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대통령 착각이 불러올 파국의 위험
범민주 또는 범진보 세력이 189석을 차지한 22대 총선 결과를 두고 나오는 평가 중 하나는 “윤석열 정권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자 민주당 견제의 의미가 담겼다”는 것이다.
여기엔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등 야권이 탄핵선인 200석을 훌쩍 뛰어넘으리란 기대를 불어넣은 방송 3사 출구여론조사의 영향이 적지 않다. 야당 지지층에선 실제 개표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쳤다는 실망감을 표출했다. 방송에 나온 어느 보수 패널은 “국민의힘이 100석을 넘기면 그건 국민이 몽둥이 아닌 회초리를 들었다는 뜻”이라고 여당 참패 의미를 축소했다.
그러나 4년 전 180석에 이어 범민주 진영이 189석을 확보한 건, 보수 우위의 정치구도가 강고했던 우리 정치사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압도적 승리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한 정당이 200석을 넘은 건 딱 한번뿐이다. 선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1990년 3당 합당이라는 인위적 정계개편을 통해서였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보수대연합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217석의 공룡 정당이 됐지만, 불과 2년 뒤 열린 14대 총선에선 과반에 못 미치는 149석으로 쪼그라들었다.
189석 쟁취가 소선거구제 특성에 기반을 뒀을 뿐이란 지적도 있지만, 총선에서 국민 과반 지지를 얻은 정당은 진보·보수를 떠나 1987년 이후 이번 더불어민주당(50.5%, 1475만8083표)이 유일하다. 유권자들이 얼마나 무서운 민심의 칼날을 정권 명치에 들이댄 것인지 알 수 있다.
착각이 문제인 건, 가뜩이나 자기중심적이고 고집 센 윤석열 대통령의 판단과 행동에 잘못된 정보를 입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국정 쇄신을 하되 야당도 무리한 요구를 자제하라’는 식으로 총선 결과를 오판한다면, 윤 대통령은 약간의 시늉만 할 뿐 국정운영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을 터이다.
새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을, 국무총리엔 권영세·주호영 의원 등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단적인 예다. 원 전 장관은 김건희 여사의 양평 땅 투기 의혹이 일자 고속도로 건설을 백지화할 정도로 윤석열 정부 폭주에 책임이 있다. 또 ‘범죄혐의자 이재명을 잡겠다’며 인천 계양을에 표적 공천을 자청한 사람이다. 이런 인사를 비서실장에 임명하면서 야당과 대화하고 국정운영 기조를 바꾸겠다고 하면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통령 참모인 비서실장보다 더 중요한 건 차기 국무총리 임명이다.
민심의 전면적 이반을 봤다면, 먼저 제1야당 대표를 비롯한 각계 인사를 만나 국정운영 방식을 어떻게 바꿀지 진지하게 논의하는 게 올바른 순서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관섭 비서실장을 통해 의례적인 총선 입장을 밝히더니, 곧바로 인선에 착수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여전히 ‘인사권은 대통령 고유 권한이니 누구도 참견 말라’는 식의 아집과 독선이 느껴진다.
“국민이 겨우 명줄만 붙여놓았다”는 홍준표 대구시장의 총선 평가는 나름 정확하다. 실낱같은 생명이라도 이어가려면 윤 대통령은 자신이 싫어하는 야당 대표들을 정치 파트너로 인정하고, 이들과 대화하면서 국정을 이끌어가려는 자세를 보이는 게 필요하다.
‘사법 리스크’는 사법부에서 판단할 문제지, 민심을 뛰어넘을 만큼의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남북전쟁을 불사한 미국의 에이브러햄 링컨은 역대 미국 대통령 평가에서 항상 1, 2위에 오른다. 링컨은 당시 합법이던 노예제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민심이 전부다. 국민의 마음을 얻으면 못 할 게 없다. 이걸 잃으면 할 수 있는 게 없다. 따라서 국민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자가 법을 제정하거나 판결을 내리는 자보다 더 중요하다.”
이 말의 의미를 ‘정치인 윤석열’은 깨닫기 바란다.
윤 대통령은 국회 과반을 차지한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를 만나야 한다. 국무총리로 누가 적합한지, 야당과 협치를 통해서 지금의 경제·민생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데 머리를 맞대야 한다.
국무총리 후보자를 국회 청문회에 세우기 전에, 미리 야당 지지를 얻으려는 노력과 행동을 보일 때, 비로소 ‘대통령이 변하려 애쓰는구나’ 국민은 느낄 것이다.
현명한 참모라면, 윤 대통령에게 조국 대표와 이준석 대표도 만나라고 조언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를 너무 쉽게 생각하고, 끊임없이 검찰에 의존하고,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윤석열 정부 앞날은 더 험난한 위기의 연속일 것이다.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낭떠러지에 걸린 외줄을 건널 수 있다.
박찬수 : 대기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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