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훈 대령 같은 검사는 왜 없나
*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지난 11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내 군사법원에서 열린 5차 공판에 참석하기에 앞서 시민단체 대표, 대학생, 야당 의원들의 응원을 받자 눈시울이 붉어진 채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어 퓨 굿 맨’(1992)이나 ‘장군의 딸’(1999) 같은 영화에서는, 군 수사관·법무관이 병사의 죽음, 은폐된 성범죄의 비밀을 파헤쳐, 지휘관과 장군을 법의 심판대에 세운다.
그러나 명령과 복종이 지배하는 군 조직에서, ‘일개’ 수사관이나 법무관이 상부의 압박을 뚫고 진실에 도달하는 게 현실에서 쉬울 리 없다.
우리나라에는 군에서 은폐된 억울한 죽음과 성범죄가 열거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았고, 영화 주인공 같은 수사관·법무관은 없었다.
그렇게 한과 비극이 쌓여온 끝에 겨우 이뤄낸 제도 개선 하나가 군사법원법 개정이었다. 사망·성범죄 사건은 상부의 손을 타기 전에 신속히 민간 수사기관으로 넘기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법을 만들어도, 이를 집행하는 사람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번엔 지휘관이나 장군도 아닌 대통령이 나섰다. ‘해병대 수사단이 혐의자를 많이 만들었으니 바로잡으라고 대통령이 야단을 쳤다.’(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 진상이 파악되기도 전에 상부에서 처벌 범위를 지정해주던 어처구니없는 과거 행태를, 새로운 군사법원법 아래서 대통령이 감행한 것이다.
국방부 장관과 해병대 사령관은 납작 엎드렸다.
다시 도래한 ‘인치’의 늪에서 ‘법치’를 구하고자 나선 건, 박정훈 단장(대령)을 비롯한 해병대 수사단뿐이었다.
얼마 전 박 대령 변호인인 김정민 변호사를 인터뷰하면서 인상 깊었던 대목은 “해병대는 ‘누가’ 명령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명령했느냐를 중요하게 본다”는 말이었다.
명령을 내린 게 사령관이든, 장관이든, 심지어 대통령일지라도, 법에 어긋나는 명령은 따르지 않겠다는 박 단장의 결기를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이는 비단 해병대, 나아가 군에만 필요한 자세가 아니다. 어느 국가 조직에서나 관철돼야 할 원칙이다. 특히 수사기관이나 검찰 같은 형사사법 영역에서는 양보할 수 없는 철칙이 돼야 한다. 공정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다.
해병대 수사단은 공정성·독립성을 지키려 분투했다. 반면 법치 수호를 위해 이들과 손잡았어야 할 군검찰은, 박 대령을 항명죄로 수사·기소하는 데 앞장섰다.
군검찰은 대통령 격노설을 박 대령의 “망상”이라고 구속영장에 적시했다.
구속영장은 기각됐다. 대통령 격노는 사실로 드러났다.
군검사가 허위 공문서 작성 등 혐의로 고소당해 수사받는 치욕스러운 상황을 자초했다.
위상에 걸맞지 않은 검찰의 비겁한 모습은 군 바깥이라고 다르지 않다.
김건희 여사의 주가조작 혐의와 명품 백 사건 수사를 질질 끌고 있는 검찰의 모습은 구차하기 이를 데 없다. 채 상병 순직 사건처럼, 이들 사건에도 대통령이 노골적인 수사 개입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직간접적인 압박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아예 ‘알아서 기는’ 것이라면 더 고약하다.
김 여사 수사를 지휘하던 서울중앙지검 지휘부가, 지난달 검찰 인사에서 일제히 ‘좌천성 승진’을 당했다. 이들은 김 여사를 엄정하게 수사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럼 ‘검찰도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고 인정하고, 이들을 내친 인사권자만 탓해야 할까.
당치 않다.
박정훈 대령이 사령관의 지시에 소극적인 저항만 하다 결국 인사이동을 당했다면 어땠을까.
그건 말이 저항이지 그냥 굴복한 것이며, 수사단장의 임무를 저버린 행위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사를 당한 검찰 간부들은 해야 할 일을 제때 하지 않은 것이고, 검찰의 독립성을 스스로 팽개친 것일 뿐이다. ‘인사 패싱’을 당한 검찰총장은, 이후에도 김 여사 수사를 하겠다는 것인지 안 하겠다는 것인지 모를 선문답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
대통령 격노 소식에 하루아침에 태세를 전환한 국방부 장관이나 해병대 사령관 못지않게 허약하고 비겁하다.
반면 검찰은 대통령의 정적과 비판세력을 겨냥한 수사에서는 흔들림 없이 저돌적인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이 역시 상부의 의중에 맞춰 박 대령에게 집단항명수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부터 들이대던 발 빠른 군검찰을 빼닮았다.
검찰의 권한과 위상은 해병대 수사단에 비할 수 없이 크고 중대하다. 수사·기소권을 틀어쥐고, 법치의 수호자이자 사법부에 준하는 기관을 자임한다.
그러나 그에 걸맞게 공정성과 독립성을 소중히 지키고, 국민으로부터 주어진 권한을 무겁게 여기며,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려는 자세는 해병대 수사단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거대한 조직에 박 대령 같은 인물 한 명이 없다.
깜냥을 넘어서는 힘은 남용되거나 낭비되기 마련이다. 지금 검찰이 그렇다.
박용현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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