령골’(곤령골)이라고 불렀던 계곡이다.
골령골 학살은 대전형무소, 이승만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대통령이 6·25 발발 직후 피난 와서 지내던 충남도지사 공관이 대전형무소 가까이에 있었다. 이 대통령이 대전에 머물던 1950년 6월28일부터 7월17일까지, 대전형무소 수감자 등이 트럭에 실려 골령골 골짜기로 옮겨져, 헌병과 경찰에 의해 대량 학살됐다. 좌익계열 재소자들이 남하하는 북한군에게 협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대전감옥소로 개소해 1923년 대전형무소로 이름이 바뀐 이곳에는, 일반 재소자는 물론 해방 뒤 여순사건 관련 사상범과 제주 4·3사건 때 군법회의에 넘겨져 실형을 선고받은 제주도민 등이 수감돼 있었다.
당시 제주도에는 형무소가 없었기에, 4·3 관련자들은 서울 서대문과 마포, 대전, 대구, 목포, 전주, 인천형무소 등 전국 각 지역에 분산 수감됐다.
대전형무소에 갇혔던 4·3 관련 300명가량은 골령골에서 모두 총살됐다.
1950년 9월23일 주한미국대사관 소속 육군 무관 밥 에드워즈 중령이 미국 육군 정보부로 보낸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 제목의 보고서에는 “1950년 7월 첫째주 3일 동안 1800여명의 대전지역 정치범들이 처형됐다”고 기록돼 있다.
학살 직후 대전을 점령한 인민군과 함께 골령골 현장을 찾았던 영국신문 <데일리 워커> 앨런 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계곡에는 7000여구의 주검이 얇은 흙더미에 덮여 있었다”라고 썼다.
1800명에서 많게는 7000명까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지만, 세차례 이상 이어진 학살의 전체 희생자 수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보도연맹원들과 재소자들이 함께 희생되었으므로 실제 희생 규모는 매우 컸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희생자 수를 추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국민보도연맹 사건> 543쪽)고 밝힌 바 있다.
당시 골령골 주변에 살던 주민 임선기씨(2000년 당시 77세)는 “골령골로 들어가는 트럭마다 사람들이 겹겹이 포개 실려 있었어. 조금이라도 꿈틀거리면 군인들이 총 끝으로 내리찍고 무작스럽게 두들겨 패더라고. 하두 포개 실어놨으니 몇명이 탔는지도 모르지. 울타리 틈새로 그걸 봐노니께 무서워 살 수가 있나. 마을 사람들이 하두 무서워 방문꺼정 걸어 잠궜어. 아침부터 해걸음까지 총소리가 쾅쾅 났는데 약 일주일간 계속됐다. 막판 이틀 동안은 한밤중에도 총소리가 들렸다”고 증언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이규화씨는 “시체 옆에서 스님들이 목탁을 두드리며 염불하는 현장을 목격했다”고 말했다.(월간 <말>, 2000년 2월호 79쪽 ‘산내학살 진상조사단 실무자 심규상의 보고서’)
진실화해위가 2007년 시작하고 유가족 등 민간단체들 중심 대책위, 행정안전부와 대전 동구청 등이 이어간 유해발굴 결과, 2021년 11월까지 모두 1248구 유해가 발굴됐다. 올해도 몇차례 유해발굴 작업이 이뤄졌으니, 확인된 희생자 수는 더 늘었을 것이다.
<데일리 워커> 앨런 위닝턴 기자는 “수천명을 골짜기를 따라서 한줄로 세워 총으로 쏘아 매장했는데, 가장 긴 구덩이 길이는 182m였으며, 크고 작은 6개의 주검 구덩이들이 이어졌다”고 보도한 바 있는데, 실제 유해발굴도 골짜기를 따라서 1km 정도까지 이어지고 있다. 유가족 등이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민간인 주도로 첫번째 유해발굴을 시작한 2015년 2월23일, 골령골 학살 터를 처음 찾았다.
1920년 개교했다는 산내초등학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자, 왼쪽으로 학살터가 나타났다. 터 입구에 ‘민간인 집단 희생지며 골짜기 전체가 학살 터였다’라는 입간판이 보였고, 스무걸음 앞쯤에 놓인 검은 대리석에는 ‘이곳 골령골은 (중략) 대전 호남지역 인근 민간인들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끌려와 집단 처형돼 묻힌 비극의 현장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하늘은 말고 파랬지만, 산세가 가파르고 깊어 그늘이 길게 드리워진 학살 터에 서있자니 마음도 발걸음도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김봉규 | 사진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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