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부시 연설에 항의하던 대학생들은
* 16일 대전 유성구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학위수여식 도중 졸업생 신민기씨가 “알앤디 예산 복원하십시오”라고 소리치는 순간 경호원이 입을 막으며 제지하고 있다. 대전충남사진공동취재단
카이스트 학위수여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항의하던 졸업생이 입을 틀어막히고 사지가 들려 ‘치워지는’ 장면을 봤을 때, 기억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광경 하나가 떠올랐다. 20년 전, 미국의 한 대학에서 연수 중일 때 일이다.
2005년 3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 대학에서 연설을 했다. 부시는 사회보장제 수정안을 밀어붙이고 있었는데, 시민들의 압도적 반대에 부딪히자, 60일 동안 60개 도시를 도는 대규모 여론전에 돌입했다. 첫번째 방문지가 이 대학이었다.
학생들은 시위를 조직했다. 행사가 열리는 체육관 바로 건너편에 수백명의 학생과 교수, 유학생, 인근 주민 등이 도열해 구호를 외쳤다.
“우리의 주장은 무엇인가!”
“부시를 돌려보내는 것!”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말라!”
부시의 외교정책을 비판하는 구호도 섞여 들었다.
부시는 시위대가 자리한 도로를 피해 다른 길로 행사장에 입장했다.
체육관 안에서도 저항이 있었다. 연설 도중 한 청중이 일어나 부시를 향해 소리쳤다. 경찰과 보안요원들이 그를 앉힌 뒤 돌발 상황에 대비해 주변에 서서 지켜봤다. 일부 학생들은 이라크전 반대를 상징하는 티셔츠를 입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부시는 연설에서 외교정책을 언급하며 “나는 모든 이들의 영혼 깊은 곳에 자유에 대한 열망이 있음을 믿는다”며 “자유는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준 신의 선물”이라고 했다.
바깥 시위대는 “테러 혐의자를 시리아와 같은 ‘고문 국가’에 넘겨 미국 대신 고문하게 만드는 게 자유를 위한 것이냐”고 외쳤다.
부시의 ‘자유’가 인류 보편의 자유가 아님은 분명했다. 다만 그 교정의 학생·시민들에게 저항의 자유는 보장돼 있었다. 대통령 행사장 코앞의 시위 현장에는 경찰도 보이지 않았고 폴리스라인도 없었다. 총기 소지가 허용되는 나라의 살풍경한 경호를 예상해봤지만, 흔한 보안검색 외에는 눈에 띄는 게 없었다. 체육관 안의 저항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자유를 지상의 가치로 삼고, 그 맨 앞자리에 ‘표현의 자유’(수정헌법 제1조)를 내건 나라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풍경이 흥미롭게 다가오기는 했지만, 대단하달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학생들과 비할 수 없이 치열한 민주화운동으로 독재를 무너뜨렸고, 시민들은 스스로 쟁취한 자유의 공기에 점차 익숙해지던 시대였다.
그로부터 2년 뒤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일화는 그 시대의 성격을 요약해준다. 청와대에서 열린 장애인차별금지법 서명식에서, 일부 참석자가 갑자기 대통령 앞으로 다가와 시위를 벌이자, 노 대통령은 이들을 제지하는 대신 “얼마나 시간을 달라고 얘기하십시오. 그러면 말씀하실 만큼 시간을 드릴 테니까요”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2분여 동안 시위를 지켜본 뒤 “말씀 중단하지 않으면 바깥으로 모시겠습니다”라며 정중히 퇴장 조처했다.
그러나 20년 세월은 헛것이었는지, 자유의 공기는 순식간에 탁해지다 못해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대통령에게 쓴소리 한 국회의원은 사지가 들려 쫓겨나고, 카이스트에서도 그 살풍경이 되풀이됐다. 같은 날 카이스트 교문에서 졸업생들에게 인사하던 진보당 총선 후보는, 대통령 동선에 있다는 이유로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했다.
지난 8일에는 대통령을 향한 것도 아닌 피켓 시위를 하던 노동자들이, 대통령 차량이 지나갈 예정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밀려났다.
‘과잉 경호’라는 말로는 담아내지 못할 퇴행이다. 나라 곳곳에서 다시 똬리 트는 독재의 기운, 통치자가 국민을 대하는 자세의 급락을 상징한다. 윤 대통령이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자유’가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뜻한다.
자유로운 인격의 발현이자 자유 시민의 정치적 숨통인 표현의 자유가 철저히 틀어막히는 디스토피아의 서곡이다. 학위수여식에서 짐승처럼 끌려나간 젊은이는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한 자유에 대한 열망을 짓밟혔다.
윤 대통령은 배우자의 명품 가방 수수와 관련해 “대통령과 대통령 부인이 어느 누구한테 박절하게 대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불법적 금품을 건네는 누구한테는 박절하지 않으면서, 민주국가 시민으로서 정당한 질문을 하는 누구에게는 왜 그리 박절하단 말인가.
국정의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민주국가의 대통령 자격부터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유와 열기로 채워졌던 그날 교정은 아련한 추억 대신 울분을 깨우는 기억이 됐다.
학생들의 구호가 오늘처럼 또렷하다.
“민주주의란 어떤 것인가!”
“바로 이런 저항이 민주주의다!”
박용현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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